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59호인 삼릉계곡 선각여래좌상(線刻如來坐像).
삼릉계석불좌상을 지나 조금만 올라가면 만날 수 있다.
이 불상은 높이 10m 가량 되는 바위면에 새겨져 있다.
바위면의 중간쯤에 가로로 갈라진 홈이 파여 있는데, 위쪽에 불상을
조각하였으며, 연꽃대좌의 아랫단은 홈 아래에 걸쳐 있다.
얼굴 부분은 돋을새김을 하고 몸은 얕은 돋을새김인데, 나머지는
선으로 표현한 독특한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다.
얼굴은 큼지막하고 넓적하게 표현하고 민머리 위에 상투 모양을
크게 새겼는데 머리와 구분이 없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쳤으며 양손의 손목까지 덮고 있다.
왼손은 엄지와 셋째 손가락을 붙여 무릎 위에 얹고 오른손은 가슴 앞에 들어
엄지와 셋째 손가락을 붙이고 손바닥이 아래로 향하도록 하여
왼손과 오른손이 마주하게 하였다.
바위 속에서 얼굴만 내민 듯한 점이 특이하며,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상선암 바로 위쪽에 위치한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磨崖釋迦如來坐像).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58호이다.
이 불상은 남산의 북쪽 금오봉(金鰲峰)에서 북서쪽으로 뻗어 내리다가
작은 봉우리를 형성한 바둑바위의 남쪽 중턱에 위치해 있다.
자연 암반을 파내어 광배(光背)로 삼았는데 깎아내다가 그만둔 듯 거칠다.
높이 7m로 냉골(三陵溪)에서는 가장 큰 불상이고 남산의 북봉인
금오봉을 향하여 앉아 있다.
이 불상의 머리는 거의 입체불에 가깝고, 그 아래는 선으로만 조각되어 있다.
풍만한 얼굴에 눈썹은 둥글고, 눈은 반쯤 뜨고 입은 굳게 다물었다.
민머리에 턱은 주름이 지고 귀는 어깨까지 큼직하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져 있으며, 가슴 부분의 벌어진 옷 사이로 속옷의 매듭이 보인다.
오른손은 엄지와 둘째, 셋째 손가락을 굽혀 가슴에 올렸고 왼손은 무릎에 얹었다.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양 다리의 발 표현과 연꽃대좌가 아주 특이하다.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능선 안부에서 왼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신들이
바둑을 두었다는 바둑바위가 나온다.
그곳은 전망이 좋아 경주시내가 한눈에 조망된다.
포석정, 첨성대, 황룡사지, 천마총, 대릉원, 분황사 등...
갔던 길을 되돌아와 안부의 오른쪽으로 발걸음을 계속한다.
산행의 출발점인 삼릉과 주차장이 보이고...
이미 지나온 조그마한 암자인 상선암도 내려다보인다.
물론, 마애석가여래좌상도 예외는 아니다.
아랫쪽에서 바라본 것과는 달리 주위의 풍경과
어울리니 더 장엄한 느낌이다.
남산에는 고위봉(高位峰, 494m)과 금오봉(金鰲峰, 468m)의
두 봉우리가 솟아 있는데, 이 봉우리에서 흘러내리는 40여 계곡과
산, 밭들을 모두 합쳐서 남산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곳 금오산 정상은 주위가 나무로 가려져 있어 특별한 조망은 없다.
▶ 남산(南山)과 또 다른 산 망산(望山, 망성산)의 유래
옛날 경주의 이름은 '서라벌(徐羅伐)' 또는 '새벌'이라 했으며 새벌은 동이 터서
솟아오른 햇님이 가장 먼저 비춰주는 광명에 찬 땅이라는 뜻으로 아침 햇님이
새벌을 비추고 따스한 햇살에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변화가 아름답고
온갖 곡식과 열매가 풍성하여 언제나 복된 웃음으로 가득 찬 평화로운 땅이었다.
이 평화로운 땅에 어느날 두 신이 찾아왔다.
한 신은 검붉은 얼굴에 강한 근육이 울퉁불퉁한 남신(男神)이었고, 또 한 사람은
갸름한 얼굴에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 예쁜 웃음이 아름다운 여신(女神)이었다.
두 신은 아름다운 새벌을 둘러보고 "야! 우리가 살 땅은 바로 이곳이구나!"하고 외쳤고,
이 소리는 너무나 우렁차 새벌의 들판을 진동하였다.
이때 개울가에서 빨래하던 처녀가 놀라 소리나는 곳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산 같이 큰 두 남녀가 자기 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아닌가?
처녀는 겁에 질려 "산 봐라!"하고 소리 지르고는 정신을 잃었다.
"산 같이 큰 사람 봐라!"라고 해야 할 말을 급한 나머지 "산 봐라!"라고 외쳤던 것이다.
갑자기 발 아래에서 들려오는 외마디 소리에 두 신도 깜짝 놀라 그 자리에
발을 멈췄는데 그만 웬일인지 다시는 발을 옮길 수 없었다.
두 신은 그 자리에 굳어 움직일 수 없는 산이 되었는데 소원대로 이곳 아름답고
기름진 새벌에서 영원히 살게 된 것이다.
남신은 기암괴석이 울퉁불퉁하고 강하게 생긴 남산(南山)이 되었고, 여신은 서쪽에
솟아있는 부드럽고 포근한 망산(望山)이 되었다고 전해져 온다. (참고문헌/ 경주시지)
금오산 정상을 내려서니 제법 넓은 신작로길이 나타난다.
그 길을 따라 잠시 내려오다가 용장사지 방향인 오른쪽으로 접어들고,
얼마못가 보물 제186호인 경주 남산 용장사곡 삼층석탑과 마주치게 된다.
경사면 위에 세워져 있어 조망이 시원하다.
용장사(茸長寺)의 법당터보다 높은 곳에 세워진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자연 암반을 다듬어 아랫기단으로 삼고, 그 위에
면마다 기둥새김 셋이 있는 윗기단을 설치하여 산 전체를
기단으로 여기도록 고안되었다.
층마다 몸체돌 하나에 지붕돌 하나씩 3층으로 쌓았는데, 지붕돌과 몸돌을
별도의 석재로 조성하였다.
이 일대에서 가장 높은 산은 청도읍의 남서쪽으로 솟은 화악산(937.5m)으로
남산은 화악산의 북쪽 같은 능선에서 솟은 태백산맥 지맥 중 한 봉우리이다.
청도읍, 화양읍, 각남면에 걸쳐 있는 이 산의 북쪽에는 신둔사가 있고
동쪽에는 적천사, 그리고 정상 북쪽으로는 비구니 사찰인 죽림사가 위치해 있다.
청도 남산의 정상석.
보통 남산이라고 하면 서울, 경주, 그리고 개성의 남산을
떠올리게 되는데, 우연인지는 몰라도 이 세 곳 모두
각각 조선, 신라, 고려의 수도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곳 청도도 예외는 아니어서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도
기록되어 있듯 이서국(伊西國)의 옛 수도였다.
산 너머로 내려다 보이는 청도IC.
이곳 남산은 시원한 낙대폭포(약수폭포)의 폭포수와 함께
맑은 물을 자랑하는 남산골 계곡으로 인해 특히 여름에는
많은 사람들로 분주하다.
찾아온 가을을 증명이라도 하듯
정상부 능선에는 이미 단풍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번잡한 도시를 떠나 산 속 깊은 곳으로 도피한 듯한 신둔사(薪芚寺).
세상을 등지고 숨은 듯, 그대로 자연이 되었다.
산 너머 오른쪽으로는 한재 미나리로 유명한 상리지역이다.
미나리는 겨울의 끝자락인 2월에 생으로 먹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채소로,
12월에 비닐하우스에서 키우기 시작하여 2월 초부터 5월 말까지
상춘객의 입맛을 사로잡게 된다.
산길을 내려서면서 포장도로가 시작되는 곳에는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인 신둔사가 자리잡고 있다.
앞쪽으로 보이는 청풍루(淸風樓)는 큰 법회시 강당으로 사용되며
1988년에 신축되었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맞배지붕으로
조선시대에 중건되었다.
남산 중턱에 자리잡은 신둔사는 1173년(고려 명종3년)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창건하여 봉림사(鳳林寺)라 하였는데, 1667년(조선 현종8년) 상견대사가 중창하고
1878년(조선 고종15년)에 다시 중수하여 신둔사라 개칭하였다.
이곳 범종소리는 절에서 대중을 모으기 위해서나 때를 알리고, 욕계(欲界)의
6천(天)과 색계(色界)의 18천, 그리고 무색계의 4천을 합하여 28천의 모든
하늘나라 대중이 들으라는 뜻으로 울리며, 이서고국(伊西古國)때 왕과 왕족들이
신라군을 피해 은둔하였다는 은왕봉(隱王峰)의 정령을 위로하기도 한다.
주요 전각으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삼성각(三聖閣)과 청풍루, 종각이 있다.
왼쪽 삼성각과 범종각 사이의 오층석탑은 1924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영산보탑이라고도 한다.
전체적으로는 아주 아담한 규모의 절이다.
하노이를 빠져나와 하롱베이로 가는 길 양편으로는
넓은 들판이 길게 펼쳐진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들판 너머로 범상치 않은
형상을 한 산들이 시야에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넓다란 강을 지나고...
크고 작은 산들도 스쳐 지나가며...
끝없이 펼쳐진 저 들판 구석구석마다 일일이 사람의 손길이
닿았다고 생각하니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렇다고 기계화가 되어 있는 것도 아닐테니...
