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광역시 동구 신무동 팔공산에 위치한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도량인 부인사.
요사채 앞마당의 모습으로, 왼쪽에는 부인사 삼층석탑 서탑, 오른쪽은 동탑,
그리고 그 사이에는 석등이 두 탑과 삼각을 이루며 서 있다.
팔공산 부인사(夫人寺 · 符仁寺 · 夫仁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로, 민족의 보물인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을 봉안했던 대가람이며, 창건연대와 창건자는
알지 못하나 7세기 중반 경 신라 27대 선덕여왕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도 그럴것이 지난 100여년동안 신라 선덕여왕을 기려왔으며, 지금도 해마다
음력 3월 보름이면 선덕대왕 숭모제를 봉행한다.
부인사는 958년에 세워진 '옥룡사 동진대사 보운비(玉龍寺 洞眞大師 寶雲碑)'에는
'부인산사(夫仁山寺)'로 표기되어 있고, 고려시대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1241)'과 '진각국사(眞覺國師) 비문(1382)'에는 '符仁寺'로 표기되어 있으며,
조선시대 15세기의 기록 중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1453), 고려사(高麗史, 1454),
그리고 '삼봉집(三峰集, 1486)에도 '符仁寺'로 표기되어 있다.
하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1530)과 1920년대 이후의
'대구부읍지(大丘府邑誌)에는 '夫人寺'로 표기되어 있는데, 여기서 '부인'이란
신라시대에 왕비를 부인이라 일컬은 데에서 온 것이고 그 주인공은 선덕여왕으로 보고 있다.
또한 '명부전이건기(冥府殿移建記, 1788), 조선총독부 사찰령(寺刹領) 동화사조
(桐華寺條, 1911) 자료와 '백불암선생(1705~1786) 언행록(1999)에는 '夫仁寺'로
표기되어 전해지고 있다.
고려시대인 1011년부터 1078년까지 각인되어 부인사에서 봉안되어 있던
초조대장경은 해인사의 팔만대장경보다 200여년이나 앞섰으나
안타깝게도 1232년 몽고병의 제2차 침입 때 병화로 소실되었다.
현재의 부인사는 대웅전, 일화선원을 중심으로 하는 수행공간인 '부인사'와
초조대장경 유허지로 비정되는 역사공간인 '부인사지(址)로 나누어져 보존되고 있다.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7호인 부인사 서탑(西塔).
원래 심하게 파손되어 있던 높이 3.5m의 동서 쌍탑인데
1964년 서탑이 복원되었다.
2층 기단에 삼층을 이루는 일반적인 양식을 취하고 있고,
아래층 기단은 네 개의 돌로 짜 맞추어졌으며, 위층 기단을
받치기 위한 괴임돌 2단을 조각하여 놓았다.
아래층 기단의 바닥돌에는 두 개의 버팀 기둥무늬와 모서리
기둥무늬를 새겼고 위층 기단의 바닥돌에는 버팀 기둥 1개와
모서리 기둥으로 되어 있다.
또한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기 한 덩어리 돌을 깎아 쌓아
올렸으며 몸돌의 경우 모서리 기둥을 조각하여 드러내고
윗면에는 몸돌을 받치는 괴임돌 1단이 드러나 있다.
지붕돌은 5단씩의 층급받침을 두었다.
그러나 꼭대기를 장식하기 위한 부재들은 모두 없어지고
네모난 지붕 모양의 노반만 남아 있다.
부인사 석등(石燈).
석등은 중생의 마음에 불력을 밝히기 위한 상징적인 것으로
석탑 앞에 설치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 석등은 1964년 7월 부인사 쌍탑을 복원하면서 흩어져 있던
석등 조각들을 모아 지금 자리에 복원한 것이다.
석등의 겉모습은 네모난 바닥돌 위에 3단의 받침을 두어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과 지붕돌을 올린 8각 석등이다.
받침은 가운데 기둥을 사이에 두고 아래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위에는 솟은 연꽃무늬를 표현하였다.
지붕돌은 처마가 길며 각 귀퉁이는 들려 있으며, 꼭대기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둥근 받침만 남아 있다.
석등 전체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고 섬세하여
통일신라시대의 뛰어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요사채 앞마당의 석등 앞에는 배례석(拜禮石)이 놓여 있다.
