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바위 관음휴게소쪽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바로 옆 감나무집 식당을 통해
산길로 접어 들었다. 그냥 산 능선을 따라 가볍게 갓바위까지 가볼 참이다.
주위가 잘 조망되지 않는 산길이지만 저 멀리 갓바위가 나뭇가지사이로
언뜻언뜻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계속해서 그곳까지의 거리를 눈으로 가늠해 가며 열심히 발을 옮긴다.
어느 정도 걸었을까, 주위를 가리던 나무들이 점차 보이지 않게 되고
이내 사방이 확 트여져 왔다.
오른쪽으로 휘돌아 좌측 위 암자가 보이는 산봉우리 까지 가야 할 능선이
한 눈에 들어온다.
도중에 널찍한 바위 위에서 휴식을 취했다.
굽이치는 저 산 너머로는 대구시가지가 기다랗게 누워있는 형상이다.
아마 왼쪽으로 보이는 터널은 익산포항고속도로 백안터널,
우측 아래로는 백안삼거리쯤 될 것 같다.
표충사의 입구에는 영사각이라는 다른 절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건물이 하나 서 있다.
이는 가람수호를 기원하는 외가람각으로써 가람각은 죽은 자의
혼을 실은 영가가 경내로 들어가기 전에 잠깐 모셔지는 곳이다.
이곳에서 영가는 속세의 때를 벗는 목욕을 하게 된다.
전남 순천 송광사의 세월각, 척주각이 이와 같은 용도라 한다.
경남 기념물 제17호로,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재약산 자락에
위치한 표충사, 그 절의 정문인 수충루의 모습이다.
다른 사찰에서는 보기드문 서원 정문 형태의 누각인데, 이는 사명대사의
위패를 모시고 서산대사와 기허대사의 위패를 같이 모신 표충서원이
표충사(表忠寺) 경내에 있기 때문이다.
표충사는 임진왜란때 공을 세운 사명대사(四溟大師)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국가에서 명명한 절이다.
654년(태종무열왕1)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죽림사(竹林寺)라 하였으며,
829년(흥덕왕 4) 인도의 승려 황면선사(黃面禪師)가 현재의 자리에 중창하여
영정사(靈井寺)라 이름을 고치고 3층석탑을 세워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것으로 전한다.
절 이름을 표충사로 바꾸어 부르게 된 것은 표충사(表忠祠)를 밀양시
무안면에서 옮겨오면서 부터 라고 한다.
왼쪽으로 부터 표충서원, 표충사(表忠祠), 유물관.
표충서원은 영조 20년(1744년) 왕명으로 조정에서 임진왜란때 구국구민하신
3대 성사를 모시고 매년 춘추로 제향을 올리게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종 8년(1871년)에는 대원군에 의해 서원철폐령이 내렸으나 이곳 표충서원은
훼철을 면했다고 한다.
또한 표충사는 임진왜란때 승병장으로 큰 활약을 펼쳤던 사명대사의 충정과
깊은 관련이 있어 이 유물관에는 사명대사와 관련된 16건 79점의 유물들이
소장되어 있다.
사천왕문에서 바라본 수충루.
근래에 조성된 사천왕문의 목조사천왕상.
표충사의 사당영역과 사원영역을 구분하고 있는 이 사천왕문은
원래는 대광전 맞은편 우화루 앞쪽에 있었으나, 최근 사당영역을
새롭게 조성하고 절의 진입로를 옮기면서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표충사 삼층석탑과 석등.
▶ 표충사 삼층석탑 (보물 제467호),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7.7m의 3층 석탑이다.
이 석탑은 기본적으로 신라 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상륜부에는
여러 장식과 함께 아직도 철주가 높이 솟아 있고, 삼층의 지붕 모서리에는
작은 풍탁을 달 수 있는 구멍이 뚫려 있다.
기단과 지붕돌에서 보이는 특징으로 보아 통일신라의 늦은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 표충사 석등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호).
이 석등은 기둥돌(竿柱石)과 등(燈)을 넣는 화사석(火舍石), 그리고 화사석을
받쳐주는 위 받침돌(上臺石)과 지붕돌(屋蓋石) 등을 모두 갖추었다.
다만 석등의 전체를 지탱해 주는 받침대(基壇)와 기둥을 받쳐주는
아래 받침돌(下臺石)은 유실된 것으로 보인다.
조각의 수법이나 규모 등 전체적으로 볼 때 통일신라 말기나 고려 초기의
석등으로 추정된다.
표충사 대광전(大光殿)과 팔상전(八相殿).
▶ 표충사 대광전(大光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1호이다.
대광전은 표충사의 중심 불전(佛殿)으로 가운데 있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질병과 무지를 다스리는 약사불을, 서쪽에는 서방 극락세계를
주재하는 아미타불을 각각 봉안하고 있다.
신라시대에 처음 지어졌다고는 하지만, 전란 등으로 불타 버린 것을
1929년에 다시 지었다.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八作) 다포계(多包系) 양식으로,
기둥머리의 용머리 조각과 추녀의 장식들이 화려하고 섬세하며, 기둥과
기둥 위 장식들의 간격이 동일하게 배치되어 균형미를 잘 살리고 있다.
또한 건물 네 귀퉁이에는 추녀가 쳐지는 것을 막기 위해 4개의 기둥(活柱)을
따로 두어 추녀를 받치고 있으며, 건물을 받쳐주는 받침돌(基壇石)과
주춧돌(礎石)은 다듬은 돌로 되어 있어 건물의 품위를 높여주고 있다.
특히 4개의 기둥 중 앞쪽의 기둥은 팔각형인데 반해 뒤쪽의 기둥은
원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런 구성은 매우 특이하다.
전체적으로 보아 이 건물은 화려하고 섬세한 조선 후기 건축양식을 잘 유지하고 있다.
▶ 표충사 팔상전(八相殿).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1호 이다.
팔상전은 부처님의 생애를 여덟가지 모습으로 나누어 표현한 탱화와
존상(尊像)을 모시는 법당이다.
팔상은 하천(下天), 탁태(託胎), 강탄(降誕), 출가(出家), 항마(降魔)),
성도(成道), 전법륜(轉法輪), 입열반(入涅槃)으로 구성되어 있다.
표충사에는 조선 철종대에 환월선사(幻月禪師)가 지장전 옛 터에 세운
팔상전이 있었으며, 지금의 것은 표충서원이 있던 곳에 1971년 옮겨 온 것으로
그 창건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표충서원은 사명대사 8세 법손 월파당 천유(月坡堂 天有)가 서산(西山),
송운(松雲), 기허(騎虛) 삼대사(三大師)의 영정을 봉안하고
향사(享祀)를 받들던 곳이다.
왼쪽부터 관음전과 명부전.
▶ 관음전은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으로 원통전(圓通殿)이라고도 한다.
표충사 관음전에는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을 상징하는 42수 관세음보살을 모셨다.
좌우보처로는 남순동자와 해상용왕이 응림해 있으며,
후불탱화로는 1930년에 조성된 천수천안관세음보살 탱화가 모셔져 있다.
▶ 표충사 명부전(冥府殿)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3호로
저승의 유명계(幽明界)를 사찰 속에 옮겨 놓은 법당이다.
지장보살을 본존으로 봉안하고 있기 때문에 지장전(地藏殿)이라고도 하며,
유명계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을 봉안하고 있기 때문에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한다.
표충사 경내에 관음전과 나란히 있는 이 명부전의 건립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임진왜란 전에 이미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당시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이후 광해군 때에 복구되지만 숙종 때의 화재로 다시 소실되고, 주지 도한(道閑) 등에 의해
다시 곧바로 복구가 이루어진다.
헌종 때에는 월파선사(月坡禪師)가 명부전 자리를 서산(西山), 송운(松雲), 기허(騎虛)
삼대사(三大師)의 영정을 모시는 영당(影堂)으로 바꾸기도 하였다.