베트남은 지역 특성상 고도차가 크지않은 관계로
물이 잘 빠지지 않아 대부분 논으로 쓸 수 밖에 없다고 한다.
하노이를 기점으로 남부는 1년에 3모작 까지도
가능하고 북부지역은 2모작을 한다고 하니 잠시도
손을 놀릴 시간이 없을 듯 하다.
서구 스타일의 종교적인 건물도 심심찮게 지나간다.
베트남에서 제일 많이 믿는 종교는 불교가 압도적으로 많고,
로마 가톨릭, 개신교 등이 그 뒤를 잇고 있다.
과거에는 종교의 자유가 없었지만 그 이전부터 중국, 인도의
영향을 받은 불교를 가장 많이 믿어왔기 때문에 불교나
유교만은 탄압하지 못했다고 한다.
현재는 제한적인 종교활동은 허용되고 있으나 집회는
사전에 신고를 해야하며 선교는 아예 불법으로 되어 있다.
차를 타고 달리다 보면 농경지나 빈터에 설치된 공동 납골당이 자주 눈에 들어온다.
베트남에서는 1년 벌어 제사 지내고 20년 모아 장가가고, 평생모아 장례를
치룬다고 할 정도로 장례식은 아주 성대하게 치른다고 한다.
문묘는 베트남이 공산국가인 관계로 개인소유가 허용되지 않으므로
장기임대(50~100년)한 자신의 논밭에 봉분묘가 아닌 석관묘의 형태로
하며. 이후 3년이 지나면 파묘하여 화장 후 납골묘로 옮긴다고 한다.
어느 마을의 강변을 지나면서 특이한 모양을 한 대나무로 만든
구조물이 눈에 들어온다.
이미 스쳐 지나가버렸지만, 윗부분에 그물을 달아 놓은 것도
보이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물고기를 잡는 용도로 보인다.
자신의 앞길을 예측하지 못한 채, 어디론가로 매달려 가는
오리의 무리도 포착되었다.
그냥 보기로는 온통 세상구경에 정신이 팔려있는 듯하다.
얼마나 달렸을까, 어느새 해거름이 몰려오고...
차창 밖으로 눈을 돌리니 어스름 속에 비친
주위의 실루엣이 예사롭지가 않다.
아마도 목적지에 가까웠나 보다.
하노이에서 땀꼭이 있는 닌빈(Ninh Binh)까지는 2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닌빈은 하노이 남쪽 93km지점에 위치한 닌빈성의 성도로 10세기(968년)
베트남 봉건왕족의 도읍지였다고 한다.
강둑 위에 오르니 넓다란 강 위로 작은 배들이 띄워져 있다.
'삼판(Sampan)'이라 불리우는 양철과 대나무로 만든 쪽배로,
별다른 시설물도 없는 이곳 나루터에서 투어가 시작된다.
호아루 지역 앞을 흐르는 오동강.
그 강을 따라 노를 저어 나아간다.
보기에는 수심이 깊어 보이지만, 무릎까지 차오를까...
아주 얕으마한 강이다.
전통 모자인 논(Non)을 쓴 여자 뱃사공이 열심히 노를 저어 나간다.
베트남 여성들은 생활력이 강하다고 한다.
그러나 노를 젓는 일만큼은 결코 쉬워 보이지가 않는다.
갈대도 아닌 것이 물 속에 뿌리를 박고 초원마냥 넓게 자라나 있다.
그냥 보기에는 강이 아니라 늪지와 같은 풍경이다.
석회암으로 구성된 카르스트 지형으로 인해
물 위로 산들이 솟아오른 형상이다.
물론, 오랜 세월의 흔적일 터...
한동안 노를 젓더니 어느 동굴앞에 도착한다.
이곳은 반환점으로, 깊지않은 그 동굴속으로 들어간다.
'땀꼭'이란 한자로 표현하면 삼곡(三谷)이 되는데, 말 그대로
'세 개의 동굴'이라는 뜻이다.
'항까', '항하이', '항바'라는 동굴이 그것으로, 쪽배를 타고 가며
그 동굴과 만나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세 개의 동굴을 두루 관통하는 다른 멋진
코스와는 달리 달랑 이 하나의 동굴만 보고 되돌아 나온다.
그냥 대충의 분위기만 느껴보는 것이다.
따라서 다소 밋밋하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어쨌든 동굴 안에서 내다본 모습이다.
잠시 그 그늘 속에서 한숨을 돌려본다.
되돌아 나가는 길... 올 때와는 또 다른 풍경이다.
높이가 그다지 높지 않은 탓인지
곳곳에 솟은 기암괴석의 산들은 오히려 소박한 느낌이다.
갑자기 뱃사공이 손가락을 들어 산 위를 가리킨다.
가만히 보니 커다란 거북이 한 마리가 절벽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물론 바위일 뿐, 실제 거북은 아니다.
따가운 햇볕을 뚫고 강 위를 미끄러지듯 내달린다.
하늘에는 하얀 구름이 모양을 바꾸어가며 떠다니고...
하롱베이가 넓은 바다와 많은 배들로 동적인 곳이라면,
이곳은 그야말로 너무나도 여유로운 분위기다.
규모도 작지만 동력을 이용하지 않은 쪽배로 다니기 때문에
내내 작은 풀벌레 소리와 노젓는 소리만이 귀를 간지럽힌다.
그러나 기대감이 너무 컸던 탓일까, 적어도 이곳 풍경만큼은
그다지 큰 감흥이 없다.
그저 호흡을 가다듬고 잠시 쉬어가는 장소라고나 할까.
용경협은 북경시 연경현에 소재하고 있으며, 베이징에서 85km정도 떨어져 있다.
1973년 10월에 계곡을 막아 댐을 건설하면서 생긴 인공호수로,
여름에는 북경지역 최고의 피서지로 꼽힌다.
매년 1월부터 2월 말까지 이곳에서는 빙등 예술축제 행사가 열리며,
얼음조각 국제경연대회가 개최되기도 한다.
댐 오른쪽에는 몸부림치는 용의 형상을 한 터널이 있다.
내부에는 몇 대의 에스컬레이터로 이어져 있는데, 길이는 258m에 이른다.
1996년 유람선이 있는 댐 위에 까지 올라가는 이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면서 베이징의 16명소의 하나로 자리잡게 되었다.
장강소삼협(長江小三峽) 혹은 소이강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으며,
작은 계림(小桂林)으로도 불리우는 용경협의 산수를 잘 표현한 한 구절의 시가 있다.
소삼협(小三峽)이 삼협을 능가하니 그 산은 삼협보다 험준하고 소이강이 이강을 능가하니 그 물 또한 이강보다 맑도다.
유람선 선착장 위쪽으로는 465m 길이의 케이블카가
댐을 가로지르고 있다.
- 용경협의 전체 면적은 119㎢이며, 총길이는 21km이다.
- 용경협호의 면적은 34만㎡이며, 용적은 850만㎡, 높이는 60여 미터이다.
- 용경협곡의 전체 길이는 21km정도이나 그 중에서 유람선이
운행하는 거리는 약 7km 가량 된다.
금강사(金剛寺) · 옥도산(玉渡山) · 신선원(神仙院) · 옥황정(玉皇頂) · 해타산 등의
관광명소가 이곳에 자리잡고 있으며, 해타산이 2,241m로 가장 높다.
마주 보이는 절벽에는 장쩌민(江澤民)의 필체로 용경협임을 알리고 있다.
1992년 5월 장쩌민 총서기가 이곳을 방문하면서 관광지구의 이름을
용경협으로 정식 사용하게 되었다.
왼쪽으로 보이는 산은 3면이 물로 에워싸인 봉관도.
협곡을 굽이 돌때마다 좌우로 기암절벽이 잇따라 펼쳐지면서 장관을 보여준다.
마치 파노라마처럼 한 폭의 길고 거대한 산수화를 연상케 하는 풍경이다.
절벽 위쪽으로는 구연동 · 금강산 · 신선원 등의 등산코스도 있다.
만약 신선이 존재한다면 이런 곳에서나 만나 볼 수 있지 않을까...
비록 지금은 댐에 의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모습이지만
그 이전, 본래의 모습은 또 어떠했을지 궁금증이 일어난다.
강 위 180m 정도 되는 높이에 외줄이 걸려 있다. 그 위에서 오토바이나
자전거를 탄 사람이 서커스 묘기를 보여준다고 한다.
그러나 눈에 들어오기로는 실제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설치물같다는 느낌이다.
금강사와 마주한 골짜기에는 붓 모양의 신필봉(神筆峰)이 우뚝 서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진나라 때 '상곡군'이라 불리웠던 연경현에 예서체를
발명한 왕차중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진시황이 그 사실을 알고
여러차례 입궁명령을 내렸으나 왕차중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격노한 진시황은 신하를 시켜 왕차중을 잡아들였으나, 함양으로 압송하는 도중에
한 마리의 큰 봉황으로 변하여 다시 상곡군으로 돌아가 두 개의 깃을
송산(松山) 아래로 떨어뜨려 대핵산과 소핵산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예서체를 발명한 그 신기한 붓은 공중에서 용경협으로 떨어져 하나의
봉우리로 변하였다고 하며, 이후 그 봉우리를 신필봉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팔공산은 군사시설이 설치된 최고봉인 비로봉(1,192m)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각각 동봉(해발 1,167m)과 서봉(1,150m)이 자리잡고 있다.
서봉에서 바라다 본 모습으로 왼쪽이 비로봉이고 오른쪽이 동봉이다.