윗면에는 사찰을 상징하는 연꽃이 양각되어 있고
옆면에는 24장의 연잎이 사방을 돌아가며 새겨져 있다.
대웅전(大雄殿)과 그 우측으로 명부전과 묘심원(妙心院).
불교가 흥성하였던 신라와 고려 때의 부인사는 39개의 부속암자를
관장하였고 2천여 명의 승려가 수도하였으며 전국에서 유일하게
승려들간의 거래가 이루어지던 승시장(僧市場)이 서기도 했다.
현재의 건물은 원래의 위치에서 서북쪽으로 약 400m에 위치한 암자터에다
1930년대 초에 비구니 허상득(許相得)이 중창한 것이다.
당우에는 석가모니불상과 아미타불상, 관세음보살상을 안치한 대웅전과
선덕여왕의 영정을 모신 선덕묘, 그리고 2동의 요사채가 있다.
종각인 현음각(玄音閣).
문화재로는 쌍탑을 비롯하여 신라시대의 당간지주, 석등,
석등대석(石燈臺石), 마애여래좌상, 배례석 등이 있다.
국내외 비구니 선방 가운데 으뜸이 되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은 일화선원(一花禪院).
뒷 건물은 영산전(靈山殿)이다.
산신각(山神閣).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2호인 명부전(冥府殿).
명부전은 원래 부인사의 중심전각이었던 대웅전 건물이었는데
지금의 대웅전을 새로 세운 이후에는 한쪽으로 옮겨
지장보살을 모시고 명부전으로 부른다.
명부전 앞에는 화창(火窓) 두 개를 하나로 합쳐놓은 듯한
특이한 모양의 석등이 있다.
일명암지(逸名庵址) 석등으로 현재의 부인사에서 동남쪽으로
200m 거리에 있는 작은 암자터에 흩어져 있던 석등 조각들을
모아 복원한 것이다.
고려 전기의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보기드믄 형태인데
넓은 면에는 2개의 창을 뚫었고 좁은 면은 1개의 창을 뚫어
정면에서 보면 화창이 두 개이나 옆면에서 보면 하나의 화창만 보여
마치 두 개의 화사석을 합쳐 놓은 것 같은 형태이다.
화사석은 8각이라기보다 거의 4각에 가까워서 마치 직사각형의
네 모서리를 반듯이 자른 모양이다.
상륜은 화사석과 함께 새로 보완된 것이다.
오랜 연륜을 가진 부인사라고는 하지만,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이 1959년에 중창된 명부전일 정도로
대부분의 전각들은 근래에 복원되었다
따라서 아쉽게도 세월의 깊은 맛은 찾아볼 수가 없다.
표충사의 입구에는 영사각이라는 다른 절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건물이 하나 서 있다.
이는 가람수호를 기원하는 외가람각으로써 가람각은 죽은 자의
혼을 실은 영가가 경내로 들어가기 전에 잠깐 모셔지는 곳이다.
이곳에서 영가는 속세의 때를 벗는 목욕을 하게 된다.
전남 순천 송광사의 세월각, 척주각이 이와 같은 용도라 한다.
경남 기념물 제17호로,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재약산 자락에
위치한 표충사, 그 절의 정문인 수충루의 모습이다.
다른 사찰에서는 보기드문 서원 정문 형태의 누각인데, 이는 사명대사의
위패를 모시고 서산대사와 기허대사의 위패를 같이 모신 표충서원이
표충사(表忠寺) 경내에 있기 때문이다.
표충사는 임진왜란때 공을 세운 사명대사(四溟大師)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국가에서 명명한 절이다.
654년(태종무열왕1)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죽림사(竹林寺)라 하였으며,
829년(흥덕왕 4) 인도의 승려 황면선사(黃面禪師)가 현재의 자리에 중창하여
영정사(靈井寺)라 이름을 고치고 3층석탑을 세워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것으로 전한다.
절 이름을 표충사로 바꾸어 부르게 된 것은 표충사(表忠祠)를 밀양시
무안면에서 옮겨오면서 부터 라고 한다.
왼쪽으로 부터 표충서원, 표충사(表忠祠), 유물관.