지금 전하는 것은 1929년에 복원한 것을 1989년에 개축한 것이다.
이곳 표충사에는 예전에 TV에 출연했던 경력이 있는,
그래서 이제는 유명인사가 다 되어버린 토끼스님이 살고 있다.
사람을 무서워 하지 않고 예불시간이 되면 스스로 알아서
법당으로 들어가 절을 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표충사에 터를 잡은지 오래, 그래서 이제는 사찰의 식구가 다 되어버렸다는 그 토끼...
더운 날씨 때문일까. 건물의 구멍 안으로 들어가 잠깐동안 바깥의 동정을 살피더니
이내 어둠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청량사 입구의 표지석.
그런데 이미 알고 있던 매화산 혹은 남산제일봉이 아니라
천불산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생소한 이름이다.
곳곳에 기암괴석들이 서 있는 모습이 마치 불상을 이루는 듯하다 하여
그렇게 불리워졌다는데... 알고보니 이 산은 매화산, 남산제일봉
이외에도 천불산, 월류봉이라는 또 다른 이름도 가지고 있었다.
남산제일봉은 경남 합천군 가야면에 있는 매화산의 제1봉이다.
높이는 1,010m로 가야산국립공원에 속하며 가야산의 남쪽에 위치한다.
영남지역 산악인들에게는 매화산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사실 매화산(954m)은 남산제일봉에서 남동쪽으로 2km정도 떨어진 산이다.
다시 말해서 남산제일봉은 매화산 자락의 하나의 봉우리인 셈이다.
천불산을 등에 업고 있는 청량사.
열반의 꽃과 새를 바라보는 누각이라는 설영루(雪影樓)가 왼쪽에,
재가신자들의 숙소와 식당인 상락당(常樂堂)이 오른쪽에 각각 위치해 있으며.
그 사이로 재가신자들의 수행처인 적연당(寂然堂)이 보인다.
이곳 청량사는 해인사의 산내 암자로써 창건연대의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전해오는 말로는 해인사(서기 802년)보다 먼저 창건되었다고 한다.
'삼국사기' 최치원조에 이 절은 최치원(857~?)이 즐겨 찾던 곳으로
기록되어 있어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천년 옛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다포집이다.
왼쪽 건물은 병고로 시달리는 중생들을 구원해 주시는
약사여래 부처님을 모신 약광전(藥光殿)이다.
중요문화재로는 9세기초 부터 이 절을 지켜온 돌부처님(石造如來坐像, 보물 제266호)과,
신라 석탑의 대표적인 양식을 지닌 삼층석탑(보물 제266호),
그리고 9세기 끝무렵의 치레수법이 아름다운 석등(보물 253호) 등이 있다.
■ 청량사 삼층석탑
이 탑은 이중기단 위에 삼층의 탑신을 갖춘 전형적인 신라 석탑이다.
지붕돌의 낙수면은 완만하나 네 모서리에서 경쾌하게 반전되고 있으며
아래에는 각 층 다섯 단의 지붕돌 주름이 있다.
상륜부는 노반만이 남아 있으며, 탑 주위를 화강암의 석재로 넓게 구획하였다.
잘 처리된 탑의 각 부분은 아름다운 조화와 비례를 보이고 있고 조각수법도
경쾌해 보이는 9세기를 대표하는 석탑으로 전체 높이는 4.85m이다.
■ 청량사 석등
네모난 지대석 위의 하대석은 팔각으로 안상에 사자와 운상누각(雲上樓閣)이 교대로 새겨져 있다.
복련석에는 반전한 귀꽃이 있으며 간석(竿石)은 고동형(鼓胴形)으로 앙련과 복련으로 장식하였다.
화사석(火舍石)은 팔각으로 네면에는 화창(火窓)이 나머지에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비교적 얇은 편이며 상륜은 일부 부재가 올려져 있을 뿐 원형을 상실하였다.
전체적으로 균형을 잃지 않아 안정감을 보이고 있는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석등이다.
다만 고동형의 간주석, 비교적 평평한 지붕돌 그리고 조각이 얇은 점,
더욱이 장식적 경향이 강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제작시기는 9세기경으로 추측된다.
등반 개념도.
청량사 왼쪽 산길을 접어들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산을 오르면서 뒤를 돌아다 본 모습으로,
안부에 이르기까지는 이런 오르막길이 계속된다.
능선에 올라 전망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조금 올라가다 보니
이런 멋진 풍경과 만날 수 있었다.
가야할 길을 대충 눈으로 겨눠보니 온통 괴석들 투성이다.
그러나 가파른 암벽사이로는 철계단이 놓여 있는 걸로 보아
큰 어려움은 없을 것 같다.
다만 보기에는 그저 아찔하게 느껴질 뿐이다.
가는 길마다 호위하듯 서 있는 기암들...
한 구비, 한 구비를 돌아들 때 마다 또 다른 얼굴로 맞아준다.
눈 앞에 펼쳐지는 풍광에 이끌리어 열심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뒤를 되돌아 봤다.
암석들이 하나같이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선 모습이다.
경북 포항시 북구 청하면에 위치한 천령산(天嶺山)의 우척봉(牛脊峯, 775m),
그곳에 올랐다. 초입부터 하늘을 뒤덮은 숲길이 정상까지 그대로 이어지면서
그 시원한 공기를 맘껏 들이키다보니 어느새 몸 속은 청정함으로 가득 들어찬 느낌이다.
그러나 정상에 도착해 보니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주위가 탁 트여진 그런 곳이 아니다.
그저 등반로의 쉼터 같은 곳에 표지석이 서 있어 그곳이 정상임을 알게 해줄 뿐이다.
잠시 앉아 쉬면서 조금은 답답해지는 마음에 왼쪽길로 조금 내려가 보니
그제서야 쫙 펼쳐진 산의 능선이 드러난다.
저쪽 중앙부 산꼭대기에 어렴풋이 돌출되어 보이는 곳은 경상북도 수목원의 전망대로
이 길을 계속해서 가면 그곳에 도달하게 된다.
좀 더 왼쪽으로 눈을 돌리니 저 멀리 청하면과 흥해읍은 물론,
포항의 북부지역 까지도 한 눈에 들어온다.
내려올 때는 청하골이라고도 불리우는 보경사 계곡 쪽을 택했다.
보경사가 있는 내연산(710m)은 포항이기는 하지만 포항에서
가장 북쪽이라 청송군의 주왕산과 접해 있다.
주 능선은 밋밋하지만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져 계곡미가 빼어난데다
무려 12개의 폭포가 이어져 절경을 뽐낸다.
보이지는 않지만 깎아지른 듯한 절벽 저 아래로는 12폭포 중 가장 높은
연산폭포(20m)가 세찬 물줄기를 땅바닥으로 떨어뜨리고 있는 중이다.
위에서 내려다 보니 다리가 후들거린다.
연산폭포 바로 아래에 위치한 관음폭포.
왼쪽의 그늘진 절벽은 '비하대', 그리고 그 오른쪽으로 햇볕을 받고 있는 곳은 '학소대'이며,
저 구름다리는 연산폭포와 연결된다.
그늘에 가려져 잘 보이지는 않지만 폭포 주변으로는
관음굴이라 불리우는 작은 굴들이 여러개 뚫려 있는데,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어우러져 가히 절경이라
불리울만한 멋진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도 그럴것이 이미 이 계곡은 그 옛날, 진경산수라는
그림 양식이 완성된 곳으로서 진경산수의 고향으로
불려지고 있는데 그 창시자가 바로 겸재 정선이다.
왼쪽 그림은 겸재가 청하현감을 지낼 때에 그린
'내연삼용추도(內延三龍湫圖)라는 작품으로,
맨 윗부분의 폭포는 연산폭포이며 그 아래
두 가닥으로 갈라진 물줄기는 관음폭포, 그리고
맨아래 폭포는 잠룡폭포를 나타낸다.