서봉에는 두 개의 정상석이 놓여 있다.
삼성봉은 서봉의 옛 이름으로 신라시대 삼성암에서 3성인이
득도한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옛 문헌에는 비로봉(정상, 일명 제왕봉)과 염불봉(동봉, 미타봉), 삼성봉(서봉)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지금은 팔공산, 동봉, 서봉으로 통용되고 있다.
동봉에서 팔공스카이라인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시원하다.
그러나 저 멀리 팔공CC가 아무리 봐도 눈에 거슬리는 형국이다.
그 우측으로는 약사여래불이 있는 관봉이 자리해 있다.
비로봉의 청운대와 그 절벽 아래에 위치한 팔공산 제일의
명당이라는 오도암(悟道庵).
신라 654년(태종무열왕 원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했으며,
1963년 폐사이래 지금은 유허(遺墟)만 남아 있다.
팔공산은 비로봉을 중심으로 남동쪽으로 동봉을 거쳐
염불봉-인봉-노적봉-관봉(갓바위)의 연봉으로 뻗고,
서쪽으로는 서봉에서 파계봉을 지나 한티재와 가산을 거쳐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까지 30km가 넘는 거리로
변화무쌍한 산세를 보여준다.
또한 한티재를 경계로 동쪽을 팔공산,
서쪽을 가산이라 나누어 부르고 있기도 하다.
최근 가까운 친척 한 분이 산행을 함께 하자고 했다.
가뜩이나 엉덩이가 무거운 성격이라 망설이고 있자니, 산행지가 영남알프스란다.
순간, 바로 일전에 봤던 유레카님의 산행사진이 떠올랐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렇게 하겠노라고 했다...
간밤에 내리던 비는 그치고 흐린 하늘 한켠으로는 파란 하늘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점차 맑아질 것 같은 상쾌한 기분으로, 영남알프스라 불리우는
간월산과 신불산이 위치한 울산을 향해 출발했다.
그러나 목적지에 가까와질수록 점점 더 흐려지더니 급기야 비가...
점차 개일 것이라는 일기예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참을 기다려봐도
그칠 기미는 보이지 않고... 결국 서둘러 우의를 구입해 산행을 시작했다.
출발지는 등억온천지구 간월산장, 산길을 한참이나 오르고 나니
포장된 임도가 나타났다. 간월재로 오르는 길이었다.
구절양장... 굽이굽이 저 길을 따라 한참이나 올라왔다.
간월재에 도착하니 비가 그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짙게 낀 운무 때문에 주위사정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간월재 표지석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다가 간월산(肝月山 1,069m)을 오르기로 했다.
좁은 산길 곳곳에는 물이 고여있어 질퍼덕하더니 급기야 바지를 흙탕물로 도배하고 만다.
예상보다는 한참을 걸어 정상석에 눈도장을 찍고 주위를 돌아 보지만
보이는 것은 여전히 짙게 낀 운무 뿐...
곧바로 간월재로 내려와서 간단히 요기를 한 후, 혹시라도 운무가 조금이라도
걷히지 않을까 하고 기다려 봤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신불산으로 오르는 계단이 순간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하늘로 향하는 계단 같은, 예상치 않던 장면에 신비한 느낌마져 들었다.
그러나 이내 다시 운무속으로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나무데크를 밟으며 능선을 오른다.
길을 따라 빗물은 그대로 흐르고, 그 때문인지 이미 오래전부터 무너져 내린듯한
데크의 나무계단이 한 두 군데가 아니다.
산길이 으레 그렇듯이 편안한 길은 아니지만, 분명 정비는 필요할 듯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일... 그 길에 의지하여 꾸역꾸역 오르고 또 오른다.
신불산(神佛山 1,159m) 정상을 찍고 신불재를 향해 내려간다.
운무가 조금씩 걷혀가는 듯 하지만, 저 앞쪽이 억새군락지인
신불평원일텐데도 조망은 신통치 않다.
그곳에서 잠시 또 숨을 고르고...
주변을 막 둘러보려 하는데 일행이 빨리 오란다. 원점회귀 산행이다 보니
내려갈 길을 찾아야 하는데, 이쪽 길은 간월산장과는 무관하단다.
그래서 부랴부랴 왔던 길을 되돌아서 다시 신불산 정상에 섰다.
신불산과 두번째 만나는 셈이다.
그런데 바로 이 정상 바로 옆으로 난 길이 그곳과 연결이 된다고 누군가가 조언해 준다.
공룡능선이라 길이 험해 계속적으로 우회로를 찾아가야 한다는 주의를 덧붙이면서...
신불산을 다시 오르면서 만난, 같은 처지의 다른 두 팀과 함께 일단 내려가 보기로 한다.
그런데 한참을 내려가다 보니 능선이 칼날 모양이다.
공룡능선을 타기 전에 좌측길로 빠져야 한다는데, 그 길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그대로 지나쳐 공룡능선까지 더 내려와 버린 것 같았다.
그도 그럴것이 안내표식도 거의 없고 우회로 또한 크게 선명하지 않으니...
결국 그대로 강행하기엔 무리가 있을 것 같아 다시 발걸음을 되돌렸다.
그런데 왔던 길을 되돌아 가봐도 옆길은 예측이 되지 않는다.
그렇지 않아도 험한 길이라는데, 하산할 시간은 빠듯하고...
결국 이쪽 길을 포기하기로 하고 또 다시 신불산으로 오를 수 밖에 없었다.
신불산 정상과 만나는 세번째 길이었다.
다시 시작하는 하산길... 평탄한 길 때문에 마음은 다소 가벼워졌다.
그래도 지체는 할 수 없는 노릇, 서둘러 걷는다.
그런데 간월재가 눈에 들어올 즈음 갑자기 시야가 맑아진 느낌이다.
하늘 한켠으로 빛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운무에 갇혀있던 간월재가 드디어
한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간월재 옆 도로에는 자동차가 길게 이어져 있고...
아까 지나올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풍경을 즐길만한 여유조차 없다.
서둘러 산을 내려가야만 될 형편이다.
마음이 급해진다.
오를땐 조망하지 못한 간월산으로 오르는 길이다.
석양의 빛을 받아 발그스름하게 붉어진 모습이다.
아니, 드러내지 않았던 얼굴을 이제서야 보이게 되었으니
살짝 부끄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한 모양이다.
아쉬운 마음에 간월재 표지석을 다시한번 쳐다보고는 발길을 재촉한다.
보아하니 우리 일행 뒤에는 아무도 없는 듯 하다.
그저 쫓기듯 앞만 보고 열심히 발걸음을 옮길 뿐이다.
거의 앞이 보이지 않을 시점이 되어서야 간신히 주차장에 도달할 수 있었다.
마음같아서는 영축산까지 가서 억새도 마음껏 감상해 보고 싶었지만, 사전준비없는
무대뽀 산행이다 보니, 엉뚱한 곳에서 체력을 너무나 많이 소비해 버렸다.
하룻만에 신불산을 세번이나 보다니 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만약의 경우 어두운 산길을 대비해서 가벼운 랜턴 하나 정도는
꼭 가지고 다녀야 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 영남알프스란 가지산(1,241m), 운문산(1,188m), 천황산(재약산, 1,189m), 신불산(1,159m),
영축산(취서산, 1,081m), 고헌산(1,034m), 간월산(1,069m) 등 경상남도 밀양시 산내면과
청도군 운문면,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등에 위치한 높이 1,000m이상 되는 7개의 산군(山群)을 말한다.
(네이버백과사전)
갓바위 관음휴게소쪽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바로 옆 감나무집 식당을 통해
산길로 접어 들었다. 그냥 산 능선을 따라 가볍게 갓바위까지 가볼 참이다.
주위가 잘 조망되지 않는 산길이지만 저 멀리 갓바위가 나뭇가지사이로
언뜻언뜻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계속해서 그곳까지의 거리를 눈으로 가늠해 가며 열심히 발을 옮긴다.
어느 정도 걸었을까, 주위를 가리던 나무들이 점차 보이지 않게 되고
이내 사방이 확 트여져 왔다.
오른쪽으로 휘돌아 좌측 위 암자가 보이는 산봉우리 까지 가야 할 능선이
한 눈에 들어온다.
도중에 널찍한 바위 위에서 휴식을 취했다.
굽이치는 저 산 너머로는 대구시가지가 기다랗게 누워있는 형상이다.
아마 왼쪽으로 보이는 터널은 익산포항고속도로 백안터널,
우측 아래로는 백안삼거리쯤 될 것 같다.
가산산성의 진남문.
가산산성은 사적 제216호로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가산리에 위치해 있다.
이 산성은 해발 901m에서 600m에 이르는 계곡을 이용하여 쌓은 포곡식과
테뫼식이 혼합된 전체길이 약 7.6km의 방어 성곽이다.
이 산성은 내성, 중성,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내성은 조선 인조 18년(1640)에
경상도 관찰사 이명웅(李命雄)이 가산의 지리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축성을
조정에 건의하여 축조되기 시작하였는데 지형이 험준해 축조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 공사에 10만여 명 이상의 엄청난 인력과 막대한 자금이 동원되고
특히 감사의 가혹한 독려와 공사중 많은 사람의 희생으로 인하여 민심이 동요되자
이명웅은 여러차례의 탄핵끝에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부임지를 옮기기도 했다.
중성은 영조 17년(1741)에 관찰사 정익하(鄭益河)의 장계에 의해 왕명으로 완성되었고,
외성은 숙종 26년(1700)에 관찰사 이세재(李世裁)가 왕명을 받아 축조하였다.