표충서원은 영조 20년(1744년) 왕명으로 조정에서 임진왜란때 구국구민하신
3대 성사를 모시고 매년 춘추로 제향을 올리게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종 8년(1871년)에는 대원군에 의해 서원철폐령이 내렸으나 이곳 표충서원은
훼철을 면했다고 한다.
또한 표충사는 임진왜란때 승병장으로 큰 활약을 펼쳤던 사명대사의 충정과
깊은 관련이 있어 이 유물관에는 사명대사와 관련된 16건 79점의 유물들이
소장되어 있다.
사천왕문에서 바라본 수충루.
근래에 조성된 사천왕문의 목조사천왕상.
표충사의 사당영역과 사원영역을 구분하고 있는 이 사천왕문은
원래는 대광전 맞은편 우화루 앞쪽에 있었으나, 최근 사당영역을
새롭게 조성하고 절의 진입로를 옮기면서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표충사 삼층석탑과 석등.
▶ 표충사 삼층석탑 (보물 제467호),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7.7m의 3층 석탑이다.
이 석탑은 기본적으로 신라 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상륜부에는
여러 장식과 함께 아직도 철주가 높이 솟아 있고, 삼층의 지붕 모서리에는
작은 풍탁을 달 수 있는 구멍이 뚫려 있다.
기단과 지붕돌에서 보이는 특징으로 보아 통일신라의 늦은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 표충사 석등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호).
이 석등은 기둥돌(竿柱石)과 등(燈)을 넣는 화사석(火舍石), 그리고 화사석을
받쳐주는 위 받침돌(上臺石)과 지붕돌(屋蓋石) 등을 모두 갖추었다.
다만 석등의 전체를 지탱해 주는 받침대(基壇)와 기둥을 받쳐주는
아래 받침돌(下臺石)은 유실된 것으로 보인다.
조각의 수법이나 규모 등 전체적으로 볼 때 통일신라 말기나 고려 초기의
석등으로 추정된다.
표충사 대광전(大光殿)과 팔상전(八相殿).
▶ 표충사 대광전(大光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1호이다.
대광전은 표충사의 중심 불전(佛殿)으로 가운데 있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질병과 무지를 다스리는 약사불을, 서쪽에는 서방 극락세계를
주재하는 아미타불을 각각 봉안하고 있다.
신라시대에 처음 지어졌다고는 하지만, 전란 등으로 불타 버린 것을
1929년에 다시 지었다.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八作) 다포계(多包系) 양식으로,
기둥머리의 용머리 조각과 추녀의 장식들이 화려하고 섬세하며, 기둥과
기둥 위 장식들의 간격이 동일하게 배치되어 균형미를 잘 살리고 있다.
또한 건물 네 귀퉁이에는 추녀가 쳐지는 것을 막기 위해 4개의 기둥(活柱)을
따로 두어 추녀를 받치고 있으며, 건물을 받쳐주는 받침돌(基壇石)과
주춧돌(礎石)은 다듬은 돌로 되어 있어 건물의 품위를 높여주고 있다.
특히 4개의 기둥 중 앞쪽의 기둥은 팔각형인데 반해 뒤쪽의 기둥은
원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런 구성은 매우 특이하다.
전체적으로 보아 이 건물은 화려하고 섬세한 조선 후기 건축양식을 잘 유지하고 있다.
▶ 표충사 팔상전(八相殿).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1호 이다.
팔상전은 부처님의 생애를 여덟가지 모습으로 나누어 표현한 탱화와
존상(尊像)을 모시는 법당이다.
팔상은 하천(下天), 탁태(託胎), 강탄(降誕), 출가(出家), 항마(降魔)),
성도(成道), 전법륜(轉法輪), 입열반(入涅槃)으로 구성되어 있다.
표충사에는 조선 철종대에 환월선사(幻月禪師)가 지장전 옛 터에 세운
팔상전이 있었으며, 지금의 것은 표충서원이 있던 곳에 1971년 옮겨 온 것으로
그 창건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표충서원은 사명대사 8세 법손 월파당 천유(月坡堂 天有)가 서산(西山),
송운(松雲), 기허(騎虛) 삼대사(三大師)의 영정을 봉안하고
향사(享祀)를 받들던 곳이다.
왼쪽부터 관음전과 명부전.