다만 연산폭포가 비하대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데도 시원하게 드러나 보이는 것 말고는
실제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림이 아닌, 사진인데도 그 웅장한 풍경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것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아니, 사진으로 담기에는 그 분위기는 너무나 압도적일 뿐더러
오히려 그림이 더 실감나게 다가오는 것 같다.
초록의 산을 뚫고 불쑥 솟아오른 바윗덩어리...
'선일대'이다.
보경사(寶鏡寺)의 전경. 경북 포항시 송라면 내연산에 위치한다.
602년 진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신라 지명법사가 진평왕에게 '동해의 명산에서
명당을 찾아 자신이 진나라의 도인에게 받은 팔면보경을 묻고 그 위에 불당을 세우면
왜구의 침입을 막고 이웃나라의 침입도 받지 않으며 삼국을 통일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진평왕은 지명법사와 함께 동해안 북쪽 해안을 거슬러 올라 가다가
해아현 내연산 아래에 있는 큰 못 속에 팔면보경을 묻고 못을 메워 금당을 건립하면서
보경사라 불렀다고 전한다.
경내에는 중요문화재로 보물 제252호인 보경사 원진국사비와 보물 제430호인
보경사 부도가 있으며, 조선 숙종의 친필 각판(刻板) 및 5층 석탑 등이 있다.
고려 중기의 승려 원진국사의 탑비인 원진국사비.
13세에 승려가 된 원진국사(1171~1221)는 명산을 두루 다니며
수도를 하기도 하였는데, 왕의 부름으로 보경사의 주지가 되었다.
이후, 51세로 입적하자 고종은 그를 국사로 예우하고 '원진'이라는 시호를 내리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운 간결한 모습으로, 비의 몸체 윗부분의 양 끝을
접듯이 잘라 놓았는데 이러한 모습은 당시에 유행하던 양식이다.
이 비가 완성된 것은 고종 11년(1224)으로 원진이 입적한 지 3년 후의 일이며,
비문에는 원진국사의 생애와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늦은 오후, 잔뜩 찌프린 날씨속에 한라산 자락에 위치한 관음사를 찾았다.
그 초입으로, 중간에 보이는 건물은 일주문이다.
관음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3교구 본산으로서 제주도의 30여 개 말사를 관장한다.
창건자 및 창건연대는 미상이며, 제주에 잡신이 많다 하여 조선 숙종 때 제주 목사였던
이형상(李衡祥)이 많은 사당과 함께 사찰 500동을 폐사하면서 폐허가 되었다.
현재의 관음사는 비구니 안봉려관(安逢麗觀)이 승려 영봉(靈峰)과
도월거사(道月居士)의 도움으로 1912년에 창건한 것이다.
처음에는 법정암(法井庵: 관음사의 전신)이라 하였으며, 창건당시 불상과 탱화는
용화사(龍華寺)와 광산사(匡山寺)에서 옮겨 왔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고려시대부터 있었다고 하며, '동국여지승람'의 12개 사찰 중
마지막에 기록되어 있다.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에 이르는 길에는 수 많은 부처님들이
도열하여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좌,우측 각각 54불로 모두 108불이 모셔져 있는데, 그 풍경이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저 끝으로 사천왕문이 보인다.
제주 현대사의 아픈 상처를 갖고 있는 이곳은 제주도 4.3사건(1948년) 말기
유격대와 군 토벌대의 치열한 격전지이기도 하며, 군주둔지로 이용되기도 했다.
이후, 토벌대에 의해 모두 소실된 것을 1968년에 복원하였다.
보아하니, 하나하나... 모두가 다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사천왕문.
큰 깨달음을 성취하여 부처님의 지위에 이르게 되면, 동서남북 하늘을 주재하는 천신들도
부처님을 받들어 공양하면서 부처님의 법을 배운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부처님을 사천왕이 옹호하기 때문에 누구든지 부처님께 경배하려면
천왕이 지키는 관문을 통과하여야 한다는 뜻에서 이 사천왕문을 세웠다.
현재의 사천왕문은 1948년 4·3사태 때 불타버린 관계로 1973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천왕문을 지나 본전에 이르는 길 옆, 그 돌탑 위에도 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좌대는 제주도의 화산석인 현무암으로 되어있다.
경내에는 중앙에 보이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명부전, 종루, 산신각,
불이문(不二門), 일주문 등이 각각 들어서 있는데,
특이하게도 좌측 건물에는 산신각, 칠성각, 독성각을 한 전각에 다 모셔 두었다.
대웅전 앞마당 좌측 위로 올라가면, 중앙에 미륵불을 두고
수 많은 부처님들이 에워싸고 있는 모습이 나타난다.
지은 지 얼마되어 보이지 않는...
아마도 요사채로 짐작된다.
관음사 입구, 일주문의 좌측편에는 2008년 10월에 점안식을 가진
제주대불(초전법륜상)이 커다랗게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한라산을 오르는 등산로인 '관음사 등산코스'에 속한다.
산방산(山房山)은 조면암질 안산암으로 구성된 높이 395m의
거대한 종모양의 종상(鐘狀) 화산체로서, 둘레는 3,780m, 면적은 988,332㎡이다.
산방은 산 속의 굴을 뜻하며 산방산 남쪽 측면에 해식동인 굴이 있어
산방산이라 하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옛날 한 사냥꾼이 한라산으로 사슴사냥을 나갔는데, 그날따라 사슴이
한 마리도 얼씬거리지 않아 결국 정상까지 오르게 되었다.
이리저리 찾아 헤맨 끝에 드디어 사슴 한 마리를 발견하고는 급히 활을 치켜들었는데
그만 잘못하여 활끝으로 옥황상제의 엉덩이를 건들고 말았다.
이에 화가 난 옥황상제는 한라산 봉우리를 뽑아 서쪽으로 내던져 버렸는데
그것이 날아와 박힌 곳이 이곳 산방산이고, 그 패인 자리는 백록담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뒷받침이라도 하듯 실제로 산방산은
백록담에 쏙 들어 앉을 만한 크기와 형세를 하고 있다 한다.
산방산 아래에 위치한 용머리는 이곳의 지형이 마치 용이 머리를 쳐들고
바다로 뛰어 들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듯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여기에도 전설이 있다.
중국 진나라 시황제는 중국을 통일한 후 자신에게 맞설
누군가가 나타나게 될까봐 전전긍긍하였다.
그러던 중 탐라섬에 제왕이 태어날 기세를 지닌 터가 있다는 말을 듣게 되자,
풍수에 능한 호종단에게 그 곳에 가 혈맥을 끊어버릴 것을 명했다.
이에 호종단이 이곳 산방산에 도착하여 태평양으로 나가려고 용머리가
꿈틀대는 형세를 목격하고는 용의 꼬리와 잔등을 끊어버렸다.
그러자 시뻘건 피가 솟아오르며 주변을 물들였고
산방산은 괴로운 울음을 며칠 동안이나 토해냈다고 한다.
'하멜표류기'로 우리나라를 유럽에 처음으로 알린 하멜이
표류한 곳이 바로 이곳이라고 한다.
네덜란드인 하멜은 1653년 동인도회사 소속 상선을 타고
일본으로 가던 중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이곳 제주도에 도착했다.
용머리 해안 부근에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하멜기념비와 하멜전시관이 세워져 있다.
산방산을 배경으로 바닷가 쪽에서 바라 본 하멜상선의 모습으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1648년에 건조된 전장 36.6m, 폭 7.8m,
갑판높이 11m, 돛대높이 32m의 범선인 바타비아호를 모델로 재현했다.
산방산 앞바다에 위치한 용머리해안은 기암괴석 등으로 이루어져 경관이 빼어나다.