성내에 별장(別將)을 두어 성을 수호케 하고 인근의 경산, 하양, 신령, 의흥, 의성,
군위 지역의 군영 및 군량이 이 성에 속하도록 했으며 칠곡도호부를 산성 내에 두었다.
내성은 그 길이가 4,710보(약4km)이며, 동서북의 문지 및 8개의 암문이 있다.
중성은 602보(약460m)이며, 성문루, 위려각이 설치되었다.
외성은 3,754보(약3km)이며, 남문 및 암문 3곳이 설치되었다.
이 성의 주 출입구는 외성의 남문이다. 현재 성내의 건물들은 남아 있지 않고
건물터만 남아 있으나 대부분의 성벽 및 암문은 원형을 남기고 있다.
안개가 밀려온다.
비가 내린 뒤여서인지 나뭇잎이 흔들릴 때마다 후두둑 물방울이 굴러 떨어진다.
치키봉에 올라 능선을 타고 가산의 정상을 향한다.
좁은 산길의 좌우측으로는 나무가 우거져 있기는 하지만
내려다 보니 생각보다 경사가 심하다. 그런길이 계속 이어진다.
한참을 걷다보니 주위를 조망할 수 없는 가산의 정상 표지석이 갑자기 나타났다.
가산은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과 동명면에 걸쳐 있는 산이다.
높이는 901.6m로 정상은 좁고 평탄한 분지이나 산 아래쪽으로의 형세는
깎아지른 절벽이거나 급경사로 되어 있다.
가산 정상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내려간 자리에 있는 암석으로 이루어진 봉우리이다.
저 아래로는 그대로 아뜩한 절벽이다.
유선대인지 용바위인지...
누군가가 안내판 하나 없다고 투덜대며 지나간다.
허긴, 이름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겠는가.
그저 와서 보고 느끼면 그만인 것을...
산성의 중문, 근래에 복원된 탓인지 옛맛은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 느낄 수가 없다.
가산바위로 향하는 길의 일부는 신작로 같이 훤히 뚫려 있다.
이곳 가산은 팔공산도립공원에 속해 있으며, 유적답사를 겸한
하이킹코스로도 이름이 나 있다.
시종일관 나무가 하늘을 가리고 있어 시원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가산바위. 가산산성(架山山城) 서북쪽 성벽 사이에 위치한 바위로서
가암(架岩)이라고도 부른다.
이 바위의 상면은 80평 규모의 넓은 평면으로 되어 있으며 사방을 훤히 조망할 수 있다.
바위 상면 동단에는 큰 구멍이 나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신라시대 고승이었던
도선(道詵, 827~898)이 산천을 편력하면서 지기를 잡기위해
이 구멍에다 쇠로 만든 소와 말의 형상을 묻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 관찰사 이명웅이 성을 쌓으면서 없애버렸다는 전설이 있다.
넓다란 바위가 녹음이 우거진 숲 사이로 삐죽히 고개를 내밀고 있다.
가산바위, 물론 이곳 아래로도 낭떠러지이다.
비록 안개가 끼여있어 시계는 흐리지만,
가산바위에서의 조망은 시원하다.
저 아랫쪽은 동명면 학명리이다.
사실, 자연은 자연 그대로 두었으면 제일 좋겠지만
지금 당장은 이런 철계단이 고맙게만 느껴진다.
병풍처럼 난간을 형성한 돌기둥, 그 너머로 우뚝 서 있는 봉우리 하나,
저곳이 바로 매화산의 최고봉인 남산제일봉이다.
그러나 앞쪽으로는 사람의 움직임이 감지되지 않는다.
덕분에 고즈넉한 산행길이 되고 있다.
잠시 멈추어 서서 뒤를 돌아본다.
저 멀리 능선 너머 아랫마을은 이곳을 향해 거쳐왔던 합천군 가야면이다.
봉우리가 가파를수록 오르는 계단 또한 그러하다.
그러나 이미 정상은 바로 눈앞이다.
이제 정상이다.
마치 되새김질을 하듯 지나온 길들을 또 다시 되짚어 본다.
이제껏 저 암봉들을 따라 헤치듯 올라왔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그리 힘겨운 길은 아니다.
정상에서 조망해 본 주위의 풍경이다.
해인사 뒤쪽으로 가야산의 상왕봉이 시원스럽게 펼쳐져 있다.
그러나 가야산의 최고봉으로 알려진 이 상왕봉(1,430m)은 최근
국립지리원의 정밀실측결과 이곳과 직선거리로 250m에 위치한
성주쪽의 칠불봉이 3m가 더 높은 1,433m로 나타났다.
따라서 앞으로는 칠불봉이 가야산의 최고봉으로 군림하게 될 것이다.
위 사진에서 칠불봉은 상왕봉에서 오른쪽으로 나란히 높은 산이다.
▶ 상왕봉- '상왕'은 부처를 코끼리 가운데 가장 큰 코끼리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로써
불교에서 유래하였다. 또한 소의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우두봉'이라 불리기도 한다.
▶ 깃대봉- 깃대가 꽂혀있는 산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에는 깃대봉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이 많은데 이는 옛날에 임금이 나라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땅을 하사하고
누구의 땅이라는 '깃대'를 봉우리에 꽂아 두도록 한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 두리봉- 정확한 유래는 없으나 봉(峰)의 형상이 정상에서 사방을 둘러 볼 수 있다 하여
두리봉이라 불리운다고 전해진다.
▶ 홍제암- 보물 1300호,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 이곳에 은거하던 사명대사가 입적하자
광해군은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라는 익호를 내렸는데
그 뒤부터 암자의 이름을 홍제암이라 하였다.
암자에는 홍길동의 저자 허균이 비문을 지은 사명대사의 석장비가 있다.
▶ 해인사- 우리나라 삼보종찰 중 법보종찰로 의상대사의 법손인 순응화상과 그 제자인
이정화상에 의하여 신라 제40대 임금인 애장왕 3년(802년)에 창건되었으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국보 제32호 고려대장경판(팔만대장경)과
국보 52호인 장경판전을 비롯하여 많은 문화재가 있다.
-- 해인사 대적광전의 정남향에 위치한 남산제일봉, 화강암으로 형성된
그 봉우리의 산세에서 나오는 상서로운 기운이 팔만대장경이 있는 해인사
대적광전의 기운과 맞부딪히기 때문에 해인사에 화재가 발생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 봉우리 정상에 소금을 담은 다섯 개의 옹기단지를 다섯 방향으로 묻었는데,
그 후로는 해인사에 큰 화재가 한 차례도 없었다고 한다.
지금도 해마다 단오가 되면 해인사에서는 남산제일봉이 품고 있는
불기운을 누르기 위해 소금을 묻는다고 한다.
남산제일봉에서 바라본 가야산.
-- 40년 가까이 폐쇄됐던 가야산의 만물상 탐방로가 지난 6월 12일부터 개방되었다.
이는 성주군 수륜면 백운리 일원의 백운동 야영장에서 만물상을 거쳐
서성재에 이르는 약 3km의 구간이다.
때로는 장엄하게, 또 때로는 위태하게...
그렇게 쌓이고 쌓여 또 하나의 봉우리를, 그리고 산을 이루고 있었다.
올라온 반대방향으로 내려가는 길.
이 길을 계속해서 가면 해인사관광호텔 쪽으로 하산하게 된다.
청량사 입구의 표지석.
그런데 이미 알고 있던 매화산 혹은 남산제일봉이 아니라
천불산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생소한 이름이다.
곳곳에 기암괴석들이 서 있는 모습이 마치 불상을 이루는 듯하다 하여
그렇게 불리워졌다는데... 알고보니 이 산은 매화산, 남산제일봉
이외에도 천불산, 월류봉이라는 또 다른 이름도 가지고 있었다.
남산제일봉은 경남 합천군 가야면에 있는 매화산의 제1봉이다.
높이는 1,010m로 가야산국립공원에 속하며 가야산의 남쪽에 위치한다.
영남지역 산악인들에게는 매화산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사실 매화산(954m)은 남산제일봉에서 남동쪽으로 2km정도 떨어진 산이다.
다시 말해서 남산제일봉은 매화산 자락의 하나의 봉우리인 셈이다.
천불산을 등에 업고 있는 청량사.
열반의 꽃과 새를 바라보는 누각이라는 설영루(雪影樓)가 왼쪽에,
재가신자들의 숙소와 식당인 상락당(常樂堂)이 오른쪽에 각각 위치해 있으며.
그 사이로 재가신자들의 수행처인 적연당(寂然堂)이 보인다.
이곳 청량사는 해인사의 산내 암자로써 창건연대의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전해오는 말로는 해인사(서기 802년)보다 먼저 창건되었다고 한다.
'삼국사기' 최치원조에 이 절은 최치원(857~?)이 즐겨 찾던 곳으로
기록되어 있어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천년 옛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다포집이다.
왼쪽 건물은 병고로 시달리는 중생들을 구원해 주시는
약사여래 부처님을 모신 약광전(藥光殿)이다.
중요문화재로는 9세기초 부터 이 절을 지켜온 돌부처님(石造如來坐像, 보물 제266호)과,
신라 석탑의 대표적인 양식을 지닌 삼층석탑(보물 제266호),
그리고 9세기 끝무렵의 치레수법이 아름다운 석등(보물 253호) 등이 있다.
■ 청량사 삼층석탑
이 탑은 이중기단 위에 삼층의 탑신을 갖춘 전형적인 신라 석탑이다.