▶ 관음전은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으로 원통전(圓通殿)이라고도 한다.
표충사 관음전에는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을 상징하는 42수 관세음보살을 모셨다.
좌우보처로는 남순동자와 해상용왕이 응림해 있으며,
후불탱화로는 1930년에 조성된 천수천안관세음보살 탱화가 모셔져 있다.
▶ 표충사 명부전(冥府殿)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3호로
저승의 유명계(幽明界)를 사찰 속에 옮겨 놓은 법당이다.
지장보살을 본존으로 봉안하고 있기 때문에 지장전(地藏殿)이라고도 하며,
유명계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을 봉안하고 있기 때문에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한다.
표충사 경내에 관음전과 나란히 있는 이 명부전의 건립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임진왜란 전에 이미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당시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이후 광해군 때에 복구되지만 숙종 때의 화재로 다시 소실되고, 주지 도한(道閑) 등에 의해
다시 곧바로 복구가 이루어진다.
헌종 때에는 월파선사(月坡禪師)가 명부전 자리를 서산(西山), 송운(松雲), 기허(騎虛)
삼대사(三大師)의 영정을 모시는 영당(影堂)으로 바꾸기도 하였다.
지금 전하는 것은 1929년에 복원한 것을 1989년에 개축한 것이다.
이곳 표충사에는 예전에 TV에 출연했던 경력이 있는,
그래서 이제는 유명인사가 다 되어버린 토끼스님이 살고 있다.
사람을 무서워 하지 않고 예불시간이 되면 스스로 알아서
법당으로 들어가 절을 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표충사에 터를 잡은지 오래, 그래서 이제는 사찰의 식구가 다 되어버렸다는 그 토끼...
더운 날씨 때문일까. 건물의 구멍 안으로 들어가 잠깐동안 바깥의 동정을 살피더니
이내 어둠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청량사 입구의 표지석.
그런데 이미 알고 있던 매화산 혹은 남산제일봉이 아니라
천불산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생소한 이름이다.
곳곳에 기암괴석들이 서 있는 모습이 마치 불상을 이루는 듯하다 하여
그렇게 불리워졌다는데... 알고보니 이 산은 매화산, 남산제일봉
이외에도 천불산, 월류봉이라는 또 다른 이름도 가지고 있었다.
남산제일봉은 경남 합천군 가야면에 있는 매화산의 제1봉이다.
높이는 1,010m로 가야산국립공원에 속하며 가야산의 남쪽에 위치한다.
영남지역 산악인들에게는 매화산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사실 매화산(954m)은 남산제일봉에서 남동쪽으로 2km정도 떨어진 산이다.
다시 말해서 남산제일봉은 매화산 자락의 하나의 봉우리인 셈이다.
천불산을 등에 업고 있는 청량사.
열반의 꽃과 새를 바라보는 누각이라는 설영루(雪影樓)가 왼쪽에,
재가신자들의 숙소와 식당인 상락당(常樂堂)이 오른쪽에 각각 위치해 있으며.
그 사이로 재가신자들의 수행처인 적연당(寂然堂)이 보인다.
이곳 청량사는 해인사의 산내 암자로써 창건연대의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전해오는 말로는 해인사(서기 802년)보다 먼저 창건되었다고 한다.
'삼국사기' 최치원조에 이 절은 최치원(857~?)이 즐겨 찾던 곳으로
기록되어 있어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천년 옛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다포집이다.
왼쪽 건물은 병고로 시달리는 중생들을 구원해 주시는
약사여래 부처님을 모신 약광전(藥光殿)이다.
중요문화재로는 9세기초 부터 이 절을 지켜온 돌부처님(石造如來坐像, 보물 제266호)과,
신라 석탑의 대표적인 양식을 지닌 삼층석탑(보물 제266호),
그리고 9세기 끝무렵의 치레수법이 아름다운 석등(보물 253호) 등이 있다.
■ 청량사 삼층석탑
이 탑은 이중기단 위에 삼층의 탑신을 갖춘 전형적인 신라 석탑이다.
지붕돌의 낙수면은 완만하나 네 모서리에서 경쾌하게 반전되고 있으며
아래에는 각 층 다섯 단의 지붕돌 주름이 있다.