산방산 쪽에서 내려다 보면 그저 평범한 모습에 지나지 않지만,
바닷가로 내려서면 전혀 다른 풍경과 마주치게 된다.
수천만 년 동안 층층이 쌓여 이루어진 사암층 암벽이 바로 그것이다.
오랜 세월동안 파도와 해안절벽이 서로 부딪히면서 만들어놓은 작품이다.
이러한 지층이 해안선을 따라 쭉 이어진다.
하멜기념비. 한, 네덜란드간의 우호 증진과 하멜의 공덕의 증표로,
한국국제문화협회와 주한 네덜란드 대사관에 의해서 1980년 4월에 세워졌다.
산방산 보문사.
대한불교원효종 제주교구 본사(本寺)로 산방산 초입에 자리하고 있다.
대한불교원효종은 1963년 경담(慶潭)이 창종한 불교종단으로,
고승 원효(元曉)를 종조로 삼고 있으며 대승불교, 생활불교를 구현한다.
이곳 옆으로 나 있는 돌계단을 따라 산방산을 올라가면 산방굴사가 나온다.
산방산의 해발 150m 쯤에는 길이 약 10m, 너비와 높이가 약 5m 정도인
산방굴이라는 해식동굴이 바다를 향해 특색있는 경관을 이루고 있다.
영주십경의 하나로, 그 안에 불상을 안치하였기 때문에 산방굴사(山房窟寺)라고도 한다.
굴 내부 천장 암벽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은 산방산의 암벽을 지키는 여신
'산방덕(山房德)'이 흘리는 사랑의 눈물이라는 전설이 있다.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속리산에 위치한 미륵신앙(彌勒信仰)의 요람으로 불리우는 법주사.
먼저 일주문과 수정교를 지나고 나면, 가람에 들어서는 첫 입구라 할 금강문(金剛門)을 만나게 된다.
좌우로는 돌담으로 회랑을 형성하고 있으며, 인왕상을 봉안하기 때문에
인왕문(仁王門)이라고도 부른다.
법주사는 553년 (신라 진흥왕 14)때 의신(義信)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성덕왕 때 중수를 하였는데, 현재 남아 있는 석물(石物)은 모두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중수를 하였으며, 현존하는 목조건물은 모두 조선 후기의 것이다.
이곳 금강문 안에는 1974년에 조성한 금강역사 2위와, 사자를 탄 문수보살,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을 함께 봉안하였다.
대체로 문 양쪽에는 금강저(金剛杵)나 칼과 창을 손에 들고 있는 금강역사가 모셔진다.
그래서 왼쪽에는 밀적금강(蜜跡金剛), 오른쪽에는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을 모시는데,
혹 입을 벌리고 있는 상을 아금강역사, 입을 다물고 있는 상을 우금강역사라 부르기도 한다.
금강문을 지나자 하늘을 향해 뻗은 두 그루의 나무가 시원스럽게 맞아준다.
바로 뒤의 건물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되었으며 사천왕상을 봉안한 사천왕문으로, 국내의 천왕문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고 한다.
지붕 위쪽으로는 바로 뒤에 위치한 팔상전의 꼭대기 층이 넘겨다 보인다.
팔상전. 국보 제55호로 지정되었으며 5층으로 이루어졌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목조탑이며 탑 중에서도 가장 높은 건축물이기도 하다.
지금의 건물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짓고 1968년에 해체, 수리한 것인데,
안쪽 벽면에는 부처의 일생을 8장면으로 구분하여 그린
팔상도(八相圖)가 그려져 있어 팔상전이라 이름 붙였다.
팔상도란,
1. 석가모니가 도솔천에서 내려오는 장면
2. 룸비니 동산에서 마야부인에게서 태어나는 장면
3. 궁궐의 네 문밖으로 나가 세상을 관찰하는 장면
4. 성을 넘어 출가하는 장면
5. 설산에서 고행하는 장면
6. 보리수 아래에서 마귀를 항복시키는 장면
7. 성불 후 녹야원에서 설법하는 장면
8.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하는 장면 등이다.
높이 33m로, 동양 최대 규모의 미륵불 입상인 금동미륵대불(청동미륵대불).
신라 혜공왕 때인 776년, 진표율사가 금동미륵대불을 처음 지었다고 하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 몰수되어 1964년에 시멘트로 다시 불사를 했다.
1990년에는 붕괴직전의 시멘트 대불이 청동대불로 다시 태어났으며,
2000년 들어서는 원래의 제 모습을 찾아 주고자 금동미륵불로 복원공사를 했다.
당시, 3mm 두께로 황금을 입히는데 모두 80kg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대웅보전에서 팔상전에 이르는 앞마당에는 신라시대의 걸작이라 할 쌍사자석등(雙獅子石燈)이 서 있다.
국보 제5호로, 높이 3.3m에 이르는 팔각석등이다.
신라시대의 석등은 대게 하대석과 중대석, 상대석으로 구성되는데,
이 중대석을 두 마리의 사자가 앞발을 높이 치켜들어 상대석을 떠받치는
독특한 양식으로 되어있다.
보물 제915호로 지정된 대웅보전.
창건무렵인 신라 때에는 미륵장륙상을 모신 용화보전이 미륵신앙 도량인
법주사의 중심역할을 했을 것이기 때문에, 대웅보전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지금의 건물은 고려 중기에 처음 세운 것으로 보이며, 1624년(인조 2)에 중건하였고
이후 잦은 중수를 거듭하였지만, 조선 중기의 양식을 잘 갖추고 있어 보물로 지정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벽암대사가 중창한 이후 400년 만인 2005년,
4년간의 공사끝에 옛모습 그대로 복원한 것이다.
대웅보전 앞에 보이는 석탑은 보물 제15호로 지정된 사천왕석등(四天王石燈)으로,
상대석에 사천왕이 새겨져 있어 그렇게 부른다.
두툼한 판석과 커다란 그릇을 머리에 이고 있는 모습의 희견보살상(喜見菩薩像).
우리나라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보살상으로
전체 높이가 2m에 이르며, 보물 제1417호로 지정되었다.
전체적으로 선이 굵고 대담한 기법이 돋보이는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다.
희견보살은 법화경을 공양하기 위해 스스로 몸과 팔을 불태워
소신(燒身)공양을 올렸다는 보살이다.
그러나 이 보살상의 주인공을 석가여래의 으뜸가는 제자였던
가섭존자(迦葉尊者)에 가깝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가섭존자는 석가가 입멸한 후,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열반에 들지말고
세상에 남아, 가사와 발우를 전하라는 석가여래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경설을 바탕으로
이를 형상화 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능인전 옆의 추래암(墜來岩) 암벽에 새겨진, 전체 높이 5m의 마애여래의상(磨崖如來倚像).
고려시대의 마애불상으로서 보물 제216호로 지정되었다.
의상(倚像)이란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마애불로서 이러한 예는 경주 남산의 삼화령 미륵불이 유일한 작품인데,
그 양식상의 특징과 연관지어 미륵불로 추정하고 있다.
오른편으로 높이 솟은 것은 당간지주로, 고려 초인 1006년(목종 7)에 조성되었는데
당시에는 높이가 16m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뒤 조선 후기인 1866년(고종 3)에는 대원군의 명령으로 국가에서
당백전(當百錢)을 주조하면서 사찰의 많은 금속물들이 징발 당했는데,
그 과정에서 당시 용화전의 미륵장륙상과 이 철당간이 사라졌다.
이후, 1910년경에는 22m 높이의 철당간을 확대, 복원하였고, 1972년에 보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청량산 육육봉(六六峰)을 아는 이 나와 백구(白鷗) 백구야 훤사(喧辭)하랴 못 믿을 손 도화(桃花)로다.
도화야 뜨지 마라 어주자(魚舟子)알까 하노라"
☞ 훤사하랴: 야단스러우랴, 떠들어 소문내랴. ☞ 어주자: 배타고 고기잡는 사람, 어부.