지붕돌의 낙수면은 완만하나 네 모서리에서 경쾌하게 반전되고 있으며
아래에는 각 층 다섯 단의 지붕돌 주름이 있다.
상륜부는 노반만이 남아 있으며, 탑 주위를 화강암의 석재로 넓게 구획하였다.
잘 처리된 탑의 각 부분은 아름다운 조화와 비례를 보이고 있고 조각수법도
경쾌해 보이는 9세기를 대표하는 석탑으로 전체 높이는 4.85m이다.
■ 청량사 석등
네모난 지대석 위의 하대석은 팔각으로 안상에 사자와 운상누각(雲上樓閣)이 교대로 새겨져 있다.
복련석에는 반전한 귀꽃이 있으며 간석(竿石)은 고동형(鼓胴形)으로 앙련과 복련으로 장식하였다.
화사석(火舍石)은 팔각으로 네면에는 화창(火窓)이 나머지에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비교적 얇은 편이며 상륜은 일부 부재가 올려져 있을 뿐 원형을 상실하였다.
전체적으로 균형을 잃지 않아 안정감을 보이고 있는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석등이다.
다만 고동형의 간주석, 비교적 평평한 지붕돌 그리고 조각이 얇은 점,
더욱이 장식적 경향이 강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제작시기는 9세기경으로 추측된다.
등반 개념도.
청량사 왼쪽 산길을 접어들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산을 오르면서 뒤를 돌아다 본 모습으로,
안부에 이르기까지는 이런 오르막길이 계속된다.
능선에 올라 전망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조금 올라가다 보니
이런 멋진 풍경과 만날 수 있었다.
가야할 길을 대충 눈으로 겨눠보니 온통 괴석들 투성이다.
그러나 가파른 암벽사이로는 철계단이 놓여 있는 걸로 보아
큰 어려움은 없을 것 같다.
다만 보기에는 그저 아찔하게 느껴질 뿐이다.
가는 길마다 호위하듯 서 있는 기암들...
한 구비, 한 구비를 돌아들 때 마다 또 다른 얼굴로 맞아준다.
눈 앞에 펼쳐지는 풍광에 이끌리어 열심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뒤를 되돌아 봤다.
암석들이 하나같이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선 모습이다.
경북 포항시 북구 청하면에 위치한 천령산(天嶺山)의 우척봉(牛脊峯, 775m),
그곳에 올랐다. 초입부터 하늘을 뒤덮은 숲길이 정상까지 그대로 이어지면서
그 시원한 공기를 맘껏 들이키다보니 어느새 몸 속은 청정함으로 가득 들어찬 느낌이다.
그러나 정상에 도착해 보니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주위가 탁 트여진 그런 곳이 아니다.
그저 등반로의 쉼터 같은 곳에 표지석이 서 있어 그곳이 정상임을 알게 해줄 뿐이다.
잠시 앉아 쉬면서 조금은 답답해지는 마음에 왼쪽길로 조금 내려가 보니
그제서야 쫙 펼쳐진 산의 능선이 드러난다.
저쪽 중앙부 산꼭대기에 어렴풋이 돌출되어 보이는 곳은 경상북도 수목원의 전망대로
이 길을 계속해서 가면 그곳에 도달하게 된다.
좀 더 왼쪽으로 눈을 돌리니 저 멀리 청하면과 흥해읍은 물론,
포항의 북부지역 까지도 한 눈에 들어온다.
내려올 때는 청하골이라고도 불리우는 보경사 계곡 쪽을 택했다.
보경사가 있는 내연산(710m)은 포항이기는 하지만 포항에서
가장 북쪽이라 청송군의 주왕산과 접해 있다.
주 능선은 밋밋하지만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져 계곡미가 빼어난데다
무려 12개의 폭포가 이어져 절경을 뽐낸다.
보이지는 않지만 깎아지른 듯한 절벽 저 아래로는 12폭포 중 가장 높은
연산폭포(20m)가 세찬 물줄기를 땅바닥으로 떨어뜨리고 있는 중이다.
위에서 내려다 보니 다리가 후들거린다.
연산폭포 바로 아래에 위치한 관음폭포.
왼쪽의 그늘진 절벽은 '비하대', 그리고 그 오른쪽으로 햇볕을 받고 있는 곳은 '학소대'이며,
저 구름다리는 연산폭포와 연결된다.
그늘에 가려져 잘 보이지는 않지만 폭포 주변으로는
관음굴이라 불리우는 작은 굴들이 여러개 뚫려 있는데,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어우러져 가히 절경이라
불리울만한 멋진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도 그럴것이 이미 이 계곡은 그 옛날, 진경산수라는
그림 양식이 완성된 곳으로서 진경산수의 고향으로
불려지고 있는데 그 창시자가 바로 겸재 정선이다.
왼쪽 그림은 겸재가 청하현감을 지낼 때에 그린
'내연삼용추도(內延三龍湫圖)라는 작품으로,
맨 윗부분의 폭포는 연산폭포이며 그 아래
두 가닥으로 갈라진 물줄기는 관음폭포, 그리고
맨아래 폭포는 잠룡폭포를 나타낸다.
다만 연산폭포가 비하대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데도 시원하게 드러나 보이는 것 말고는
실제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림이 아닌, 사진인데도 그 웅장한 풍경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것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아니, 사진으로 담기에는 그 분위기는 너무나 압도적일 뿐더러
오히려 그림이 더 실감나게 다가오는 것 같다.
초록의 산을 뚫고 불쑥 솟아오른 바윗덩어리...
'선일대'이다.
보경사(寶鏡寺)의 전경. 경북 포항시 송라면 내연산에 위치한다.
602년 진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신라 지명법사가 진평왕에게 '동해의 명산에서
명당을 찾아 자신이 진나라의 도인에게 받은 팔면보경을 묻고 그 위에 불당을 세우면
왜구의 침입을 막고 이웃나라의 침입도 받지 않으며 삼국을 통일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진평왕은 지명법사와 함께 동해안 북쪽 해안을 거슬러 올라 가다가
해아현 내연산 아래에 있는 큰 못 속에 팔면보경을 묻고 못을 메워 금당을 건립하면서
보경사라 불렀다고 전한다.
경내에는 중요문화재로 보물 제252호인 보경사 원진국사비와 보물 제430호인
보경사 부도가 있으며, 조선 숙종의 친필 각판(刻板) 및 5층 석탑 등이 있다.
고려 중기의 승려 원진국사의 탑비인 원진국사비.
13세에 승려가 된 원진국사(1171~1221)는 명산을 두루 다니며
수도를 하기도 하였는데, 왕의 부름으로 보경사의 주지가 되었다.
이후, 51세로 입적하자 고종은 그를 국사로 예우하고 '원진'이라는 시호를 내리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운 간결한 모습으로, 비의 몸체 윗부분의 양 끝을
접듯이 잘라 놓았는데 이러한 모습은 당시에 유행하던 양식이다.
이 비가 완성된 것은 고종 11년(1224)으로 원진이 입적한 지 3년 후의 일이며,
비문에는 원진국사의 생애와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산방산(山房山)은 조면암질 안산암으로 구성된 높이 395m의
거대한 종모양의 종상(鐘狀) 화산체로서, 둘레는 3,780m, 면적은 988,332㎡이다.
산방은 산 속의 굴을 뜻하며 산방산 남쪽 측면에 해식동인 굴이 있어
산방산이라 하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옛날 한 사냥꾼이 한라산으로 사슴사냥을 나갔는데, 그날따라 사슴이
한 마리도 얼씬거리지 않아 결국 정상까지 오르게 되었다.
이리저리 찾아 헤맨 끝에 드디어 사슴 한 마리를 발견하고는 급히 활을 치켜들었는데
그만 잘못하여 활끝으로 옥황상제의 엉덩이를 건들고 말았다.
이에 화가 난 옥황상제는 한라산 봉우리를 뽑아 서쪽으로 내던져 버렸는데
그것이 날아와 박힌 곳이 이곳 산방산이고, 그 패인 자리는 백록담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뒷받침이라도 하듯 실제로 산방산은
백록담에 쏙 들어 앉을 만한 크기와 형세를 하고 있다 한다.
산방산 아래에 위치한 용머리는 이곳의 지형이 마치 용이 머리를 쳐들고
바다로 뛰어 들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듯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여기에도 전설이 있다.
중국 진나라 시황제는 중국을 통일한 후 자신에게 맞설
누군가가 나타나게 될까봐 전전긍긍하였다.
그러던 중 탐라섬에 제왕이 태어날 기세를 지닌 터가 있다는 말을 듣게 되자,
풍수에 능한 호종단에게 그 곳에 가 혈맥을 끊어버릴 것을 명했다.
이에 호종단이 이곳 산방산에 도착하여 태평양으로 나가려고 용머리가
꿈틀대는 형세를 목격하고는 용의 꼬리와 잔등을 끊어버렸다.
그러자 시뻘건 피가 솟아오르며 주변을 물들였고
산방산은 괴로운 울음을 며칠 동안이나 토해냈다고 한다.
'하멜표류기'로 우리나라를 유럽에 처음으로 알린 하멜이
표류한 곳이 바로 이곳이라고 한다.
네덜란드인 하멜은 1653년 동인도회사 소속 상선을 타고
일본으로 가던 중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이곳 제주도에 도착했다.
용머리 해안 부근에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하멜기념비와 하멜전시관이 세워져 있다.