상륜부는 노반만이 남아 있으며, 탑 주위를 화강암의 석재로 넓게 구획하였다.
잘 처리된 탑의 각 부분은 아름다운 조화와 비례를 보이고 있고 조각수법도
경쾌해 보이는 9세기를 대표하는 석탑으로 전체 높이는 4.85m이다.
■ 청량사 석등
네모난 지대석 위의 하대석은 팔각으로 안상에 사자와 운상누각(雲上樓閣)이 교대로 새겨져 있다.
복련석에는 반전한 귀꽃이 있으며 간석(竿石)은 고동형(鼓胴形)으로 앙련과 복련으로 장식하였다.
화사석(火舍石)은 팔각으로 네면에는 화창(火窓)이 나머지에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비교적 얇은 편이며 상륜은 일부 부재가 올려져 있을 뿐 원형을 상실하였다.
전체적으로 균형을 잃지 않아 안정감을 보이고 있는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석등이다.
다만 고동형의 간주석, 비교적 평평한 지붕돌 그리고 조각이 얇은 점,
더욱이 장식적 경향이 강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제작시기는 9세기경으로 추측된다.
등반 개념도.
청량사 왼쪽 산길을 접어들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산을 오르면서 뒤를 돌아다 본 모습으로,
안부에 이르기까지는 이런 오르막길이 계속된다.
능선에 올라 전망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조금 올라가다 보니
이런 멋진 풍경과 만날 수 있었다.
가야할 길을 대충 눈으로 겨눠보니 온통 괴석들 투성이다.
그러나 가파른 암벽사이로는 철계단이 놓여 있는 걸로 보아
큰 어려움은 없을 것 같다.
다만 보기에는 그저 아찔하게 느껴질 뿐이다.
가는 길마다 호위하듯 서 있는 기암들...
한 구비, 한 구비를 돌아들 때 마다 또 다른 얼굴로 맞아준다.
눈 앞에 펼쳐지는 풍광에 이끌리어 열심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뒤를 되돌아 봤다.
암석들이 하나같이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선 모습이다.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속리산에 위치한 미륵신앙(彌勒信仰)의 요람으로 불리우는 법주사.
먼저 일주문과 수정교를 지나고 나면, 가람에 들어서는 첫 입구라 할 금강문(金剛門)을 만나게 된다.
좌우로는 돌담으로 회랑을 형성하고 있으며, 인왕상을 봉안하기 때문에
인왕문(仁王門)이라고도 부른다.
법주사는 553년 (신라 진흥왕 14)때 의신(義信)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성덕왕 때 중수를 하였는데, 현재 남아 있는 석물(石物)은 모두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중수를 하였으며, 현존하는 목조건물은 모두 조선 후기의 것이다.
이곳 금강문 안에는 1974년에 조성한 금강역사 2위와, 사자를 탄 문수보살,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을 함께 봉안하였다.
대체로 문 양쪽에는 금강저(金剛杵)나 칼과 창을 손에 들고 있는 금강역사가 모셔진다.
그래서 왼쪽에는 밀적금강(蜜跡金剛), 오른쪽에는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을 모시는데,
혹 입을 벌리고 있는 상을 아금강역사, 입을 다물고 있는 상을 우금강역사라 부르기도 한다.
금강문을 지나자 하늘을 향해 뻗은 두 그루의 나무가 시원스럽게 맞아준다.
바로 뒤의 건물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되었으며 사천왕상을 봉안한 사천왕문으로, 국내의 천왕문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고 한다.
지붕 위쪽으로는 바로 뒤에 위치한 팔상전의 꼭대기 층이 넘겨다 보인다.
팔상전. 국보 제55호로 지정되었으며 5층으로 이루어졌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목조탑이며 탑 중에서도 가장 높은 건축물이기도 하다.
지금의 건물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짓고 1968년에 해체, 수리한 것인데,
안쪽 벽면에는 부처의 일생을 8장면으로 구분하여 그린
팔상도(八相圖)가 그려져 있어 팔상전이라 이름 붙였다.
