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의 식민역사가 시작된 뼈 아픈 곳에 세워진 혈맹기념비(Blood Compact marker).
국왕 대신의 자격으로 온 스페인 초대 총독인 미구엘 로페즈 드
레가스피(Miguel lopez de Legazipi) 장군과 시카투나(Datu Sikatuna)
보홀 족장이 1565년 평화우호협정을 맺게 된다.
이 협정은 동양인과 서양인 사이에 이루어진 최초의 국제조약으로,
필리핀의 전통에 따라 와인에 자신의 피를 섞어 마셨다고 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이 바로 이 혈맹기념비이다.
레가스피 장군은 지금의 멕시코인 누에바에스파냐에서 지방 정부의
서기관으로 근무하다가 필리핀에 대한 스페인의 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5척의 선박을 이끌고 멕시코의 아카풀코를 출발해 필리핀 남부의
세부에 도착한 후, 1566년 최초의 스페인 정착지를 건설한 인물이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영령들이 안장되어 있는
국립서울현충원은 한강과 과천 사이 넓은 벌판에 우뚝 솟은
관악산 공작봉의 기슭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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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국군묘지로 창설, 전사 또는 순직군인과 군무원 및 종군자의 영현을 안장.
1965년/ 국립묘지로 승격, 국가원수, 애국지사, 순국선열을 비롯하여 국가유공자,
경찰관, 전투에 참가한 향토예비군 등이 추가.
1996년/ '국립묘지관리소'라는 명칭을 '국립현충원'으로 변경,
2006년/ 국립서울현충원으로 명칭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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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된 안장으로 이곳이 만장되자 1979년 국립대전현충원을
창설하여 그곳에 안장하고 있다.
그 뒤로 꽃시계와 현충문, 그리고 현충탑.
국립서울현충원은 전체면적이 143만㎡에 이르며
경내에는 현충관을 비롯하여 무용용사탑, 전쟁기념관, 충렬대 등이 있다.
이곳은 국가원수묘역, 애국지사 묘역, 국가유공자 묘역,
군인·군무원 묘역, 경찰관 묘역, 일반 묘역, 외국인 묘역 등으로
구분, 조성되어 있다.
봄은 가까이 왔건만, 수 많은 영혼들은 차가운 이 땅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
누구에게는 귀한 아들, 또 그 누구에게는 든든한 남편이자 어버이였을 이들...
오로지 이 나라 하나만을 위해 기꺼이 몸을 내던진 그들의 숭고한 정신에
자못 숙연해진다.
여러개의 상징탑 중의 하나... 경찰충혼탑.
이승만 초대 대통령 기념비.
잠시 국가원수묘역을 돌아본다.
이곳에는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하여 박정희, 김대중 대통령의 묘소가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65년 7월 19일 하와이에서 서거, 7월 27일
가족장으로 이곳에 안장되었다.
영부인 프렌체스카 여사는 1992년 3월 19일 서거하여 3월 23일
가족장으로 이곳에 합장되었다.
묘역 한 쪽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국장시에 사용되었던 영구차가 보존되어 있다.
당시 외부에 장식했던 국화는 제거하고 대신 그 자리에는
장기보존할 수 있도록 유화 그림으로 그려 놓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9년 10월 26일 총탄에 서거하여 11월 3일
국장으로 이곳에 안장되었다.
영부인 육영수 여사는 1974년 8.15 광복절 기념행사 도중
흉탄에 서거하여 8월 19일 국민장으로 안장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9년 8월 18일 서거하여 8월 23일
국장으로 이곳에 안장되었다.
잠시, 큰 족적을 남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간 이 나라의 큰 어른들만을
뵙고 나오기는 하였지만, 사실 이곳의 주인은 이분들 만은 아닐 것이다.
어찌보면 이분들 뒤에는 특별한 댓가와 명예도 없이, 오직 이 나라의
밝은 미래만을 염원하며 한 줌 흙으로 사라져간 이름모를 병사들도 있지 않은가.
그들을 비롯하여, 가치있는 삶을 살다 간 이곳 모든 분들의 값진 희생에
고개를 숙이는 바이다.
청사 앞마당에 세워진 초대 주지사의 동상.
주지사는 괌 주민들 가운데서 선출되며, 괌 주민들은 미국의 준시민권을
갖고 있지만 미국 대통령 선거권은 없다.
이곳은 괌 주지사의 관저 및 괌 정부의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는 곳으로
아델럽 콤플렉스(Adelupe Complex) 또는 아델럽 포인트(Adelupe Point)로
불리워지기도 한다.
전통 차모로족의 건축 양식과 스페인 양식이 혼합된 괌 정부종합청사 건물은
1952년에 건축을 시작해 2년 후에야 완공되었으며
태풍 '파멜라'로 일부가 파손된 이후 개축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더위를 피하기 위해 통풍이 잘 되도록 지어져서
복도에 서 있기만 해도 시원한 바람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청사 뒤편 언덕위에는 스페인 통치 이전과 이후 시대, 그리고
19세기 괌의 모습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된 괌 박물관이
위치하고 있으며, 아가나 만을 비롯해 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이곳 아가나의 서쪽 끝에 위치한 아델럽 포인트는
현재 괌의 정부 기관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또한 이곳은 일본이 통치했던 시기에 바위 절벽 속에 요새를 만들어
각종 무기로 중무장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차모로족 전통 가옥의 하부에 사용되었다는 산호석인
라테스톤(Latte Stone)의 형상을 박물관 외관에 접목시켜 놓았다.
