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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서부리에 위치한 활엽수림인 계정(桂亭).

수령 10~250여년 된 이팝나무 외 538그루가 모여 숲을 이루고 있으며 

1997년 경상북도 기념물 제123호로 지정되었다.


능묘 입구에는 자인에서 관직을 지낸 사람들의 공덕비들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한(韓)장군 묘.


이곳은 신라 혹은 고려 때 도천산에 왜구가 출몰하여 주민을 괴롭히자

한장군이 누이와 함께 화려한 꽃관을 쓰고 여원무(女圓舞)를 추어 도천산 아래 

버들못(柳堤池)으로 왜구를 유인, 칡그물로 가두어 검흔석(劍痕石)에 올려놓고

참수시켰다는 한장군의 묘이다.

1968년 8월 자인중고등학교 본관 건물 신축을 위해 공사중 석실묘가 발견되어

발굴조사를 한 결과, 두개골이 포함된 유골과 은으로 장식한 갑옷 투구,

녹슨 철제창, 그리고 많은 토기류가 출토되었다.

이 묘를 한장군의 실묘(失墓)라고 확정하고 출토된 부장품은 영남대학교 박물관에

옮겼으며, 유해는 1969년 5월 10일 이곳에 옮겨 한장군 묘를 만들어 매년 단오절에

한장군 제를 올리고 있다.  

지금은 그 부장품이 2011년 12월 29일 대구박물관으로 이거(移去)되어 보관, 소장하고 있다.







진충묘(盡忠廟).


중요무형문화재 제44호로 지정된 경산자인단오제 여원무의 주인공인 한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며, 일제 때 일본인에 의해 강제 철거되었으나 해방 후

북사리의 한당(韓堂)을 계정숲에 이건(移建)하여 현재의 진충묘가 되었다.

정면3칸 측면1칸 맞배지붕의 사당이다.







자인현청의 본관이었던 시중당(使衆堂).

1637년(인조15)에 자인현감 임선백(任善伯)이 건립한 자인현(慈仁縣)의 정청(政廳)으로 

일명 무금헌(撫琴軒)이라고도 하는데, 여러차례 이건하였다가 1980년에 

현재의 위치인 계정숲으로 이건하였다.


이 숲은 한장군을 모시는 성지로서 그리고 자인 단오굿의 굿판으로서 향토사적 의미가 큰 곳이다.

그 외에도 생물학적, 역사적, 민속적으로도 높은 가치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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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큰 공을 세운 정기룡 장군의 사당인 경충사(景忠祠) 및 유허지.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중평리에 소재해 있으며

정기룡 장군의 유품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86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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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교촌리에 위치한 성황사(城隍祠).

이 고장의 수호신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조선 초기에 창건되었으며 고려후기 명신인 영헌공(英憲公) 김지대(金之垈) 선생을

수호신, 일명 성황신으로 모시고 공의 위업과 영력으로 고을민의 안녕과

부귀를 기원하며 제사를 지내왔다.

김지대 선생은 젊은 시절 거란과의 전쟁시 國患臣之患, 親憂子所愚,

代親如報國, 忠孝可雙修라는 시를 지어 주목을 받고 조정에 발탁되었다.

이는 '나라의 근심은 신하의 근심, 어버이 근심은 자식의 근심이라,

어버이 대신 나라의 은혜를 갚는다면 충성과 효도를 함께 닦는 것이리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이후 전라도, 경상도 안찰사를 역임하면서 청렴과 공정성으로 이름이 높았고

청도를 관적(貫籍)으로 하사받아 청도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후대에 이르러 목조신상은 망실되었고, 사당은 1960년경 풍우에 완전 소실된

것을 1997년에 복원하고, 수호신상은 2009년에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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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묘의 입구, 문묘문(文廟門).