팔상도란,
1. 석가모니가 도솔천에서 내려오는 장면
2. 룸비니 동산에서 마야부인에게서 태어나는 장면
3. 궁궐의 네 문밖으로 나가 세상을 관찰하는 장면
4. 성을 넘어 출가하는 장면
5. 설산에서 고행하는 장면
6. 보리수 아래에서 마귀를 항복시키는 장면
7. 성불 후 녹야원에서 설법하는 장면
8.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하는 장면 등이다.
높이 33m로, 동양 최대 규모의 미륵불 입상인 금동미륵대불(청동미륵대불).
신라 혜공왕 때인 776년, 진표율사가 금동미륵대불을 처음 지었다고 하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 몰수되어 1964년에 시멘트로 다시 불사를 했다.
1990년에는 붕괴직전의 시멘트 대불이 청동대불로 다시 태어났으며,
2000년 들어서는 원래의 제 모습을 찾아 주고자 금동미륵불로 복원공사를 했다.
당시, 3mm 두께로 황금을 입히는데 모두 80kg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대웅보전에서 팔상전에 이르는 앞마당에는 신라시대의 걸작이라 할 쌍사자석등(雙獅子石燈)이 서 있다.
국보 제5호로, 높이 3.3m에 이르는 팔각석등이다.
신라시대의 석등은 대게 하대석과 중대석, 상대석으로 구성되는데,
이 중대석을 두 마리의 사자가 앞발을 높이 치켜들어 상대석을 떠받치는
독특한 양식으로 되어있다.
보물 제915호로 지정된 대웅보전.
창건무렵인 신라 때에는 미륵장륙상을 모신 용화보전이 미륵신앙 도량인
법주사의 중심역할을 했을 것이기 때문에, 대웅보전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지금의 건물은 고려 중기에 처음 세운 것으로 보이며, 1624년(인조 2)에 중건하였고
이후 잦은 중수를 거듭하였지만, 조선 중기의 양식을 잘 갖추고 있어 보물로 지정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벽암대사가 중창한 이후 400년 만인 2005년,
4년간의 공사끝에 옛모습 그대로 복원한 것이다.
대웅보전 앞에 보이는 석탑은 보물 제15호로 지정된 사천왕석등(四天王石燈)으로,
상대석에 사천왕이 새겨져 있어 그렇게 부른다.
두툼한 판석과 커다란 그릇을 머리에 이고 있는 모습의 희견보살상(喜見菩薩像).
우리나라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보살상으로
전체 높이가 2m에 이르며, 보물 제1417호로 지정되었다.
전체적으로 선이 굵고 대담한 기법이 돋보이는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다.
희견보살은 법화경을 공양하기 위해 스스로 몸과 팔을 불태워
소신(燒身)공양을 올렸다는 보살이다.
그러나 이 보살상의 주인공을 석가여래의 으뜸가는 제자였던
가섭존자(迦葉尊者)에 가깝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가섭존자는 석가가 입멸한 후,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열반에 들지말고
세상에 남아, 가사와 발우를 전하라는 석가여래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경설을 바탕으로
이를 형상화 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능인전 옆의 추래암(墜來岩) 암벽에 새겨진, 전체 높이 5m의 마애여래의상(磨崖如來倚像).
고려시대의 마애불상으로서 보물 제216호로 지정되었다.
의상(倚像)이란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마애불로서 이러한 예는 경주 남산의 삼화령 미륵불이 유일한 작품인데,
그 양식상의 특징과 연관지어 미륵불로 추정하고 있다.
오른편으로 높이 솟은 것은 당간지주로, 고려 초인 1006년(목종 7)에 조성되었는데
당시에는 높이가 16m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뒤 조선 후기인 1866년(고종 3)에는 대원군의 명령으로 국가에서
당백전(當百錢)을 주조하면서 사찰의 많은 금속물들이 징발 당했는데,
그 과정에서 당시 용화전의 미륵장륙상과 이 철당간이 사라졌다.
이후, 1910년경에는 22m 높이의 철당간을 확대, 복원하였고, 1972년에 보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사실, 이곳 해인사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다.
이미 모두가 익히 알고있는 곳이다 보니...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256호인 대적광전
대적광전은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모시는 화엄종 사찰의 중심 법당이다.
부처가 설법한 진리가 태양처럼 우주에 가득 비추는 것을 형상화한 비로자나불은
불교의 진리자체를 상징하는 불상이다.