말년에 '청량산인'이라는 호를 짓고, 아예 이 곳 산중턱 오산당(吾山堂)에서 지내면서
글을 읽으며 후학을 가르치기도 했던 퇴계 이황.
무릉도원같은 청량산을 아끼는 마음을 그는 그렇게 노래했다.
또한, 청량산을 일러 '입을 벌리고 들어갔다가 입을 다물고 나오는 산'이라고도 한다는데,
수려한 경관에 놀라 입을 벌리고 들어갔다가, 나올 때에는 그 비경이 세상에 알려질까 두려워서
입을 꾹 다물어 버린다고 해서 생긴 말이라고 한다.
청량산은 경북 봉화군 명호면과 재산면, 안동시 도산면과 예안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기암괴석이 장관을 이루어 예로부터 소금강으로 불려진 명산이다.
기록에 따르면 청량산은 고대이래로 '수산(水山)'으로 불려지다가, 조선시대에 와서
금탑봉에 자리 잡은 상청량암(上淸凉庵)과 하청량암(下淸凉庵)이 널리 알려지면서
산 이름이 청량산으로 바뀌었다고 하는데, 그 구체적인 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청량산은 주세붕(周世鵬)이 명명한 12봉우리(일명 6.6봉)가 주축을 이루며, 태백산에서 시원하는
낙동강이 산의 웅장한 절벽을 끼고 유유히 흘러가며, 뫼뿌리마다 많은 신화와 전설을 담고 있다.
청량산에는 청량사 유리보전(琉璃寶殿)과 응진전(應眞殿)을 비롯한 20여개의 절터와
퇴계 이황이 공부한 장소에 후학들이 세운 청량정사 (淸凉精舍),
서성(書聖) 김생이 글씨 공부를 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 김생굴, 대문장가 최치원이 수도한 풍혈대(風穴臺),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와서 쌓았다는 산성 등 많은 유적과 선현들의 자취가 남아 있으며,
자연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1982년 8월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도립공원이라 해봤자 면적이 고작 48.76㎢로서 북한산 국립공원의 절반크기에 지나지 않는다.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에 위치한 청량산의 가파른 길을
잠시 오르다 보면 만나게 되는 청량사(淸凉寺).
중앙에 보이는 건물은 강원으로 이용되고 있는 심검당(尋劍堂)으로,
일반인들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은 수행공간이다.
이 곳 좌측으로는 유리보전과 5층석탑이 위치해 있다.
청량사는 신라 문무왕 3년(663)때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창건당시에는 승당 등 33개의 부속건물을 갖추었던 대사찰로, 봉우리마다 자리잡은
암자에서 흘러 나오는 스님들의 독경소리가 청량산을 가득 메웠다고 한다.
또한 한 때는 신라의 고찰인 연대사(蓮臺寺)와 망선암(望仙庵) 등 크고 작은 26개의
암자가 있어서 당시 신라불교의 요람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시대 불교를 억압하는 주자학자들에 의해 절은 피폐하게 되어,
현재는 청량사와 부속건물인 응진전만이 남아있다.
청량사의 대웅전으로, 약사여래불을 모시고 있는 유리보전(琉璃寶殿),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7호이며, 현판글씨는 공민왕의 친필이다.
이 곳에 모셔진 약사여래불은 특이하게도 종이를 녹여서 만든 지불이라고 한다.
유리보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八作)지붕을 한 다포계(多包系)의 집이다.
공포는 외1출목(外一出目) 내2출목의 형식으로 첨차의 짜임이 고졸(古拙)하고
쇠서의 내부 끝은 연화형(蓮花形) 조각을 새기고 있으며, 전면 중간기둥 위에는 용두(龍頭)와
용미(龍尾)를 주두(柱枓) 밑에 내외로 뻗게 하고 있어 조선 후기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유리보전의 바로 앞쪽에 위치한 5층석탑.
1990년에 세워졌으며, 부처님의 진신사리 5과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보지는 못했지만, 영화 '워낭소리'에서 노부부가 죽은 소의 극락왕생을 비는 장면이
이 곳에서 촬영되었다고 한다.
앞에 보이는 2층의 누각은 범종각으로, 법고, 운판, 목어 등이 모셔져 있다.
그 위쪽으로 5층석탑과 유리보전이 보인다.
전통차를 무료로 제공하며, 여행자의 쉼터 역할을 하는 산꾼의 집.
청량사 동쪽 바로 아래쪽에 자리잡고 있다.
산꾼의 집 옆길을 따라 오르면 나오는 어풍대,
그 위에서 바라 본 청량사의 전경이다.
맨 아래 건물은 사찰내의 전통 다원(茶園)이자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이라 불리워지는 안심당이다.
어풍대(御風臺)에서 바라 본 청량사의 수려한 모습.
연화봉이 좌측으로 높이 솟아있는 가운데, 청량산이 포근히 품고있는 형상이다.
금탑봉(金塔峰)의 중층(中層)에 위치하고 있는 어풍대는
내청량과 외청량을 연결하는 요충지 역할을 하고 있으며,
'청량지(淸凉誌)'의 기록에 따르면, 열어구(列御寇, 고대 중국의 인물)가 바람을 타고
보름동안 놀다가 돌아갔다고 하여 어풍대로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 곳 금탑봉 중층에는 어풍대와 함께 치원대(致遠臺), 풍혈대(風穴臺), 요초대(瑤草臺),
경유대(景遊臺) 등이 나열되어 있으며, 이들 대에서는 기암절벽으로 장관을 이루고 있는
청량산의 연화봉 기슭 한가운데, 연꽃 같은 봉우리와 연꽃 꽃술 자리에 자리잡은 듯한
청량사의 모습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청량산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듯, 규모만으로는 여느 산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산행은 축융봉에서 청량산을 조망하고
청량사를 둘러 보는데서 만족하기로 했다.
언젠가 머지 않은 장래에 또 다시 찾게 될 것으로 믿으며...
■ 청량산의 등반 개념도
청량사만을 들리지 않을 경우, 일반적으로 입석에서 출발하여 오른다.
주세붕이 명명한 '육육봉'과 '12대(臺), 3굴(窟)', 그리고 4정(井)으로 표현되는 바위산인 청량산은
최고봉인 의상봉의 높이가 해발 870.2m이고, 맞은편의 축융봉이 845.2m로
높이가 그다지 높지 않고, 덩치도 크지 않기 때문에 산행코스 또한 단순한 편이라 할 수 있다.
지난 11월초, 지나가는 가을의 뒷 꽁무니라도 잡아 볼 양으로 서둘러 나섰던 봉화 청량산.
언젠가 꼭 한번은 가 보리라 생각하여 마음속에 담아 놓고만 있던 곳이다.
청량사를 찾기 전에 먼저 청량산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다는 축융봉(祝融峰)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산성 입구의 표지판이 정상까지가 2km로 1시간 10분여가 소요됨을 알린다.
언덕길로 처음 한 구비를 돌아들면 바로 최단거리 코스인 산성길이 나오는데,
그 성곽을 따라 오르면서 밟게되는 계단이다.
얼마간 오르다 보면 만나게 되는 밀성대(密城臺).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청량산으로 와서 산성을 쌓고 군사들을 훈련시킬 때,
명령을 어긴 죄인을 절벽 끝에서 밀어 처형했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그 자리에는 세워진지 얼마되지 않아보이는 전망대가 계단이 통제된 채로 서 있다.
산성 또는 계단... 오르는 길은 깨끗하게 정비된 상태라 그 어느 쪽이라도 좋다.
당시 정상부위에서는 산성의 복원작업이 한창이었다.
청량산성은 예로부터 군사적 요새였다.