공자(孔子)와 베트남의 대 유학자를 모신 유교 사원인 문묘(Van Mieu-Quoc Tu Giam). 
1070년 리탄통(Ly Thanh Tong)황제가 공자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원이다.
11세기 리 왕조(李朝)가 하노이에 독립왕조를 세우기 전에는 1000년동안 중국의 지배를
받았었는데 당시 유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대표적인 곳이 바로 이곳이다.
리 왕조 동안에는 불교에서 유교로 국교가 전환되면서 문묘는 당시 정신적인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며, 1076년에는 베트남 최초의 대학으로 유학자를 양성하기도 하였다.






                               태양을 상징하는 규문각(奎文閣). 

                               이곳 문묘는 벽을 경계로 모두 5개의 마당으로 나뉘어 있으며 
                               문묘문, 규문각, 연지, 대성전, 공자 사당, 종루 등이 배치되어 있다.
                               중앙 통로와 문은 황제 전용이다.






                               19세기 원조(沅朝)시대에 만들어진 규문각에는 1484년부터
                               300여년간 시행한 과거시험의 합격자 명단이 새겨진 
총 82개의
                               진사제명비(進士題名碑)가 세워져 있다.
                               이는 각각 다른 얼굴을 한 거북이가 떠받치고 있는데, 
                               머리가 높을수록 관직 또한 높다고 한다.
                               거북의 머리가 검게 닳아 있는 것은 이를 쓰다 듬으면 시험에 
                               합격한다는 믿음 때문이며, 십장생인 거북이 등에
                               비석을 세운 것은 '오래도록 빛나라'라는 의미이다. 

                               문묘의 마당은 중국 고전에 대해 3년마다 치르는 과거 시험장소로
                               이용되었고 우수한 인재는 지방 관리를 감찰하는
                               암행어사로 활동했다. 







                               윗쪽에 걸린 만세사표(萬世師表) 편액은 '만세에 귀감이
                               되는 분'이라는 의미로 공자에 대한 존경을 표시한 것이라 한다.
                               이곳은 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찾아와서 자녀의 학업성취와 
                               시험 합격을 기원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공자상(孔子像).
                               공자 사당의 중앙에는 공자가, 양 옆으로는 증자(曾子), 맹자(孟子),
                               안자(顔子), 자사(子思) 등 4성(四聖)의 상(像)이 각각 봉안되어 있다.






문묘라고는 하지만 향을 사르고 기원하는 모습에서  
불교적인 느낌이 강하게 받게 된다.






                               생각보다 넓은 규모임에도 대체적으로
                               아담하면서도 깔끔한 분위기다.






대성전 뒤에 위치한 또 다른 건물인 국자감(國子監).
'꾸억뜨쨤(Quoc Tu Giam)'으로 발음되는 이 국자감은
베트남 최초의 대학이자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우리나라의 성균관과 비슷하다.
이곳은 강당, 도서관, 제기 등을 보관하는 장소로 구성되어 있다.






                               베트남의 대 유학자인 쭈반안(Chu Van An, 주문안, 周文安, 1292~1370)의 상.
                               국자감에는 대학 총장 등 최고의 학덕을 쌓은 분들의 상이 모셔져 있다.






                               문묘 한켠에는 수령이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고목이 버티고 서 있다.
                               아마도 이 나무는 동남아시아에서 자주 볼 수 있다는 
                               반얀나무(榕樹, Banyan Tree)가 아닌가 한다.
                               반얀나무는 성장방식이 아주 독특하여 가지가 위로 뻗다가
                               길게 쳐지면서 지면에 닿으면 뿌리를 내리고 또 다른 줄기를
                               형성해 성장하는 방식으로 영역을 넓혀가는데, 결국에는
                               단 한 그루의 나무로 숲의 형태를 이루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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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에는 경상북도 기념물 제103호로 지정된 
청도읍성(淸道邑城)이 자리하고 있다. 
읍성은 왜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동래에서 서울로 향하는 주요 도로변에 축성한
성 중, 지방관아가 소재한 고을의 방어를 목적으로 축성된 성곽을 말한다.
청도읍성의 정확한 축성시기는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부터 있었다고 전해진다.
당시에는 석축(石築)과 토축을 혼합한 형태였으나, 청도군수 이은휘(李殷輝)가
선조 23년(1590년)부터 2년에 걸쳐 완공하면서 지금과 같은 석성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 북문(공북루) 및 옹성. 