비로자나불을 모신 전각은 대적광전 이외에도 화엄전과 비로전이 있다.
대적광전은 802년(애장왕 3)에 순응,이정 두 스님이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의 명칭은 비로전이었으나, 1488년(성종 19)에 왕실의 지원에 의해
학조대사가 중창하면서 대적광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현재의 건물은 1817년(순조17)에 불타버려 이듬해 중건한 것을 1971년에
지관스님이 다시 중수한 것이다.
큰 절의 중심 불전에 걸맞게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을 한 우람한 모습이다.
정선이 그린 해인사 그림에는 대적광전이 2층으로 그려졌는데,
1817년의 화재 이전에는 지금보다 더 큰 건물이었을 것이다.
지금의 모습은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다포계 팔작집으로서
중수과정에서 많이 변형되었음을 알 수 있다.
법당 안에는 용기사에서 옮겨온 중앙의 큰 비로자나불을 비롯해
법단의 좌에서 우측으로 법기보살, 보현보살, 지장보살, 비로자나불(대),
비로자나불(소), 문수보살, 관세음보살 순으로 일곱분의 불보살님이 봉안되어 있는데
비로자나불과 지장보살이 함께 모셔진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이는 주변지역의 불타버린 법당에 있던 지장보살을 옮겨 놓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4호인 해인사 3층석탑
해인사의 대적광전 아래 서 있는 석탑으로, 넓은 뜰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어
일명 ‘정중탑(庭中塔)’이라고도 불린다.
이 탑은 2중 기단과 3층의 탑신 및 지붕돌로 이루어진 통일신라 후기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이다.
원래 이 탑의 받침은 신라 석탑 양식인 2중이었으나, 1926년에 탑을 수리하면서
받침을 확장하고 한 층을 더 올려, 본래 지니고 있던 조화미를 상당 부분 상실하고 말았다.
4면의 각 모서리에 기중을 새긴 것 외에는 별다른 조각이 없다.
지붕돌받침은 신라 석탑의 전형인 5층으로 되어 있고,
지붕돌 추녀 끝은 살짝 들어올려져 완만하게 처리되었다.
지붕돌의 각 모서리에는 작은 종이 달려있는데, 본래의 것은 없어지고
나중에 다시 매단 것이다.
탑의 꼭대기 역시 일부가 소실되어 꼭대기를 떠받치는 받침대와
위로 핀 연꽃, 바퀴만 남아있다.
1926년 6월에 이 탑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상층 받침의 돌 함 속에서 9개의
작은 불상이 발견되었는데, 석탑을 수리하고 나서 이들 불상을 다시 탑 안에 봉안하였다.
또 이 석탑 앞에는 코끼리의 눈모양을 형상화했다는 안상과 연꽃무늬가 조각된
배례석이 있었으나 수리하는 과정에서 석등 앞으로 옮겨졌다.
[조선불교통사] 에는 태조가 즉위하여 이 탑을 수리할 때, 대장경을 탑 안에 봉안하면서
나라의 번영과 백성의 평안을 빌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그러나 1926년에 탑을 수리할때 대장경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태조가 수리한 탑이
이 탑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더욱이 근래의 사찰 보수 때 경학원 근처에서 신라 석탑의 재료가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또 다른 석탑이 있었을 가능성도 크다고 하겠다.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5호인 해인사 석등
석등은 부처님이 계신 사찰에 어둠을 밝히기 위해 만든 것이다.
부처님에 대한 등 공양과 관계된 것이므로 부처님을 상징하는 탑과 함께 법당 앞에 설치된다.
이 석등 역시 원래 석탑 앞에 있었지만 현재 위치로 옮겨놓았다.
옮겨진 이유와 시기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없다.
석등은 받침돌과 기둥돌, 등불을 놓는 화사석, 지붕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둥돌이 원래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전체의 크기는 알 수 없다.
맨아래 네모난 받침대에는 코끼리 눈 모양의 무늬를 새겨 넣었으며,
8각형의 아래 위 받침대에는 8장의 연꽃잎을 각각 따고 하늘을 향하도록 새겨넣었다.
화사석에는 4개의 창을 두었는데, 창 사이의 모서리 4면에 각각 사천왕상을
돋을새김한 것이 이채롭다.
