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건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25호인 봉정사의 만세루.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에 위치해 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다.
특히 맞배 지붕 옆면의 바람판은 아랫단을 둥글게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곳 봉정사 만세루의 바람판은 아랫단이 일직선이다.
천등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이 사찰은 신라 문무왕 12년(672)
의상대사(義湘大師)의 제자인 능인대사가 창건하였다.
천등산은 원래 대망산이라 불렀는데 능인대사가 젊었을 때 대망산 바위굴에서
도를 닦고 있던 중 스님의 도력에 감복한 천상의 선녀가 하늘에서 등불을 내려
굴 안을 환하게 밝혀 주었으므로 천등산(天燈山)이라 이름하고 그 굴을 천등굴이라 하였다.
그 뒤 수행을 하던 능인스님이 도력으로 종이 봉황을 접어 날리니 이곳에 내려 앉아
절을 창건하였다고 하며 그런데서 봉정사(鳳停寺)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극락전에서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능인대덕(能仁大德)이 창건한 후
조선시대까지 여러차례 중수하여 왔다고 한다.
사찰 경내에는 1972년 해체보수 때 발견된 상량문에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확인된
극락전(極樂殿, 국보 제15호)을 비롯하여, 조선시대에 건립된 대웅전(大雄殿, 국보 제311호),
화엄강당(華嚴講堂, 보물 제448호) 고금당(古今堂, 보물 제449호) 등의 건물들이 있는데,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목조건물들이 나란히 있어 우리나라 건축연구에 큰 자료가 되고 있다.
이 외에도 극락전 앞에는 고려시대에 건립한 삼층석탑이 있고 만세루, 요사채 등의
건물이 있으며, 부속 암자로는 영산암(靈山庵)과 지조암(知照庵)이 있다.
본사(本寺)에 10동(棟), 동 · 서 2개의 암자에 9동 등 총건평 500여평이나 되는
안동에서 가장 큰 고찰(古刹)이다.
1680년(숙종6)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지는 이 만세루는 원래 덕휘루(德輝樓)로
불리웠으나 언제부터 만세루로 바뀌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대웅전으로 이르는 문의 구실도 하고 경치를 조망하는 용도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우물바닥에 평난간으로 둘러져 있으며 법고와 목어, 운판(雲版)이 놓여져 있어
예불을 알리는 고루(鼓樓)의 기능도 겸하고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국보 제311호인 대웅전(大雄殿).
기단 위에 툇마루를 설치한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건물은 봉정사의 중심 건물로 조선 초기의 건물로 추정된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건물로 건물 앞에는 축대를 높이 쌓고
그 윗면에는 좁은 마루를 깔고 난간을 세웠으며 내부도 마루를 깔았다.
중앙 뒷면에 높은 기둥 2개를 세워 그것에 의지해 불단(佛壇)을 만들었다.
기둥 사이의 창문이나 벽체 등 일부가 건립된 이후 변경되었으나 공포의
구성에서 힘있고 단순한 수법은 초기의 다포(多包)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내부의 단청은 건립 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고려시대적 요소를
지니고 있어 건물과 함께 중요한 회화자료로 주목되고 있다.
오랜 세월동안 퇴락하여 2000년에 해체 · 보수 하였다.
대웅전에서 내려다본 스님들이 기거하는 요사체인 무량해회(無量海會) 건물.
해회(海會)라 함은 대반야경, 화엄경에서 '수 없이 많은
법문'의 자리라는 표현으로 쓰인다.
오른쪽 건물은 만세루.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자 국보 제15호인 극락전(極樂殿).
아미타부처님을 모신 건물로 극락보전, 아미타전, 무량수전, 무량전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일반적으로 불전은 정면 전체가 문으로 되어 있지만, 봉정사 극락전은
가운데에 작은 문이 있고 옆은 벽으로 되어 있다.
정면 세칸, 측면 네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기둥 위에만 공포를 얹은 주심포 양식이다.