청도읍성은 둘레가 1,570보(약 1.88km), 높이는 5자 5촌(약 1.65m)의 규모로
동문 · 서문 · 북문이 있었다.
임진왜란과 여러 번의 화재로 소실되기도 하였지만 수 차례 개축하여 읍성을
유지하여 왔고, 고종 7년(1870년)에 남문을 건립하여 4문을 갖추게 되었다.




                                                            ▲ '해동지도'에 나타난 청도읍성.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도시화와 도로 개설로 문루는 철거되고
                                                          성벽 일부는 훼손되었으나,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5년 경상북도기념물 제103호로 지정되었다.
                                                          청도읍성은 성의 기저부가 전역에 남아 있고, 각종 지리지와 고지도에
                                                          자세한 기록이 있어 발굴조사와 고문헌 고증을 거쳐 북문(공북루)을
                                                          중심으로 성벽과 옹성 등 성곽을 복원해 나가고 있다.








현재 청도읍성은 일부만 복원이 된 상태로, 북쪽의 성벽을 따라
자그마한 연못과 정자 등이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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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읍성의 동쪽 성벽 아래에는 그동안 선정을 베푼 벼슬아치(官吏)들을
표창하고 기리기 위해 세운 청도의 선정비군(善政碑群)이 늘어서 있다.
1675년부터 1904년까지 조선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모두 30기(관찰사 2기,
군수 25기, 찰방 3기)이다.








이 선정비들은 읍성 외곽 서상리, 동천리, 남성현 등 주요 도로변에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되며, 비석이 있던 주변 도로가 확장되면서
발견된 비석들을 도주관(객사)으로 옮겨 보관해 오다 2008년
청도읍성 동문지 주변으로 이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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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성 바로 동쪽에는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석빙고가 자리하고 있다.
석빙고의 입구 왼쪽에는 석비(石碑)가 서 있는데, 앞면에는 공사에 동원된
인원수 · 쓰인 재료 · 비용 등을 기록해 놓았고, 뒷면에는 비를 세운 날짜와 함께
관계된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 놓았다.
그 중에 '계사(癸巳)년'이라는 기록이 있어 조선 숙종 39년(1713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석빙고는 화강석을 재료로 하여 만들어졌으며 높이가 4.4m,
길이 14.75m, 폭이 5m의 장방형 구조로, 다듬은 돌로 윗부분을
반원형인 홍예(虹霓)로 들어 올리고 잡석으로 벽을 쌓았다.  
현재는 양쪽 벽을 이어주던 반원아치 형태의 홍예가 4군데
남아 있을 뿐 천장은 완전히 무너져 불완전한 상태이다.








                               내부는 계단을 통하여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경사가 져 있고
                               중앙에는 배수구가 있어 경사를 따라 물이 외부로 배출되도록 하였다.








천정에는 환기구멍이 있었으리라 짐작이 되지만 무너져내려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지금까지 전하는 6기(
청도, 경주, 영산, 창녕, 현풍, 안동)의 석빙고 중 청도 석빙고는
경주 석빙고 다음으로 큰 규모이고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외에 황해도 해주까지 합하면 총 7개의 석빙고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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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주관(道州館).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2호로 석빙고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위치한다.
도주(道州)는 청도의 옛 이름으로 이 건물은 조선시대 청도군의 객사(客舍)로 쓰이던 곳이다.
객사는 중앙에 정청(政廳)을 두고 좌우에 동헌, 서헌을 둔 구조로 정청에는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시어 지방 수령이 초하루와 보름에 배례를 하였다.
동 · 서헌은 접객시설로 외국 사신들이나 중앙관리들의 이동시 접대 및 유숙하던 곳이었다.