산방산을 배경으로 바닷가 쪽에서 바라 본 하멜상선의 모습으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1648년에 건조된 전장 36.6m, 폭 7.8m,
갑판높이 11m, 돛대높이 32m의 범선인 바타비아호를 모델로 재현했다.
산방산 앞바다에 위치한 용머리해안은 기암괴석 등으로 이루어져 경관이 빼어나다.
산방산 쪽에서 내려다 보면 그저 평범한 모습에 지나지 않지만,
바닷가로 내려서면 전혀 다른 풍경과 마주치게 된다.
수천만 년 동안 층층이 쌓여 이루어진 사암층 암벽이 바로 그것이다.
오랜 세월동안 파도와 해안절벽이 서로 부딪히면서 만들어놓은 작품이다.
이러한 지층이 해안선을 따라 쭉 이어진다.
하멜기념비. 한, 네덜란드간의 우호 증진과 하멜의 공덕의 증표로,
한국국제문화협회와 주한 네덜란드 대사관에 의해서 1980년 4월에 세워졌다.
산방산 보문사.
대한불교원효종 제주교구 본사(本寺)로 산방산 초입에 자리하고 있다.
대한불교원효종은 1963년 경담(慶潭)이 창종한 불교종단으로,
고승 원효(元曉)를 종조로 삼고 있으며 대승불교, 생활불교를 구현한다.
이곳 옆으로 나 있는 돌계단을 따라 산방산을 올라가면 산방굴사가 나온다.
산방산의 해발 150m 쯤에는 길이 약 10m, 너비와 높이가 약 5m 정도인
산방굴이라는 해식동굴이 바다를 향해 특색있는 경관을 이루고 있다.
영주십경의 하나로, 그 안에 불상을 안치하였기 때문에 산방굴사(山房窟寺)라고도 한다.
굴 내부 천장 암벽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은 산방산의 암벽을 지키는 여신
'산방덕(山房德)'이 흘리는 사랑의 눈물이라는 전설이 있다.
경상북도 문경시 농암면 내서리에 위치한 STX리조트는
STX그룹의 계열사로, 2007년 11월에 창립되었다.
올해 연초, 이곳의 풍경은 겨울인 탓에 황량한 느낌일 수 밖에 없었지만,
그나마 눈이 있어 행복했다.
때가 되니 어김없이 찾아오는 어둠.
이곳의 부대시설로는 고품격 레스토랑인 '라쎄나'(La Cena)와,
카페테리아인 '해피투게더'(Happy Together), 그리고 카페테라스와 와인바가 있으며,
편의시설로는 노래방인 'N조이', 비즈니스센터, 편의점 등이 있다.
그리고 주위로는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바로 앞 광장에는 작은 연못이 조성되어 있기는 하지만,
아직은 그 운치를 느낄 수는 없다.
특히 SPA 산토리니에서는 중탄산 나트륨 온천수를 사용하여 혈액순환촉진,
피로회복, 신경통 및 관절통증 치료등의 효능을 체험 할 수 있으며,
테마탕, 비데풀, 패밀리 스파, 안개 사우나 등 실내외 스파시설을 갖추고 있다.
또한 2층에는 헬스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따뜻한 계절이 되면 이곳은 휴식의 공간으로서 제 몫을 톡톡히 할 것 같다.
입구의 쌍용계곡과 더불어 바로 인근에 속리산이 위치해 있고, 문경새재, 주흘산 등
문경이 가진 관광자원까지 덤으로 누릴 수 있으니 말이다.
지난 1월 18일, 문경시가 관광특구로 지정되었다.
문경, 가은, 마성, 농암지구가 그 곳으로, 경북도내에서 3번째, 전국에서 26번째라고 한다.
이곳은 쌍용계곡지역을 포함한 농암지구에 해당된다.
산을 오르기 전인 작년 9월 어느날의 팔공산.
첨탑이 서 있는 높은 봉우리가 비로봉이고 바로 그 우측은 동봉으로
서로 지척에 위치한다.
지난 1월 중순, 비로봉에 올랐었다.
산 정상부에 이르러 대구시내 쪽을 내려다 보니
안개, 운무, 연무, 박무, 스모그...
뭐라고 불러야 옳을지도 모르겠지만,
뭐라고 해도 이로울 것이 없는 하얀 공기가 그 곳을 채우고 있었다.
보다 더 먼, 저 곳으로는 아스라이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 듯 하다.
흰 덩어리층이 조금은 옅어진 듯 시가지의 윤곽이 살짝 드러난다.
팔공산의 최정상인 비로봉(해발1192.8m)의 바로 아래에서 내려다 본
대구시가지의 모습으로, 'U'자 형으로 굽이도는 금호강과
그 위를 가로지르는 경부고속도로가 어렴풋이 눈에 들어온다.
반야월 쯤 되는 위치로 추정되는,
그 곳으로 넓게 걸쳐진 희뿌연 띠...
우뚝 솟은 산봉우리는 그 틈을 비집고 올라
숨가쁜 듯 탁한 호흡을 뱉어내고...
아래에서 생각했던 모습과는 딴판이다.
그런대로 시야가 뚫려있을 것 같았는데,
올라와 보니 산등성이만 눈에 들어온다.
그것도 첩첩이 겹쳐진 모습으로 말이다.
보기에는... 저 아래에서 그나마 높다고 하는 대구타워마저도
힘을 쓰지 못하고
그대로 숨이 막혀 쓰러져 버릴 것만 같다.
정상에 서니 그야말로 칼바람이다.
이곳 팔공산 비로봉은 1960년대 말 공산성터 일대에 군부대가 들어서고
방송국 시설이 자리를 잡으면서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어 왔다.
그러나 40여년만인 작년 11월 1일, 군사지역에서 해제되어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가산산성에서 파계봉, 서봉, 비로봉, 동봉, 관봉 등으로 이어지는
21.4km의 팔공산 능선 중 최고봉인 비로봉이지만,
철조망 등의 시설물 때문인지 그다지 큰 감흥은 일어나지 않는다.
팔공산 동봉석조약사여래입상(石造藥師如來立像).
바로 뒤쪽이 동봉이다.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0호로 동봉의 서쪽편에 위치해 있다.
이 불상은 서쪽을 향해 바로 선 전체높이 6m의 거대한 약사여래입상으로,
오랜 비바람에 노출되어 표면이 많이 풍화되었다.
두 볼은 풍만하며 입가에 약간의 미소를 띠고 있어
소박하면서도 자비로운 느낌을 준다.
바로 선 발끝은 드러나 있고 발가락 조각도 뚜렷하며,
옷은 두 어깨에 걸치는 방식으로 입고 치마를 걸쳤다.
또한, 오른손은 무릎위로 늘어뜨려 바닥을 안으로 하고 있고,
왼손은 가슴위에 올려 무언가를 받치고 있다.
옷의 새김은 투박하고 전체 균형도 고르지 못하나 대체로 조화롭다.
이 불상에는 손과 발의 기형적 조각 수법이 나타나기는 하나,
잘 조화되는 옷주름이나 얼굴모습 등의 조각 솜씨로 보아
통일신라 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 현장안내판)
복례문(復禮門), 경북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에 위치한 병산서원의 정문이다.
서원의 정문은 삼문(三門)이 일반적인데, 병산서원의 솟을삼문은
가운데 칸만 판문(板門)이고, 좌우로는 담장과 구분되는 벽채를 한 칸씩 두고 있다.
'복례'라는 이름은 논어 '克己復禮爲仁'에서 유래한다.
이는 공자의 가르침을 함축한 경구(警句)로서, '자기를 낮추고 예(禮)로 돌아가는 것이
곧 인(仁)이다'라는 유학의 자기절제의 정신을 표현해 놓은 것이다.
원래 서원 측면에 있었던 것을 1921년 이 곳으로 이전시켰다.
입교당(立敎堂).
서원의 가장 핵심적인 건물인 강당으로,
원래의 명칭은 숭교당(崇敎堂)이었고 명륜당이라고도 불렀다.
'가르침을 바로 세운다'는 의미이며, 서원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병산서원은 사적 제260호로 지정되었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이 선조 5년(1572)에 지금의 풍산읍에 있던
풍악서당을 이 곳으로 옮겨 온 것이 병산서원의 처음 모습이다.
풍악서당은 원래 풍산 유씨의 교육기관이었다.
류성룡은 선조 때 도체찰사와 영의정을 지냈던 정치가이며 유학자로, 1607년에 타계한 뒤
1614년에 선생을 따르던 제자와 유생들이 이 곳에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세웠다.
이로써 학문을 연구하는 강학공간과 제사를 지내는 제향공간을 모두 갖춘 정식 서원이 되었으며,
철종 14년(1863)에 '병산'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고종 때 흥선 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렸을 때에도 헐리지 않고 그대로 존속된
47개의 서원과 사당 중 하나이다.
서원의 정문인 복례문과 만대루를 지나면 강당과 동재, 서재가 있다.
동재 뒤편으로 서 있는 것은 서원 관리인이 살았던 고직사(庫直舍)이고,
입교당의 서쪽 뒤편에 서 있는 것은 목판과 유물을 보관하는 장판각(藏板閣)이다.
입교당의 동쪽 뒤편에 있는 계단을 오르면 사당으로 들어가는 내삼문과 사당인 존덕사(尊德祠)가 있고,
내삼문 동쪽에는 전사청(典祀廳)이 있다. 열려 있는 복례문 앞에 서서 안쪽을 바라보거나,
서원 안에서 만대루를 통해 바깥을 내다보면 어디 하나 막힘이 없이 탁 트여 있어
건물과 건물 밖의 자연이 하나인 듯 느껴진다.