작은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측면에 세 개의 기둥을 세워 튼튼한 구조를 취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석조물에서 볼 수 있는 부재가 있는 등, 이 건물의 몇몇 특징들은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로 계승된 옛 건축 양식으로 여겨지고 있어
부석사 무량수전보다 양식적으로 앞서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극락전 앞 뜰에 위치한 봉정사 삼층석탑.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2호이다.
이 탑은 고려시대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높이는 3.18m이다.
탑의 무게로 인하여 기단부의 일부가 약간 파손되었으며, 상륜부 일부가
남아 있지 않으나 거의 완전한 3층 석탑이다.
2중 기단의 방형 석탑으로서 기단부에 비해 탑신부의 폭이 좁으며,
각층 높이의 체감이 적당한 반면 폭의 체감율이 적고, 지붕돌도
높이에 비해 폭이 좁아 처마의 반전이 약하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약간 둔한 느낌을 준다.
이 탑은 봉정사의 극락전과 건립연대가 같을 것으로 추정되며,
당대의 다른 석탑과 비교하여 특이한 점이나 미적으로 뛰어난 점은
없으나, 전체적으로 고려 중엽의 석탑양식을 잘 갖추고 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4호인 석조여래좌상.
극락전과 대웅전 사이에 있다.
이 불상은 안동군 월곡면 미질리에서 발굴된 것으로 그곳에 있던
안정사에 보관되어 있었다.
본래는 연화좌대(蓮花座臺)에 안치된 석불상인데 안정사 주지가
방에 안치하면서 금분을 칠해 원형이 다소 손상되었다.
대좌와 광배(光背)는 없어졌다.
그 뒤 안동댐 건설로 안정사가 폐사되면서 1973년부터 봉정사에 보관되고 있다.
신체에 비해 작은 불두(佛頭)에는 나선형 머리카락(螺髮)과
큼직한 살상투가 표현되었다.
당당하고 둥근 어깨에서 느껴지는 양감에 비해 가슴은 대체로 편평하며,
결가부좌를 튼 하반신을 높게 표현하여 안정감이 느껴진다.
손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고 있다.
이 불상의 양식은 통일신라 하대의 그것과 유사하므로 제작시기를
9세기 경으로 추정한다.
봉정사 동쪽 약 100m 떨어진 곳에는 부속암자인 영산암(靈山庵)이 위치해 있다.
그곳으로 오르는 계단이다.
영산암의 우화루(雨花樓) .
영산암의 입구에 해당되는 우화루의 현판은 원래 극락전 앞에 있던
누각의 현판이었다고 한다.
우화(雨花)는 석가모니께서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처음 설하셨을 때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고 한 것에서 유래한 것이라 하며
영산암의 영산(靈山)은 원래 영축산을 말한다.
봉정사 영산암은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26호로 응진전(應眞殿) · 염화실 ·
송암당 · 삼성각 · 우화루 · 관심당 등 6개 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건물의 구체적인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여러 사료로 볼 때 19세기 말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이 전체적으로 'ㅁ'자형으로 구성되어 폐쇄적인 느낌이 들 수도 있지만,
지형의 높이를 이용한 3단의 마당 구성과 우화루의 벽체를 없애고
송암당을 누마루로 처리한 기법 등에서 폐쇄적인 느낌이 들지 않도록 한
배려가 돋보인다.
우화루 · 송암당의 건물 구조와 삼성각 앞의 조경 등에서 매우 뛰어난
공간처리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우화루를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전각, 주 불전인 응진전(應眞殿)이다.
내부의 후불탱화 제작기록(1888년)으로 보아 19세기말 건물로 추정된다.
이곳 영산암은 좁은 공간에 6개의 건물이 자리잡고 있어
아기자기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송암당(松岩堂).
건물의 이름을 뒷받침 해 주기라도 하듯 바로 집 앞마당
작은 동산의 바위 위에는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건물에는 툇마루와 누마루 등이 설치되어 서로 끊어질 듯 이어져 있고,
좌우 승방들은 전면의 누각과 함께 'ㄷ'자 마당을 이룬다.
안쪽으로 응진전과 삼성각이 있으며 삼성각 옆에는 모두 6동의 건물이 있다.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의 무대였다는 이 영산암은
여느 절집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아름다운 정원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