도주관은 조선 초기부터 있었으나 노후하여 중종 38년(1543년) 관찰사 임백령이
중창하였고, 주세붕이 쓴 '도주관 중수기문'에 중창기록이 남겨져 있다.
이후 정청과 우객사만이 남아 있었으나 2006년 좌객사를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건물의 정청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익공(翼工)집이며, 동 · 서헌은 정면 6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다.
정청의 외관은 기둥을 건물 폭에 비하여 높게 세워 좌우 건물보다 높고 험준한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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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주관 입구에는 고종 8년(1871년) 병인 · 신미양요를 치른 뒤
                               쇄국의 결의를 다지고 국민들에게 외세의 침입을 경계하기 위해 
                               대원군이 세운 척화비(斥和碑)가 옮겨져 있다. 




                               참고/ 현장 안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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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 있는 석빙고는 얼음을 넣어두던 창고로 보물 제66호이다.
조선 영조 14년(1738)에 축조하였고, 4년후 반월성인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석빙고는 이곳 뿐만 아니라 현풍, 청도, 창녕, 안동 등지에서도 볼 수가 있다.









                               국보 제31호인 첨성대.
                               현존하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라는 것이 정설로 되어있으나,
                               선덕여왕을 기리는 상징탑, 혹은 제단이라는 일부의 주장도 있다. 
                               그러나 최근 첨성대가 천문대로 활용되었음을 증명하는 연구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기록에 의하면 첨성대 축조 이후 관측기록이 8배 이상이나 증가했으며,
                               당시 유성 관측 기록이 첨성대 주변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에 위치한 신라 29대 태종무열왕의 능(무열왕릉).
사적 제20호로 지정되어 있다.
능의 외형은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밑지름 36.3m, 높이 8.7m이다.
밑둘레를 따라 비교적 큰 자연석을 사용하여 무덤의 보호석으로 드문드문
놓았으며, 능 앞에는 혼유석(魂遊石)이 있다.









국보 제25호인 신라 태종무열왕릉비(太宗武烈王陵碑).
무열왕릉 경내의 비각으로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만 남아있다.
이수에는 '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글이 전서로 양각되어 있는데,
이는 김인문(金仁問)의 글씨라 전한다.








서악리 고분군(西岳里 古墳群). 사적 제142호로 무열왕릉 바로 뒷편에
위치한 4개의 대형 무덤을 가리킨다.
무덤의 주인은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무열왕릉 뒷편에 있는 것으로 보아
무열왕과 가까운 왕이나 왕족의 무덤일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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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광역시 동구 신무동 팔공산 기슭의 삼성암지 마애약사여래입상.
                               유형문화재 제21호로 현재 바위가 세로로 갈라져서 여래상이 새겨진
                               바위가 많이 기울어진 상태이다.
                               그러나 바위가 기울어졌다고는 하지만 부처님을 바로 세워서 봐도
                               서 있는 모습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조성연대는 통일신라의 양식을 이어받은 고려초기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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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포항시 남구 장기면사무소 내에 위치한 근민당(近民堂).
관아(官衙), 즉 옛 장기현의 현감이 공사(公事)를 처리하던
동헌(東軒)건물로서, 영일 장기읍성 내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내부구조는 약간 변형되었다.









                               역시 같은 장소에 위치한 장기척화비(長鬐斥和碑).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24호로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겪은 후
                               서양사람들을 배척하고 그들의 침략을 경고하기 위해 고종 8년(1871) 4월에
                               대원군의 명에 의해 전국에 세운 것 중의 하나이다.

                               원래의 위치는 장기읍성 내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분실되었다가 1951년 4월초,
                               장기면 지서 입구에서 찾아 장기면사무소 정문 좌측 도로변에 세워 두었다가
                               1990년 정원으로 옮겨 보호책을 설치하였다.
                               이 척화비는 사암으로 되어 있으며, 폭은 45cm, 높이 120cm, 두께 21cm이다.