병산서원은 서원이 번성하던 시기의 한 본보기로 여겨질 만큼 지은 솜씨가 빼어나고 보존이 잘 되어 있으며,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지은 점에서 한국 서원건축의 백미로 이름 나 있다.
뒷마당에서 바라 본 입교당의 마루와 만대루, 그리고 입구인 복례문.
신문(神門). 서원의 내삼문에 해당하며 향사(享祀) 때에 제관(祭官)들이 출입하였다.
정면 3칸의 솟을삼문으로 사당의 출입문답게 붉은 색칠을 하여 부정한 것의 접근을 막고 있다.
이곳을 들어서면 서애 류성룡과 그의 셋째 아들인 수암(修巖) 류진(柳袗, 1582~1635)의
위패를 모신 존덕사(尊德祠)가 있다.
류진이 이 곳에 추가로 배향된 것은 현종 3년(1662)이다.
사당은 신성한 공간이며 위엄을 갖추어야 하기에 내삼문의 좌우로는 담장을 둘렀다.
경사진 지형에 서원을 짓고 가장 높은 곳에 사당을 배치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이다.
또한 강학공간은 선비 정신에 따라 검소하고 단아하게 꾸민데 비해,
제향공간은 단청도 하고 태극문양으로 장식하고 있어 대조를 이룬다.
제향공간으로 존덕사(尊德祠), 신문(神門), 전사청(典祀廳)이 있고,
강학공간으로 입교당(立敎堂), 동재(東齋), 서재(西齋)가 있으며,
부속건물로 장판각(藏板閣), 만대루(晩對樓), 복례문(復禮門), 주사(廚舍) 등이 있다.
만대루(晩對樓)는 휴식과 강학의 복합공간이다.
200여명을 수용하고도 남음직한 장대한 이 누각에는 다른 서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하고 아름다운 면이 있다.
휘어진 모습 그대로 서 있는 아래층의 나무 기둥들과 자연 그대로의 주춧돌, 커다란 통나무를
깎아 만든 계단, 굽이도는 강물의 형상을 닮은 대들보의 모습은 건축물조차 자연의 일부로
생각했던 조상들의 의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하다.
만대루의 2층 누각에서 여유로움을 맛보다.
'만대'는 두보의 시 '백제성루(百濟城樓)' 중 '푸른 절벽은
저녁무렵 마주하기 좋으니(翠屛宜晩對)'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그 이름처럼 해질 무렵에 2층 누각에 올라서 바라보는 낙동강과 병산의 경치는
이곳의 경치 중 으뜸이다.
서원 앞쪽으로 펼쳐진 넓은 백사장과 우뚝 솟은 병산(屛山).
그리고 그 밑을 흐르는 낙동강의 모습은 무척이나 시원스럽게 보인다.
달팽이 뒷간.
서원 밖 주소(廚所, 부엌) 앞에 있는 화장실로, 진흙 돌담의 시작 부분이
끝 부분에 가리도록 둥글게 감아 세워 놓았는데, 그 모양새에서 이름을 따왔다.
출입문을 달아 놓지 않아도 안의 사람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배려한 구조로,
지붕이 따로 없는 이 곳은 유생들의 뒷바라지를 하던 일꾼들이 사용하던 곳이다.
뒷간의 안쪽 모습이다.
400여년 전 서원건물과 함께 지어졌으며, 옛 기록에는 대나무로 벽을 둘렀다고도 전해진다.
병산서원의 부속건물에 포함되어 사적 제206호로 지정되었으며,
2003년 보수작업이 이루어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청량산 육육봉(六六峰)을 아는 이 나와 백구(白鷗) 백구야 훤사(喧辭)하랴 못 믿을 손 도화(桃花)로다.
도화야 뜨지 마라 어주자(魚舟子)알까 하노라"
☞ 훤사하랴: 야단스러우랴, 떠들어 소문내랴. ☞ 어주자: 배타고 고기잡는 사람, 어부.
말년에 '청량산인'이라는 호를 짓고, 아예 이 곳 산중턱 오산당(吾山堂)에서 지내면서
글을 읽으며 후학을 가르치기도 했던 퇴계 이황.
무릉도원같은 청량산을 아끼는 마음을 그는 그렇게 노래했다.
또한, 청량산을 일러 '입을 벌리고 들어갔다가 입을 다물고 나오는 산'이라고도 한다는데,
수려한 경관에 놀라 입을 벌리고 들어갔다가, 나올 때에는 그 비경이 세상에 알려질까 두려워서
입을 꾹 다물어 버린다고 해서 생긴 말이라고 한다.
청량산은 경북 봉화군 명호면과 재산면, 안동시 도산면과 예안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기암괴석이 장관을 이루어 예로부터 소금강으로 불려진 명산이다.
기록에 따르면 청량산은 고대이래로 '수산(水山)'으로 불려지다가, 조선시대에 와서
금탑봉에 자리 잡은 상청량암(上淸凉庵)과 하청량암(下淸凉庵)이 널리 알려지면서
산 이름이 청량산으로 바뀌었다고 하는데, 그 구체적인 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청량산은 주세붕(周世鵬)이 명명한 12봉우리(일명 6.6봉)가 주축을 이루며, 태백산에서 시원하는
낙동강이 산의 웅장한 절벽을 끼고 유유히 흘러가며, 뫼뿌리마다 많은 신화와 전설을 담고 있다.
청량산에는 청량사 유리보전(琉璃寶殿)과 응진전(應眞殿)을 비롯한 20여개의 절터와
퇴계 이황이 공부한 장소에 후학들이 세운 청량정사 (淸凉精舍),
서성(書聖) 김생이 글씨 공부를 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 김생굴, 대문장가 최치원이 수도한 풍혈대(風穴臺),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와서 쌓았다는 산성 등 많은 유적과 선현들의 자취가 남아 있으며,
자연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1982년 8월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도립공원이라 해봤자 면적이 고작 48.76㎢로서 북한산 국립공원의 절반크기에 지나지 않는다.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에 위치한 청량산의 가파른 길을
잠시 오르다 보면 만나게 되는 청량사(淸凉寺).
중앙에 보이는 건물은 강원으로 이용되고 있는 심검당(尋劍堂)으로,
일반인들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은 수행공간이다.
이 곳 좌측으로는 유리보전과 5층석탑이 위치해 있다.
청량사는 신라 문무왕 3년(663)때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창건당시에는 승당 등 33개의 부속건물을 갖추었던 대사찰로, 봉우리마다 자리잡은
암자에서 흘러 나오는 스님들의 독경소리가 청량산을 가득 메웠다고 한다.
또한 한 때는 신라의 고찰인 연대사(蓮臺寺)와 망선암(望仙庵) 등 크고 작은 26개의
암자가 있어서 당시 신라불교의 요람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시대 불교를 억압하는 주자학자들에 의해 절은 피폐하게 되어,
현재는 청량사와 부속건물인 응진전만이 남아있다.
청량사의 대웅전으로, 약사여래불을 모시고 있는 유리보전(琉璃寶殿),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7호이며, 현판글씨는 공민왕의 친필이다.
이 곳에 모셔진 약사여래불은 특이하게도 종이를 녹여서 만든 지불이라고 한다.
유리보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八作)지붕을 한 다포계(多包系)의 집이다.
공포는 외1출목(外一出目) 내2출목의 형식으로 첨차의 짜임이 고졸(古拙)하고
쇠서의 내부 끝은 연화형(蓮花形) 조각을 새기고 있으며, 전면 중간기둥 위에는 용두(龍頭)와
용미(龍尾)를 주두(柱枓) 밑에 내외로 뻗게 하고 있어 조선 후기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유리보전의 바로 앞쪽에 위치한 5층석탑.
1990년에 세워졌으며, 부처님의 진신사리 5과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보지는 못했지만, 영화 '워낭소리'에서 노부부가 죽은 소의 극락왕생을 비는 장면이
이 곳에서 촬영되었다고 한다.
앞에 보이는 2층의 누각은 범종각으로, 법고, 운판, 목어 등이 모셔져 있다.
그 위쪽으로 5층석탑과 유리보전이 보인다.
전통차를 무료로 제공하며, 여행자의 쉼터 역할을 하는 산꾼의 집.
청량사 동쪽 바로 아래쪽에 자리잡고 있다.
산꾼의 집 옆길을 따라 오르면 나오는 어풍대,
그 위에서 바라 본 청량사의 전경이다.
맨 아래 건물은 사찰내의 전통 다원(茶園)이자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이라 불리워지는 안심당이다.
어풍대(御風臺)에서 바라 본 청량사의 수려한 모습.
연화봉이 좌측으로 높이 솟아있는 가운데, 청량산이 포근히 품고있는 형상이다.
금탑봉(金塔峰)의 중층(中層)에 위치하고 있는 어풍대는
내청량과 외청량을 연결하는 요충지 역할을 하고 있으며,
'청량지(淸凉誌)'의 기록에 따르면, 열어구(列御寇, 고대 중국의 인물)가 바람을 타고
보름동안 놀다가 돌아갔다고 하여 어풍대로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 곳 금탑봉 중층에는 어풍대와 함께 치원대(致遠臺), 풍혈대(風穴臺), 요초대(瑤草臺),
경유대(景遊臺) 등이 나열되어 있으며, 이들 대에서는 기암절벽으로 장관을 이루고 있는
청량산의 연화봉 기슭 한가운데, 연꽃 같은 봉우리와 연꽃 꽃술 자리에 자리잡은 듯한
청량사의 모습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청량산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듯, 규모만으로는 여느 산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산행은 축융봉에서 청량산을 조망하고
청량사를 둘러 보는데서 만족하기로 했다.