이 지역은 삼국시대부터 고구려와 신라의 각축장이었고,
천연요새로서의 지형적 요건들을 충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곳의 지세는 산 앞으로는 낙동강이 휘감아 돌아 나가고, 험준한 천인절벽의
바위산으로 이루어져 외부의 침입을 방어하기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산성이 축조된 시기는 산성유지에서 삼국시대로 보이는 일부 유물이 수습된 바 있어
그 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 공민왕이 2차 홍건적의 난을 피해 몽진해 왔을 때
개축되었다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보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산성의 형태는 험준한 지세를 이용해 봉우리와 봉우리를 연결하는 포곡식(包谷式) 산성으로,
흙과 돌을 섞어 성벽을 연결시킨 토석혼축성(土石混築城)의 형태를 띤다.
지금도 산 곳곳에는 산성의 흔적이 역력하며, 장군의 지휘소였던 장대와 건물터,
성문터 등의 유구가 남아 있다.
해발 845.2m의 축융봉 정상에 다다르자, 구름 많은 날씨인데다가
바람길이 트였는지 갑자기 차가운 바람까지 불어와 몸이 저절로 움츠려든다.
우측에 보이는 망원경으로 반대편을 바라보면,
불쑥블쑥 솟아오른 청량산의 여러 암봉과 하늘다리가 잡힐 듯 다가온다.
청량산은 주왕산, 월출산과 함께 한국의 3대 기악으로 불리우며, 12개의 암봉을 가지고 있다.
축융봉도 청량산의 여러 봉우리 중의 하나이기에,
이 곳에서는 맞은편의 나머지 11개의 봉우리가 한 눈에 들어온다.
단풍은 이미 잔해만 남아있는 상태여서 영락없는 초겨울의 풍경 그대로이다.
청량산의 최고봉인 장인봉을 비롯하여 외장인봉, 선학봉, 자란봉, 자소봉,
탁필봉, 연적봉, 연화봉, 향로봉, 경일봉, 금탑봉, 그리고 이 곳 축융봉 등
12봉우리(육육봉)가 연꽃잎처럼 청량사를 둘러싸고 있으며,
봉우리마다 어풍대, 밀성대, 풍형대, 학소대, 금가대, 원효대, 반야대, 만월대, 자비대,
청풍대, 송풍대,의상대 등의 대(臺)가 있다.
산 속에는 신선이 내려와서 바둑을 두었다는 신선대, 선녀가 유희를 즐겼다는 선녀봉,
최치원이 마시고 정신이 맑아졌다는 총명수와 감로수 등의 약수가 있으며,
27개의 사찰과 암자 터가 있다.
원효대사가 창건한 유리보전(내청량사:경북유형문화재 47),
신라시대에 창건한 외청량사(응진전), 최치원의 유적지인 고운대와 독서당,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은신한 오마대(五馬臺)와 공민왕당(恭愍王堂),
공민왕이 쌓았다는 청량산성, 김생이 글씨를 공부하던 김생굴,
퇴계 이황이 수도하며 성리학을 집대성한 오산당(청량정사) 등 역사적 유적지도 많다.
아침의 따뜻한 햇빛을 그대로 받고 있는 응진전,
그리고 아직 채 걷히지 않은 짙은 그림자 속으로 숨죽이듯 몸을 숨기고 있는 청량사가
그 안쪽으로 살며시 들여다 보인다.
각각의 이름을 가진, 편마암으로 이루어진 여러 봉우리가 서로 몸을 기대고 있는 가운데,
좌측으로는 두 개의 봉우리 사이를 이어주는 하늘다리가 길게 걸쳐져 있다.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사람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 쪽도 마찬가지이다.
청량산의 하늘다리는 해발 800m지점의 왼쪽의 선학봉과 오른쪽의 자란봉을 연결하는
길이 90m, 바닥폭 1.2m의 현수교로, 2008년 5월에 완공 되었다. 이는 국내에서
산악지대에 설치된 다리로서는 가장 길고 가장 높아 청량산의 또 다른 명물이 되고 있다.
340kg/㎡의 통과 하중에 최대 100여명이 동시에 지나갈 수 있는 규모로,
올해에는 다리난간 중앙부분의 바닥재를 강화유리판으로 교체하여,
계곡아래를 훤히 내려다 볼 수도 있다.
시간이 지나자 내청량사의 얼굴이 그대로 드러난다.
오른쪽으로는 외청량사인 응진전이 금탑봉의 난간에 아슬하게 걸려있는 형국이다.
암벽이 3개의 층을 이룬 금탑봉은 청량산을 대표하는 봉우리이기도 하지만,
유달리 노란색잎을 가진 생강나무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풍경과 이름에서 공통점이 느껴지기도 한다.
마치 바벨탑을 연상케 하는 모습의 금탑봉...
그 위에 얹혀진 응진전을 지나 왼쪽 절벽으로 굽이 돌게되면,
청량사의 모습이 한 눈에 조망되는 어풍대를 만나게 된다.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호거산(虎踞山)에 위치한 이 운문사(雲門寺)는
신라 진흥왕 21년(서기560년) 초창(初創)되어 대작갑사(大鵲岬寺)라 하였는데,
제1차 중수(重修)는 진평왕 때 원광국사(圓光國師)가,
제2차는 신라말에 보양국사(寶讓國師)가 하였다.
고려 태조는 동왕(同王) 20년(서기937)에 많은 전지(田地)를 내리고
운문선사(雲門禪寺)라 사액(賜額)하면서 운문사(雲門寺)라 불리어 오고 있다.
또한, 고려시대 숙종(서기1105) 때 원응국사(圓應國師)가 3차 중수를 하였으며,
고려 고종(서기1250) 때 일연선사(一然禪師)가 주지(住持)로 주석(住錫)하였다.
그 후 조선시대에 들어와 여러 차례의 중수가 있었고, 1958년에 비구니(比丘尼) 전문학원을
개설한 이래 한국의 대표적인 승가대학(僧伽大學)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보물 제835호로 지정된, 비로전(大雄寶殿, 毘盧殿).
1105년(고려 숙종10년)에 원응국사가 건립하였다고 전하며,
발견된 상량문의 기록으로 보아 1653년(조선 효종4년)에 중창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대웅보전을 짓기 전, 운문사 신앙공간의 중심적 역할을 하였으며,
'대웅보전'이라는 현판을 걸고 있으나 통칭하여 비로전이라고 부른다.
이는 문화재청 등록 당시 '운문사 대웅보전'으로 등재되었기 때문에 옛 현판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앞 쪽에 동과 서로 나란히 서 있는 두 개의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으로,
2단의 기단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인데 규모와 양식이 서로 같다.
기단부분이 많이 손상되어 있던 것을 일제시대 때 일부 보수했으며, 높이는 5.4m로 보물 제678호이다.
이 비로전 내에는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을 모셨으며,
좌측에는 신중탱화, 우측에는 삼장탱화를 봉안하였다.
만세루(萬歲樓).
신라 원광국사가 초창하여 고려의 보양국사가 중창하였으며,
지금의 건물은 1105년 원응국사가 3차 중창할 때의 것이다.
이 건물은 큰 법회시에 대웅전에 들어가지 못한 대중들이
대웅전을 향하여 법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하기위한 것으로,
200여 평의 넓은 공간을 누각으로 조성하였다.
오백전(五百殿).
주불로 석가모니불과 좌보처 제화갈라보살, 우보처 미륵보살과 오백나한상을 모신 전각이다.
나한이란 아라한(阿羅漢)의 줄임말로, 응공(應供)이라고도 하는데,
부처님과 같이 깨달음을 얻어 열반에 이른 사람으로, 인간이 가진 욕망의 사슬과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나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경지에 이른 수행자를 말한다.
운문사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3기의 비석 중 중간에 위치한
보물 제316호인 원응국사비(圓應國師碑).
이 비는 고려 인종 때 건립된 것으로, 운문사의 3대 중창주인 고려 원응국사의
행적이 새겨져 있다. 높이는 230cm이며, 폭은 91cm이다.