                               참고/ 현장 안내판,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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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구에 들어서게 되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충성분수대.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영령들이 안장되어 있는
                               국립서울현충원은 한강과 과천 사이 넓은 벌판에 우뚝 솟은
                               관악산 공작봉의 기슭에 위치해 있다.
                              ------------------------------------------------------------------------------------------------------
                               1955년/ 국군묘지로 창설, 전사 또는 순직군인과 군무원 및 종군자의 영현을 안장.
                               1965년/ 국립묘지로 승격, 국가원수, 애국지사, 순국선열을 비롯하여 국가유공자,
                                              경찰관, 전투에 참가한 향토예비군 등이 추가.
                               1996년/ '국립묘지관리소'라는 명칭을 '국립현충원'으로 변경,
                               2006년/ 국립서울현충원으로 명칭 변경.
                              ------------------------------------------------------------------------------------------------------
                               계속된 안장으로 이곳이 만장되자 1979년 국립대전현충원을
                               창설하여 그곳에 안장하고 있다.








그 뒤로 꽃시계와 현충문, 그리고 현충탑.

국립서울현충원은 전체면적이 143만㎡에 이르며
경내에는 현충관을 비롯하여 무용용사탑, 전쟁기념관, 충렬대 등이 있다.








이곳은 국가원수묘역, 애국지사 묘역, 국가유공자 묘역,
군인·군무원 묘역, 경찰관 묘역, 일반 묘역, 외국인 묘역 등으로
구분, 조성되어 있다.








                               봄은 가까이 왔건만, 수 많은 영혼들은 차가운 이 땅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
                               누구에게는 귀한 아들, 또 그 누구에게는 든든한 남편이자 어버이였을 이들...  
                               오로지 이 나라 하나만을 위해 기꺼이 몸을 내던진 그들의 숭고한 정신에
                               자못 숙연해진다.








                                여러개의 상징탑 중의 하나... 경찰충혼탑.








이승만 초대 대통령 기념비.

잠시 국가원수묘역을 돌아본다.
이곳에는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하여 박정희, 김대중 대통령의 묘소가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65년 7월 19일 하와이에서 서거, 7월 27일
가족장으로 이곳에 안장되었다.
영부인 프렌체스카 여사는 1992년 3월 19일 서거하여 3월 23일
가족장으로 이곳에 합장되었다.








묘역 한 쪽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국장시에 사용되었던 영구차가 보존되어 있다.
당시 외부에 장식했던 국화는 제거하고 대신 그 자리에는 
장기보존할 수 있도록 유화 그림으로 그려 놓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9년 10월 26일 총탄에 서거하여 11월 3일
국장으로 이곳에 안장되었다.
영부인 육영수 여사는 1974년 8.15 광복절 기념행사 도중
흉탄에 서거하여 8월 19일 국민장으로 안장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9년 8월 18일 서거하여 8월 23일
국장으로 이곳에 안장되었다.


잠시, 큰 족적을 남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간 이 나라의 큰 어른들만을
뵙고 나오기는 하였지만, 사실 이곳의 주인은 이분들 만은 아닐 것이다.
어찌보면 이분들 뒤에는 특별한 댓가와 명예도 없이, 오직 이 나라의 
밝은 미래만을 염원하며 한 줌 흙으로 사라져간 이름모를 병사들도 있지 않은가.
그들을 비롯하여, 가치있는 삶을 살다 간 이곳 모든 분들의 값진 희생에
고개를 숙이는 바이다.  



참고/ 네이버백과사전, 국립서울현충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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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적으로 일본 목조주택의 구조적, 의장적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는 
                               다이토 여관(大藤旅館).
                               각 층에 많은 방을 가진 2층 목조건물로 1938년에 신축되었으며, 
                               담벼락에 붙여놓은 사진은 당시의 모습이다.

                               일제강점기때 어업 침탈의 현장이기도 한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장안동 골목 470m거리에는 적산가옥 50여 채가 남아있다.
                               절반 가까이는 빈집이라고 하는데, 일부는 방치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요리집 안성정(安城亭), 주인 니바야시마스에이(二井林增英).