이 돌은 기둥 모양으로 지주 역할을 하는 '할라기'와 그 위에
받쳐져 있는 '타사'로 이루어져 있는데, 기원전 약500년경
고대 차모로족은 라테석으로 알려져 있는 이러한 모양의
돌 기둥 위에 집을 짓고 살았다고 전한다.
망망대해... 드넓은 바다를 배경으로 라테스톤 한 기가 우뚝 서 있다.
마치 망부석 마냥 쓸쓸해 보인다.
박물관 우측편에서 조망해 본 바다.
괌의 해변은 산호로 둘러쌓여 있어서 파도도 일치감치 저 멀리로 물러나 있다.
패러세일링을 즐기는 모습이 여유롭다.
어떠한 연유로 세워진지는 모르겠지만, 군부대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이는
휘장이 들어간 기념비 하나가 한켠에 다소곳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또 그 아랫쪽으로는 스페인 식민지 시절,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대포 2문이 바닷쪽을 향해 놓여있다.
괌 정부종합청사는 관공서이긴 하지만 청사 주변에 푸른바다, 코코넛 나무,
해변 등이 어우러져 있어 마치 공원과 같은 느낌을 준다.
또한 청사 뒷편 괌박물관 건물에는 하얀색의 벽과 계단이 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해외 CF(오란씨)를 찍었던 장소로도 알려져 있다.
산방산(山房山)은 조면암질 안산암으로 구성된 높이 395m의
거대한 종모양의 종상(鐘狀) 화산체로서, 둘레는 3,780m, 면적은 988,332㎡이다.
산방은 산 속의 굴을 뜻하며 산방산 남쪽 측면에 해식동인 굴이 있어
산방산이라 하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옛날 한 사냥꾼이 한라산으로 사슴사냥을 나갔는데, 그날따라 사슴이
한 마리도 얼씬거리지 않아 결국 정상까지 오르게 되었다.
이리저리 찾아 헤맨 끝에 드디어 사슴 한 마리를 발견하고는 급히 활을 치켜들었는데
그만 잘못하여 활끝으로 옥황상제의 엉덩이를 건들고 말았다.
이에 화가 난 옥황상제는 한라산 봉우리를 뽑아 서쪽으로 내던져 버렸는데
그것이 날아와 박힌 곳이 이곳 산방산이고, 그 패인 자리는 백록담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뒷받침이라도 하듯 실제로 산방산은
백록담에 쏙 들어 앉을 만한 크기와 형세를 하고 있다 한다.
산방산 아래에 위치한 용머리는 이곳의 지형이 마치 용이 머리를 쳐들고
바다로 뛰어 들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듯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여기에도 전설이 있다.
중국 진나라 시황제는 중국을 통일한 후 자신에게 맞설
누군가가 나타나게 될까봐 전전긍긍하였다.
그러던 중 탐라섬에 제왕이 태어날 기세를 지닌 터가 있다는 말을 듣게 되자,
풍수에 능한 호종단에게 그 곳에 가 혈맥을 끊어버릴 것을 명했다.
이에 호종단이 이곳 산방산에 도착하여 태평양으로 나가려고 용머리가
꿈틀대는 형세를 목격하고는 용의 꼬리와 잔등을 끊어버렸다.
그러자 시뻘건 피가 솟아오르며 주변을 물들였고
산방산은 괴로운 울음을 며칠 동안이나 토해냈다고 한다.
'하멜표류기'로 우리나라를 유럽에 처음으로 알린 하멜이
표류한 곳이 바로 이곳이라고 한다.
네덜란드인 하멜은 1653년 동인도회사 소속 상선을 타고
일본으로 가던 중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이곳 제주도에 도착했다.
용머리 해안 부근에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하멜기념비와 하멜전시관이 세워져 있다.
산방산을 배경으로 바닷가 쪽에서 바라 본 하멜상선의 모습으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1648년에 건조된 전장 36.6m, 폭 7.8m,
갑판높이 11m, 돛대높이 32m의 범선인 바타비아호를 모델로 재현했다.
산방산 앞바다에 위치한 용머리해안은 기암괴석 등으로 이루어져 경관이 빼어나다.
산방산 쪽에서 내려다 보면 그저 평범한 모습에 지나지 않지만,
바닷가로 내려서면 전혀 다른 풍경과 마주치게 된다.
수천만 년 동안 층층이 쌓여 이루어진 사암층 암벽이 바로 그것이다.
오랜 세월동안 파도와 해안절벽이 서로 부딪히면서 만들어놓은 작품이다.
이러한 지층이 해안선을 따라 쭉 이어진다.
하멜기념비. 한, 네덜란드간의 우호 증진과 하멜의 공덕의 증표로,
한국국제문화협회와 주한 네덜란드 대사관에 의해서 1980년 4월에 세워졌다.
산방산 보문사.
대한불교원효종 제주교구 본사(本寺)로 산방산 초입에 자리하고 있다.
대한불교원효종은 1963년 경담(慶潭)이 창종한 불교종단으로,
고승 원효(元曉)를 종조로 삼고 있으며 대승불교, 생활불교를 구현한다.
이곳 옆으로 나 있는 돌계단을 따라 산방산을 올라가면 산방굴사가 나온다.
산방산의 해발 150m 쯤에는 길이 약 10m, 너비와 높이가 약 5m 정도인
산방굴이라는 해식동굴이 바다를 향해 특색있는 경관을 이루고 있다.
영주십경의 하나로, 그 안에 불상을 안치하였기 때문에 산방굴사(山房窟寺)라고도 한다.
굴 내부 천장 암벽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은 산방산의 암벽을 지키는 여신
'산방덕(山房德)'이 흘리는 사랑의 눈물이라는 전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