지붕돌은 역시 8각으로 처리하여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었으며 맨 위에는 둥근 구슬을 올렸다.
새겨진 눈 모양과 연꽃무늬의 우아한 조각수법, 그리고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볼 수 있다.
한편 1398년 조선 태조 7년에 강화 선원사에 있던 팔만대장경을 지천사로 옮겼다가
이듬해 이곳으로 옮겨왔다.
팔만대장경판전은 1995년 12월에 세계문화 유산으로 공식지정되었다.
경내에는 일주문, 대적광전,구광루 등 문화재 및 암자들이 즐비하여
찾는 이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다.
붉게 물든 덩굴은 담장을 휘감고,
하늘은 마냥 높기만 하다.
대적광전의 화려한 단청.
섬세한 인간의 손길이 이루어 놓은,
획 하나마다에 가득 담긴 불심...
고려팔만대장경판이 보존되어 있는
대장경판전의 입구.
장경판전은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경이나 그것을 인쇄하기 위한 목판을 보존하고 있는 전각으로
사찰에 따라 대장전 혹은 판전, 법보전 등으로 불리운다.
합천 해인사의 장경판전에는 세계의 문화유산인 고려 팔만대장경이 모셔져 있다.
해인사는 신라 창건 이래 조선 말기까지 여러차례에 걸쳐 화재를 입고 중건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천만다행히도 고려의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던 대장경판전(국보 제52호)은
조선 초기 개수를 한 그대로 보존이 되어있어 국보 가운데의 국보인
고려팔만대장경판(국보 제32호)이 함께 온전하게 보존,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
▶ 합천 학사대(學士臺) 전나무, 경상남도 기념물 제 215호이다.
이 전나무는 높이 약30m, 둘레 5.1m 쯤 되는 수령이 1,000년 이상 된 고목이다.
나무의 줄기가 지상 10m 높이에서 두 개로 벌어져 있으며, 나뭇가지가 아래로 향해 뻗어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곳은 고운 최치원 선생이 만년에 벼슬을 버리고
가야산에 은거할 때 찾았던 곳이다.
학사대라는 이름은 고운 선생이 헌강왕때 29세의 나이로 한림학사 벼슬을 하였는데
그 벼슬 이름을 따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고운 최치원 선생은 말년에 제자들 앞에서 이 곳에 지팡이를 꽂으며
"내가 살아 있다면 이 지팡이도 또한 살아 있을 것이니 학문에 열중하라" 는 유언을 남기고
지금의 홍제암 뒤 진대밭골로 유유히 홀로 들어가신 전설로 유명하다.
그래서 이 전나무를 일러 고운 선생의 "지팡이 나무"라고 불리운다.
현재의 다자이후에는 1300년 전, 규슈 전체를 통치하는
'다자이후(大제府)'라는 커다란 행정기관이 설치되어
500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그 역할을 해왔다.
지금도 시내에는 그 역사를 말하듯 다자이후아토, 미츠키아토,
오노조아토, 간제온지(觀世音寺), 지쿠젠 고부분지아토,
다자이후텐만구 등의 수 많은 사적들이 현존하고 있다.
학문의 신인 스가와라 미치자네(菅原道眞)를 모셔놓은 신사.
901년 '우다이진(右大臣)'이라는 장관직에서
돌연 다자이후로 좌천된 미치자네는 2년 후,
이곳에서 세상을 떴다.
그 무덤위에 세워진 것이 '텐만구(신사)'로
현재의 본전(중요문화재)은 1591에 건축되었다.
입시철이 되면 전국 각지에서
합격을 기원하며 몰려든 사람들로 북적대는 곳.
천년이상을 자랑하는 고목들과
6,000여 그루의 매화, 잉어가 자유롭게 뛰어노는 연못,
그리고 본전으로 향하는 길목에 늘어선 각종 상점 등,
일본의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는 곳.
연못엔 잉어들이 한가롭게 유영을 즐기고...
규슈 국립박물관.
일본의 국립박물관 중에서 가장 큰 규모.
'일본문화 형성을 아시아사적 관점에서 조명하는 박물관'을
기본 이념으로 하고 있으며,
구석기시대부터 근대말기(개국)까지의
일본문화 형성에 대해 전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