                               적산(敵産)은 본래 '자기 나라의 영토나 점령지 안에 있는 적국의 재산 
                               또는 적국인의 재산'을 뜻하나 우리나라에서는 해방 후 일본인들이 
                               물러간 뒤 남겨놓고 간 집이나 건물을 지칭한다.
                               국내의 적산가옥은 해방 후 일반인들에게 대부분 불하(拂下)되었다.(네이버용어사전)








                               1922년에 신축된 하리야마식당 야마구치마사유키상점.
                               지금은 많이 낡은 모습이나 내부 목조계단과 난간 · 만월을 상징하는 
                               원형 창호 등, 전체적으로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다.
 
                               '종로거리' 혹은 '선창가'로 불리웠던 이곳 구룡포에는 
                               일제 강점기에 많은 일본인들이 들어와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당시 구룡포 앞 바다는 황금어장으로 일본인들은 한국인을 고용해 
                               엄청난 어획고를 올렸는데, 그도 그럴것이 조선인 어선은 100여척에 
                               불과한 반면 일본인 어선은 900여척이나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소속된 어부들만도 1만 2천여명, 그 중 구룡포에 
                               주소지를 둔 일본인만도 1천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영일군사'에는 1933년 구룡포에는 270여가구 1100여명의 
                               일본인이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구룡포의 최전성기는 1930~1940년대로, 1970년대까지는 
                               호황을 누렸지만 대형선박이 출현한 1980년대 말부터는 서서히 
                               내리막길을 걸었다고 한다.
                              








적산가옥 한 쪽 언덕에 위치한 구룡포공원으로 오르는 계단이다.
이 계단을 오르면 충혼탑 · 충혼각과 만나게 된다.

일본인들은 바다가 한눈에 내려가 보이는 이곳 뒷산에 공원을 만들고
신사를 세우면서 당시 후원을 한 일본인들의 이름을 비석에 새겨
공원입구 계단 양쪽에 나란히 세웠다.
그러나 해방이후 충혼탑을 건립하면서 시멘트로 기록을 없애고
그 비석을 거꾸로 돌려 구룡포 유공자들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현재 구룡포공원에는 순국선열을 기리는 충혼탑이 세워져 있으며, 
그 뒤편에는 충혼각이 있다.








                               구룡포를 일본의 전진기지로 발전시키는데 공을 세운 
                               일본인 '도가와 야사브로(十河 彌三郞)'를 기리는 송덕비. 
                               해방이 되자 대한청년단원들은 신사를 부수면서 
                               이 비의 비문에 시멘트를 발라 놓았다.








구룡포공원에서 내려다 본 구룡포항.








구룡포 일본인가옥거리 홍보전시관.

1938년 구룡포어업조합장을 지낸 하시모토 젠기치(橋本善吉)가 살았던
구룡포 243번지 건물로 당시 일본가옥의 형태를 온전히 간직하고 있다.
남아있는 일본인 가옥 중에서 가장 크고 격식을 갖춘 것으로 평가되며,
'一'자형 평면 형태의 지상 2층 목조건물로 1923년에 신축되었다.








당시 사용하던 물건들을 전시해 놓은 2층 전시장.
1층에서는 당시의 사진자료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위 왼쪽/ 주전자, 오른쪽/ 1930년판 중학교 수학교과서.
아래쪽/ 겨울 난방용으로 사용했던 화로.

그 외에도 다양한 문양으로 이루어진 미닫이 문을 비롯하여 
다리미, 이발기, 일본도(日本刀) 등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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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암 입구에 늘어 선 부도 및 비석.

이 중,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의 비석(클릭하셔서 크게 보세요.)은
광해군 4년(1612)에 세운 사명대사의 일대기를 기록한 석장비로써,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이 비문을 지었다.