다른 두 개의 비는 운문사의 또 다른 중창주인 설송대사비(雪松大師碑)와,
만세루와 대웅전을 중수한 사실을 기념하여 세운 운문사 중수(重修)기념비이다.
말끔한 운문사의 경내에서 북대암을 향해서 바라다 본 모습.
운문사 북쪽으로는 운문산성(일명 지룡산성) 바로 아래에 세워진 북대암이 올려다 보인다.
북대암은 운문산에서 최초로 세워졌으며, 운문사에 소속된 산내암자이다.
천연기념물 제180호로 지정된 운문사의 처진 소나무(盤松)는
주변의 인공적인 압력 없이도 늘어져서 넓게 자라는 나무로 유명하다.
이 소나무는 어느 선사가 이 곳을 지나다가 시들어진 나뭇가지를 꽂아둔 것이
뿌리를 내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해마다 음력 3월 3일인 삼짇날에는 막걸리 12말을 희석하여 영양제로 부어준다.
높이는 약 6m이고, 가슴높이의 줄기 둘레가 2.9m이며, 수령은 450~500년 정도로 추정된다.
고즈넉한 늦은 오후의 햇빛이 머물고 있는 운문사 입구의 소나무 숲길.
소개된 외에도 운문사 경내(境內)에는 다음과 같은 문화재들이 있다.
석등(石燈, 보물 제193호), 사천왕석주(四天王石柱, 보물 제318호), 청동호(靑銅壺, 보물 제193호),
석가여래좌상(釋迦如來坐像, 보물 제317호).
이 중,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의 비석(클릭하셔서 크게 보세요.)은
광해군 4년(1612)에 세운 사명대사의 일대기를 기록한 석장비로써,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이 비문을 지었다.
일제때 일본인 경찰서장이 이 비문의 내용이
민족혼을 불러 일으킬 우려가 있다 하여 네 조각으로 깨뜨린 이후,
1958년에 다시 접합하였다고 한다.
사명대사의 부도와 석장비는 본래 하나의 짝을 이루고 있던 것으로
보물 제1301호이다.
- 해인사의 부속암자로서는 원당암을 비롯하여
홍제암, 용탑선원, 백련암, 지족암, 희랑대, 삼선암, 금선암, 약수암,
국일암, 보현암, 금강굴, 길상암, 고운암, 간월암, 청량사 등이 있다.
홍제암(弘濟庵)은
홍제암(弘濟庵)은 해인사의 서편으로
일주문에서 한 이백미터 남짓 떨어진 곳에 있는 암자이며,
특히 사명대사가 입적한 곳으로 유명하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 이곳에 은거하던 사명대사는
광해군 2년에 속세 나이 예순일곱으로 입적하였는데,
광해군은 스님의 열반을 애도하여
자통홍제존자(慈統弘濟尊者)라는 익호를 내리고
이곳에 스님의 비를 세웠다.
그 뒤로부터 스님의 익호를 따라 이 암자를 홍제암이라 하였다.
사명대사의 비문은
홍길동전으로 더 잘 알려진 석학 허균이 지은 것으로서,
문장도 아주 빼어날 뿐더러 대사의 행장이 비교적 소상하게
적혀 있어 사적으로서의 값어치가 높다.
지금의 홍제암 건물은 최근에 신축한 것이며,
암자 안에는 청허, 사명, 기허대사를 비롯한
뭇 큰스님들의 영정을 모신 영자전이 있다.
그리고 뒷동산에는 평범한 석종의 모습으로 만든
사명대사의 부도가 모셔져 있다.
마침 해인사와는 달리
이곳 홍제암은 찾는 이가 적어 적막감마저 감돌았다.
모양새가 사찰의 이미지라기 보다 마치 고궁에
들어온 것으로 착각할 만큼 깔끔하고 아담하게 느껴진다.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넓은 배추밭이 나왔다.
아마도 이곳 스님들의 겨울을 책임질
중요한 것들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배추밭을 지나니 또 다른 암자가 나온다.
마당에 큰 바윗돌이 박혀 그대로 노출된 것이 인상적이다.
빙산의 일각이랄까.
너무 깊이 박혀있다 보니 미처 제거할 수 없었음에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옛 산수화의
한 부분 같아보여 운치가 느껴진다.
인근에 위치한 또 다른 암자인 용탑선원.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이었던 용성스님을 위하여
창건된 이 암자는 스님의 사리탑을 수호, 관리하기 위하여
1945년에 창건되었으며 용탑전(龍塔殿)이라 불리기도 한다.
사실, 이곳 해인사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다.
이미 모두가 익히 알고있는 곳이다 보니...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256호인 대적광전
대적광전은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모시는 화엄종 사찰의 중심 법당이다.
부처가 설법한 진리가 태양처럼 우주에 가득 비추는 것을 형상화한 비로자나불은
불교의 진리자체를 상징하는 불상이다.
비로자나불을 모신 전각은 대적광전 이외에도 화엄전과 비로전이 있다.
대적광전은 802년(애장왕 3)에 순응,이정 두 스님이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의 명칭은 비로전이었으나, 1488년(성종 19)에 왕실의 지원에 의해
학조대사가 중창하면서 대적광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현재의 건물은 1817년(순조17)에 불타버려 이듬해 중건한 것을 1971년에
지관스님이 다시 중수한 것이다.
큰 절의 중심 불전에 걸맞게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을 한 우람한 모습이다.
정선이 그린 해인사 그림에는 대적광전이 2층으로 그려졌는데,
1817년의 화재 이전에는 지금보다 더 큰 건물이었을 것이다.
지금의 모습은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다포계 팔작집으로서
중수과정에서 많이 변형되었음을 알 수 있다.
법당 안에는 용기사에서 옮겨온 중앙의 큰 비로자나불을 비롯해
법단의 좌에서 우측으로 법기보살, 보현보살, 지장보살, 비로자나불(대),
비로자나불(소), 문수보살, 관세음보살 순으로 일곱분의 불보살님이 봉안되어 있는데
비로자나불과 지장보살이 함께 모셔진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이는 주변지역의 불타버린 법당에 있던 지장보살을 옮겨 놓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4호인 해인사 3층석탑
해인사의 대적광전 아래 서 있는 석탑으로, 넓은 뜰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어
일명 ‘정중탑(庭中塔)’이라고도 불린다.
이 탑은 2중 기단과 3층의 탑신 및 지붕돌로 이루어진 통일신라 후기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이다.
원래 이 탑의 받침은 신라 석탑 양식인 2중이었으나, 1926년에 탑을 수리하면서
받침을 확장하고 한 층을 더 올려, 본래 지니고 있던 조화미를 상당 부분 상실하고 말았다.
4면의 각 모서리에 기중을 새긴 것 외에는 별다른 조각이 없다.
지붕돌받침은 신라 석탑의 전형인 5층으로 되어 있고,
지붕돌 추녀 끝은 살짝 들어올려져 완만하게 처리되었다.
지붕돌의 각 모서리에는 작은 종이 달려있는데, 본래의 것은 없어지고
나중에 다시 매단 것이다.
탑의 꼭대기 역시 일부가 소실되어 꼭대기를 떠받치는 받침대와
위로 핀 연꽃, 바퀴만 남아있다.
1926년 6월에 이 탑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상층 받침의 돌 함 속에서 9개의
작은 불상이 발견되었는데, 석탑을 수리하고 나서 이들 불상을 다시 탑 안에 봉안하였다.
또 이 석탑 앞에는 코끼리의 눈모양을 형상화했다는 안상과 연꽃무늬가 조각된
배례석이 있었으나 수리하는 과정에서 석등 앞으로 옮겨졌다.