언젠가 머지 않은 장래에 또 다시 찾게 될 것으로 믿으며...
■ 청량산의 등반 개념도
청량사만을 들리지 않을 경우, 일반적으로 입석에서 출발하여 오른다.
주세붕이 명명한 '육육봉'과 '12대(臺), 3굴(窟)', 그리고 4정(井)으로 표현되는 바위산인 청량산은
최고봉인 의상봉의 높이가 해발 870.2m이고, 맞은편의 축융봉이 845.2m로
높이가 그다지 높지 않고, 덩치도 크지 않기 때문에 산행코스 또한 단순한 편이라 할 수 있다.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호거산(虎踞山)에 위치한 이 운문사(雲門寺)는
신라 진흥왕 21년(서기560년) 초창(初創)되어 대작갑사(大鵲岬寺)라 하였는데,
제1차 중수(重修)는 진평왕 때 원광국사(圓光國師)가,
제2차는 신라말에 보양국사(寶讓國師)가 하였다.
고려 태조는 동왕(同王) 20년(서기937)에 많은 전지(田地)를 내리고
운문선사(雲門禪寺)라 사액(賜額)하면서 운문사(雲門寺)라 불리어 오고 있다.
또한, 고려시대 숙종(서기1105) 때 원응국사(圓應國師)가 3차 중수를 하였으며,
고려 고종(서기1250) 때 일연선사(一然禪師)가 주지(住持)로 주석(住錫)하였다.
그 후 조선시대에 들어와 여러 차례의 중수가 있었고, 1958년에 비구니(比丘尼) 전문학원을
개설한 이래 한국의 대표적인 승가대학(僧伽大學)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보물 제835호로 지정된, 비로전(大雄寶殿, 毘盧殿).
1105년(고려 숙종10년)에 원응국사가 건립하였다고 전하며,
발견된 상량문의 기록으로 보아 1653년(조선 효종4년)에 중창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대웅보전을 짓기 전, 운문사 신앙공간의 중심적 역할을 하였으며,
'대웅보전'이라는 현판을 걸고 있으나 통칭하여 비로전이라고 부른다.
이는 문화재청 등록 당시 '운문사 대웅보전'으로 등재되었기 때문에 옛 현판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앞 쪽에 동과 서로 나란히 서 있는 두 개의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으로,
2단의 기단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인데 규모와 양식이 서로 같다.
기단부분이 많이 손상되어 있던 것을 일제시대 때 일부 보수했으며, 높이는 5.4m로 보물 제678호이다.
이 비로전 내에는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을 모셨으며,
좌측에는 신중탱화, 우측에는 삼장탱화를 봉안하였다.
만세루(萬歲樓).
신라 원광국사가 초창하여 고려의 보양국사가 중창하였으며,
지금의 건물은 1105년 원응국사가 3차 중창할 때의 것이다.
이 건물은 큰 법회시에 대웅전에 들어가지 못한 대중들이
대웅전을 향하여 법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하기위한 것으로,
200여 평의 넓은 공간을 누각으로 조성하였다.
오백전(五百殿).
주불로 석가모니불과 좌보처 제화갈라보살, 우보처 미륵보살과 오백나한상을 모신 전각이다.
나한이란 아라한(阿羅漢)의 줄임말로, 응공(應供)이라고도 하는데,
부처님과 같이 깨달음을 얻어 열반에 이른 사람으로, 인간이 가진 욕망의 사슬과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나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경지에 이른 수행자를 말한다.
운문사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3기의 비석 중 중간에 위치한
보물 제316호인 원응국사비(圓應國師碑).
이 비는 고려 인종 때 건립된 것으로, 운문사의 3대 중창주인 고려 원응국사의
행적이 새겨져 있다. 높이는 230cm이며, 폭은 91cm이다.
다른 두 개의 비는 운문사의 또 다른 중창주인 설송대사비(雪松大師碑)와,
만세루와 대웅전을 중수한 사실을 기념하여 세운 운문사 중수(重修)기념비이다.
말끔한 운문사의 경내에서 북대암을 향해서 바라다 본 모습.
운문사 북쪽으로는 운문산성(일명 지룡산성) 바로 아래에 세워진 북대암이 올려다 보인다.
북대암은 운문산에서 최초로 세워졌으며, 운문사에 소속된 산내암자이다.
천연기념물 제180호로 지정된 운문사의 처진 소나무(盤松)는
주변의 인공적인 압력 없이도 늘어져서 넓게 자라는 나무로 유명하다.
이 소나무는 어느 선사가 이 곳을 지나다가 시들어진 나뭇가지를 꽂아둔 것이
뿌리를 내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해마다 음력 3월 3일인 삼짇날에는 막걸리 12말을 희석하여 영양제로 부어준다.
높이는 약 6m이고, 가슴높이의 줄기 둘레가 2.9m이며, 수령은 450~500년 정도로 추정된다.
고즈넉한 늦은 오후의 햇빛이 머물고 있는 운문사 입구의 소나무 숲길.
소개된 외에도 운문사 경내(境內)에는 다음과 같은 문화재들이 있다.
석등(石燈, 보물 제193호), 사천왕석주(四天王石柱, 보물 제318호), 청동호(靑銅壺, 보물 제193호),
석가여래좌상(釋迦如來坐像, 보물 제317호).
큰 바위는 '아버지바위'이고 작은 바위는 '아들바위'라 하며
둘 다 머리에 삿갓을 쓴 형태이다.
목포는 1897년에야 일본인들이 한국침략의 서남거점으로 개항해
오늘날처럼 도시로 발전했다. 그 전에는 영산강하구를 지키는
보잘 것 없는 나루로 조그만 마을이 있었을 뿐이다.
이 갯마을에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병든 아버지를 모신
가난한 소금장수 청년이 살고 있었다.
그는 포구에 실려 오는 소금을 받아 인접마을에 팔아서 끼니를 이어갔다.
가난하여 약 한 첩 제대로 쓸 수 없었던 청년의 아버지는
날로 병환이 악화되어 갔다. 청년은 안타깝기만 했다.
그는 스스로 큰 결심을 했다.
이번에는 아버지 약값을 충분히 벌어야 집에 돌아온다고 다짐했다.
힘에 겹도록 소금 짐을 짊어지고 떠났다.
그러나 딱하게도 소금을 사려는 사람이 없었다.
빈손으로 집에 돌아갈 수 없었던 청년은 날품이라도 팔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부유해 보이는 길갓집을 찾아 들었다.
그 집주인은 소문난 구두쇠로 한 달 동안을 일하고 품삯을 달라는 청년에게,
'그동안 먹여준 밥값도 못한 주제에 품삯은 무슨 놈의 품삯이냐' 며 쫓아버렸다.
아버지 약값을 구하지 못하면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한터라
길거리에 주저앉아 신세한탄만 하고 있었다.
그 마을을 지난 던 도승이 청년을 보고 무슨 걱정거리가 있기에
그리 한숨을 쉬느냐고 물었다. 청년은 자초지종 그의 처지를 말했다.
얘기를 들은 도승은 크게 낯 색이 변하며 청년을 꾸짖었다.
'청년은 한가지만 생각했지 깊은 생각이 부족했네,
자네가 약값을 마련하겠다고 타향을 전전하고 있는 동안 병든 아버지는
누가 돌보았겠으며 그동안에 죽었다면
애써 약값을 마련했다 한들 무슨 소용 있겠나'
그때서야 병든 아버지를 생각한 청년은 부랴부랴 집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돌보는 이 없이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었다.
청년은 그의 어리석음이 한없이 후회스러웠다.
이승에서 편히 지내지 못한 아버지이지만 저승에서나 편히 쉬게 하는 것이
그의 도리라 생각하고 관을 메고 명당을 찾아 나섰다.
갓바위는 예부터 말 형국으로 명당이 있고 안장터가 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산을 헤매던 청년은 지금의 갓바위 곁에서 앞을 바라보니 시원하기가 그지없고
양지바르므로 이 곳에 묘를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
관을 바닷가에 놓고 묘를 파던 청년은
그만 실수를 저질러 곁에 둔 관을 건드렸던지
관이 데굴데굴 굴러 바닷속으로 첨벙 빠지고 말았다.
넋을 잃은 청년은 행여 관이 떠오르지 않을까 기다렸으나 영영 떠오르지 않았다.
바다를 내려다보면서 엉엉 울던 청년은 하늘을 쳐다볼 수 없는 놈이라며
바다로 뛰어들어 자살하고 말았다.
이 일이 있은 뒤로 이 곳에 아버지바위와 아들바위가 솟아오르고,
아들은 죄진 몸이라 하늘을 대할 수 없어 삿갓을 쓰고 있었다.
이 삿갓은 넓이가 6 m가량이고 한쪽 깃이 2m가량이나 된다.
청년이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팠다는 바위의 윗부분은
바위가 널리 깔린 탓인지 풀이 자라지 않고 있지만 사람들은 청년이
파헤쳐 놓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부근에는 이 바위를 중바위라 부르는 이도 있다.
아라한과 부처님이 영산강을 건너 이곳을 지날 때
쉬던 자리에 쓰고 있던 삿갓을 놓고 간 것이 갓바위가 되었다고도 주장한다.
지금 이곳은 이씨 집안의 선산이 되어 여러 개의 묘가 들어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