일제때 일본인 경찰서장이 이 비문의 내용이
민족혼을 불러 일으킬 우려가 있다 하여 네 조각으로 깨뜨린 이후, 
1958년에 다시 접합하였다고 한다.
사명대사의 부도와 석장비는 본래 하나의 짝을 이루고 있던 것으로
보물 제1301호이다.

- 해인사의 부속암자로서는 원당암을 비롯하여
홍제암, 용탑선원, 백련암, 지족암, 희랑대, 삼선암, 금선암, 약수암,
국일암, 보현암, 금강굴, 길상암, 고운암, 간월암, 청량사 등이 있다.








홍제암(弘濟庵)











마침 해인사와는 달리
이곳 홍제암은 찾는 이가 적어 적막감마저 감돌았다.








모양새가 사찰의 이미지라기 보다 마치 고궁에
들어온 것으로 착각할 만큼 깔끔하고 아담하게 느껴진다.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넓은 배추밭이 나왔다.
                               아마도 이곳 스님들의 겨울을 책임질 
                               중요한 것들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배추밭을 지나니 또 다른 암자가 나온다.
마당에 큰 바윗돌이 박혀 그대로 노출된 것이 인상적이다.
빙산의 일각이랄까.
너무 깊이 박혀있다 보니 미처 제거할 수 없었음에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옛 산수화의
한 부분 같아보여 운치가 느껴진다.








인근에 위치한 또 다른 암자인 용탑선원.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이었던 용성스님을 위하여
창건된 이 암자는 스님의 사리탑을 수호, 관리하기 위하여
1945년에 창건되었으며 용탑전(龍塔殿)이라 불리기도 한다.








석굴같은 인공구조물이 시선을 끈다.
이 속에 불상이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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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로 향하면서 마주친 가야산의 위용.
높이가 해발 1430m, 넓이는 4328 정보에 이른다.
경치가 썩 빼어나서 예로부터 해동의 십승지로 일컬어졌던 곳이다.








비록 직접 산을 오르진 않았지만,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히 가야산의 가치를 짐작케 한다.
그 암봉사이로 번져가는 가을의 흔적. 








                               가야산 국립공원내로 진입했다.
                               계곡을 끼고 난 도로를 달리며 앞으로 나아갈수록 
                               자신도 모르게 속도를 서서히 줄이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가야산 국립공원에서 해인사 입구까지 이르는 4km의 계곡으로 
                               가을 단풍이 너무 붉어서 흐르는 물에 붉게 투영되어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  이 곳을 홍류동계곡이라 한다.
                               그러나 그 진가를 경험하기엔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다.

                               이 홍류동 계곡은 
                               우리나라 팔승 가운데 으뜸이라는 그 명성이 무색하지 않게 
                               여느 산에서는 볼 수 없는 멋들어진 계곡 풍경을 
                               계절따라 운치있게 펼쳐낸다.









송림사이로 흐르는 물이 기암괴석에 부딪히는 소리는
고운 최치원 선생의 귀를 먹게 했다 하며,
선생이 갓과 신발만 남겨두고, 신선이 되어 사라졌다는 전설을 말해주듯
농산정과 시구를 새겨놓은 큰 바위가 있다.

홍류동에는 주요문화재 자료인 농산정과 낙화담, 분옥폭포등
19명소가 있으며, 특히 농산정 맞은편에는
암각된 최치원 선생의 친필을 볼 수 있어 더욱 유명하다.
합천 8경중 제 3경이다.








                               경내로 진입하자 역대 고승들의 비와 탑이 
                               도열하여 맞아준다.








소중한 가르침, 무소유의 청빈한 삶,
장좌불와의 올곧은 수행정신으로 유명한
성철 큰스님의 부도탑이 널찍하게 조성되어 있다.
그 모양이 무척이나 현대적인 느낌으로
범인(凡人)은 알지못할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다.








                               해인사 사적비를 비롯한 20여기의 공덕비들이 
                               일주문에 다다르기 전 길 옆에 안치되어 있다.
                               유장한 세월의 흔적이 여기저기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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