[조선불교통사] 에는 태조가 즉위하여 이 탑을 수리할 때, 대장경을 탑 안에 봉안하면서
나라의 번영과 백성의 평안을 빌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그러나 1926년에 탑을 수리할때 대장경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태조가 수리한 탑이
이 탑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더욱이 근래의 사찰 보수 때 경학원 근처에서 신라 석탑의 재료가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또 다른 석탑이 있었을 가능성도 크다고 하겠다.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5호인 해인사 석등
석등은 부처님이 계신 사찰에 어둠을 밝히기 위해 만든 것이다.
부처님에 대한 등 공양과 관계된 것이므로 부처님을 상징하는 탑과 함께 법당 앞에 설치된다.
이 석등 역시 원래 석탑 앞에 있었지만 현재 위치로 옮겨놓았다.
옮겨진 이유와 시기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없다.
석등은 받침돌과 기둥돌, 등불을 놓는 화사석, 지붕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둥돌이 원래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전체의 크기는 알 수 없다.
맨아래 네모난 받침대에는 코끼리 눈 모양의 무늬를 새겨 넣었으며,
8각형의 아래 위 받침대에는 8장의 연꽃잎을 각각 따고 하늘을 향하도록 새겨넣었다.
화사석에는 4개의 창을 두었는데, 창 사이의 모서리 4면에 각각 사천왕상을
돋을새김한 것이 이채롭다.
지붕돌은 역시 8각으로 처리하여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었으며 맨 위에는 둥근 구슬을 올렸다.
새겨진 눈 모양과 연꽃무늬의 우아한 조각수법, 그리고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볼 수 있다.
한편 1398년 조선 태조 7년에 강화 선원사에 있던 팔만대장경을 지천사로 옮겼다가
이듬해 이곳으로 옮겨왔다.
팔만대장경판전은 1995년 12월에 세계문화 유산으로 공식지정되었다.
경내에는 일주문, 대적광전,구광루 등 문화재 및 암자들이 즐비하여
찾는 이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다.
붉게 물든 덩굴은 담장을 휘감고,
하늘은 마냥 높기만 하다.
대적광전의 화려한 단청.
섬세한 인간의 손길이 이루어 놓은,
획 하나마다에 가득 담긴 불심...
고려팔만대장경판이 보존되어 있는
대장경판전의 입구.
장경판전은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경이나 그것을 인쇄하기 위한 목판을 보존하고 있는 전각으로
사찰에 따라 대장전 혹은 판전, 법보전 등으로 불리운다.
합천 해인사의 장경판전에는 세계의 문화유산인 고려 팔만대장경이 모셔져 있다.
해인사는 신라 창건 이래 조선 말기까지 여러차례에 걸쳐 화재를 입고 중건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천만다행히도 고려의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던 대장경판전(국보 제52호)은
조선 초기 개수를 한 그대로 보존이 되어있어 국보 가운데의 국보인
고려팔만대장경판(국보 제32호)이 함께 온전하게 보존,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
▶ 합천 학사대(學士臺) 전나무, 경상남도 기념물 제 215호이다.
이 전나무는 높이 약30m, 둘레 5.1m 쯤 되는 수령이 1,000년 이상 된 고목이다.
나무의 줄기가 지상 10m 높이에서 두 개로 벌어져 있으며, 나뭇가지가 아래로 향해 뻗어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곳은 고운 최치원 선생이 만년에 벼슬을 버리고
가야산에 은거할 때 찾았던 곳이다.
학사대라는 이름은 고운 선생이 헌강왕때 29세의 나이로 한림학사 벼슬을 하였는데
그 벼슬 이름을 따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고운 최치원 선생은 말년에 제자들 앞에서 이 곳에 지팡이를 꽂으며
"내가 살아 있다면 이 지팡이도 또한 살아 있을 것이니 학문에 열중하라" 는 유언을 남기고
지금의 홍제암 뒤 진대밭골로 유유히 홀로 들어가신 전설로 유명하다.
그래서 이 전나무를 일러 고운 선생의 "지팡이 나무"라고 불리운다.
가을이 찾아온 산사.
지난달, 청도군 화양읍 송금리의 동학산 기슭,
청도의 와인터널에 들렀다가 바로 그 위쪽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대적사를 찾았었다.
감의 고장답게 이곳에도 주위가 온통 감나무 일색이다.
나뭇잎은 감과 함께 서로 같은 색깔로 익어가고...
단출한 극락전.
절 전체가 아주 아담하다.
안내문에 적힌 이곳 대적사에 관한 내용을 옮겨본다.
대적사는 신라 헌강왕 2년(876년) 보조선사(804~880)가
토굴로 창건하였으며 고려초기 보양(寶壤)이 중창하였다.
임진왜란때 폐허가 된 사찰을
1635년경 초옥3칸 암사를 짓고 대적사(大寂寺)라 하였으며,
1689년(숙종15년) 성해대사(成海大師)가 중수하여
삼존불을 모시고 다시 사찰의 면모를 갖추었다.
경내 건축물중 18세기경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공포를 갖춘 맞배지붕의 5량 가구로
고주(高柱)없이 대량과 종량을 걸고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앞뒤는 대량에 가운데는 종량에 대어 층이진
특이한 구성을 하고 있으며
1984년 부터 보물 제836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기단의 조각은 용, 거북, 게 등과 전면 기둥의 용머리 조각 등
연화문(蓮華紋)과 거북무늬가 양각되어 있고
H자 형의 선각(線刻)과 기단 측면에
용비어천도(龍飛御天圖)가 새겨져 있는
장식 등은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으로
건축 의장 연구에 중요한 자료들이다.
주요 전각으로는 극락전 외에 삼성각(三聖閣)과 산신각이 있다.
기단에 양각으로 새겨진 거북과 게의 모습.
자그마한 것이 앙증스럽게 보인다.
불전의 천장과 문살 또는 기둥과 벽에 장식되어 있는 물고기,
그리고 풍경의 물고기 장식과 목어 등...
물고기는 흔히들 사찰에서 볼 수 있다.
혹자는 이 물고기가 항상 눈을 뜨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해,
항상 깨어서 부지런히 도를 닦으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게의 등장은 조금 생뚱맞은 느낌이다.
게는 옆으로 기어가는... 그러면 혹시
샛길로 빠지는 것을 스스로 경계하라는 의미?
계단쪽에는 귀여운(?) 용의 모습도 보인다.
구름문양이 함께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하늘을 날고 있는 모습일 듯.
경북 포항시 오천읍(烏川邑) 운제산(雲梯山) 동쪽 기슭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인 오어사(吾魚寺).
신라 진평왕(眞平王)때 창건하였고 혜공(惠空) ·원효(元曉) ·자장(慈藏) ·
의상(義湘) 등의 승려가 기거했던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
사찰로서는 그리 큰 규모는 아니지만 바로 옆에 오어지라는
호수를 끼고 있어서 인지다른 곳과는 달리 독특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또한 뒤쪽으로는 운제산이 버티고 서 있어 풍광이 수려하다.
경내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대웅전.
본래의 이름은 항사사(恒沙寺)인 이 절이 오어사로 바뀌어진 데는
혜공과 원효스님에 대한 설화로 전해진다.
Ⅰ. 옛날 오어사에서 원효대사와 혜공대사가 수도하고 있었다.
하루는 둘이서 계곡 상류에서 놀다가 문득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서로 법력을
시험하여 보고자 하여, 고기를 낚아 다시 살리는 재주를 겨루었다.
그런데 둘의 실력이 막상막하여서 좀체 승부가 나지 않다가 마지막
한 마리를 놓고 서로 자기가 살린 고기라고 주장하였다고 한 데서
나 오(吾)와 고기 어(魚)자를 써서 오어사(吾魚寺)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고기를 놓아준 곳이 지금 오어사 앞에 있는 오어지(吾魚池)라고 한다.
이 이야기는 일연 스님이 지은 『삼국유사』에 나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