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건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25호인 봉정사의 만세루.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에 위치해 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다.
특히 맞배 지붕 옆면의 바람판은 아랫단을 둥글게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곳 봉정사 만세루의 바람판은 아랫단이 일직선이다.
천등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이 사찰은 신라 문무왕 12년(672)
의상대사(義湘大師)의 제자인 능인대사가 창건하였다.
천등산은 원래 대망산이라 불렀는데 능인대사가 젊었을 때 대망산 바위굴에서
도를 닦고 있던 중 스님의 도력에 감복한 천상의 선녀가 하늘에서 등불을 내려
굴 안을 환하게 밝혀 주었으므로 천등산(天燈山)이라 이름하고 그 굴을 천등굴이라 하였다.
그 뒤 수행을 하던 능인스님이 도력으로 종이 봉황을 접어 날리니 이곳에 내려 앉아
절을 창건하였다고 하며 그런데서 봉정사(鳳停寺)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극락전에서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능인대덕(能仁大德)이 창건한 후
조선시대까지 여러차례 중수하여 왔다고 한다.
사찰 경내에는 1972년 해체보수 때 발견된 상량문에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확인된
극락전(極樂殿, 국보 제15호)을 비롯하여, 조선시대에 건립된 대웅전(大雄殿, 국보 제311호),
화엄강당(華嚴講堂, 보물 제448호) 고금당(古今堂, 보물 제449호) 등의 건물들이 있는데,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목조건물들이 나란히 있어 우리나라 건축연구에 큰 자료가 되고 있다.
이 외에도 극락전 앞에는 고려시대에 건립한 삼층석탑이 있고 만세루, 요사채 등의
건물이 있으며, 부속 암자로는 영산암(靈山庵)과 지조암(知照庵)이 있다.
본사(本寺)에 10동(棟), 동 · 서 2개의 암자에 9동 등 총건평 500여평이나 되는
안동에서 가장 큰 고찰(古刹)이다.
1680년(숙종6)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지는 이 만세루는 원래 덕휘루(德輝樓)로
불리웠으나 언제부터 만세루로 바뀌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대웅전으로 이르는 문의 구실도 하고 경치를 조망하는 용도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우물바닥에 평난간으로 둘러져 있으며 법고와 목어, 운판(雲版)이 놓여져 있어
예불을 알리는 고루(鼓樓)의 기능도 겸하고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국보 제311호인 대웅전(大雄殿).
기단 위에 툇마루를 설치한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건물은 봉정사의 중심 건물로 조선 초기의 건물로 추정된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건물로 건물 앞에는 축대를 높이 쌓고
그 윗면에는 좁은 마루를 깔고 난간을 세웠으며 내부도 마루를 깔았다.
중앙 뒷면에 높은 기둥 2개를 세워 그것에 의지해 불단(佛壇)을 만들었다.
기둥 사이의 창문이나 벽체 등 일부가 건립된 이후 변경되었으나 공포의
구성에서 힘있고 단순한 수법은 초기의 다포(多包)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내부의 단청은 건립 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고려시대적 요소를
지니고 있어 건물과 함께 중요한 회화자료로 주목되고 있다.
오랜 세월동안 퇴락하여 2000년에 해체 · 보수 하였다.
대웅전에서 내려다본 스님들이 기거하는 요사체인 무량해회(無量海會) 건물.
해회(海會)라 함은 대반야경, 화엄경에서 '수 없이 많은
법문'의 자리라는 표현으로 쓰인다.
오른쪽 건물은 만세루.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자 국보 제15호인 극락전(極樂殿).
아미타부처님을 모신 건물로 극락보전, 아미타전, 무량수전, 무량전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일반적으로 불전은 정면 전체가 문으로 되어 있지만, 봉정사 극락전은
가운데에 작은 문이 있고 옆은 벽으로 되어 있다.
정면 세칸, 측면 네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기둥 위에만 공포를 얹은 주심포 양식이다.
작은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측면에 세 개의 기둥을 세워 튼튼한 구조를 취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석조물에서 볼 수 있는 부재가 있는 등, 이 건물의 몇몇 특징들은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로 계승된 옛 건축 양식으로 여겨지고 있어
부석사 무량수전보다 양식적으로 앞서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극락전 앞 뜰에 위치한 봉정사 삼층석탑.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2호이다.
이 탑은 고려시대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높이는 3.18m이다.
탑의 무게로 인하여 기단부의 일부가 약간 파손되었으며, 상륜부 일부가
남아 있지 않으나 거의 완전한 3층 석탑이다.
2중 기단의 방형 석탑으로서 기단부에 비해 탑신부의 폭이 좁으며,
각층 높이의 체감이 적당한 반면 폭의 체감율이 적고, 지붕돌도
높이에 비해 폭이 좁아 처마의 반전이 약하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약간 둔한 느낌을 준다.
이 탑은 봉정사의 극락전과 건립연대가 같을 것으로 추정되며,
당대의 다른 석탑과 비교하여 특이한 점이나 미적으로 뛰어난 점은
없으나, 전체적으로 고려 중엽의 석탑양식을 잘 갖추고 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4호인 석조여래좌상.
극락전과 대웅전 사이에 있다.
이 불상은 안동군 월곡면 미질리에서 발굴된 것으로 그곳에 있던
안정사에 보관되어 있었다.
본래는 연화좌대(蓮花座臺)에 안치된 석불상인데 안정사 주지가
방에 안치하면서 금분을 칠해 원형이 다소 손상되었다.
대좌와 광배(光背)는 없어졌다.
그 뒤 안동댐 건설로 안정사가 폐사되면서 1973년부터 봉정사에 보관되고 있다.
신체에 비해 작은 불두(佛頭)에는 나선형 머리카락(螺髮)과
큼직한 살상투가 표현되었다.
당당하고 둥근 어깨에서 느껴지는 양감에 비해 가슴은 대체로 편평하며,
결가부좌를 튼 하반신을 높게 표현하여 안정감이 느껴진다.
손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고 있다.
이 불상의 양식은 통일신라 하대의 그것과 유사하므로 제작시기를
9세기 경으로 추정한다.
봉정사 동쪽 약 100m 떨어진 곳에는 부속암자인 영산암(靈山庵)이 위치해 있다.
그곳으로 오르는 계단이다.
영산암의 우화루(雨花樓) .
영산암의 입구에 해당되는 우화루의 현판은 원래 극락전 앞에 있던
누각의 현판이었다고 한다.
우화(雨花)는 석가모니께서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처음 설하셨을 때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고 한 것에서 유래한 것이라 하며
영산암의 영산(靈山)은 원래 영축산을 말한다.
봉정사 영산암은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26호로 응진전(應眞殿) · 염화실 ·
송암당 · 삼성각 · 우화루 · 관심당 등 6개 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건물의 구체적인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여러 사료로 볼 때 19세기 말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이 전체적으로 'ㅁ'자형으로 구성되어 폐쇄적인 느낌이 들 수도 있지만,
지형의 높이를 이용한 3단의 마당 구성과 우화루의 벽체를 없애고
송암당을 누마루로 처리한 기법 등에서 폐쇄적인 느낌이 들지 않도록 한
배려가 돋보인다.
우화루 · 송암당의 건물 구조와 삼성각 앞의 조경 등에서 매우 뛰어난
공간처리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우화루를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전각, 주 불전인 응진전(應眞殿)이다.
내부의 후불탱화 제작기록(1888년)으로 보아 19세기말 건물로 추정된다.
이곳 영산암은 좁은 공간에 6개의 건물이 자리잡고 있어
아기자기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송암당(松岩堂).
건물의 이름을 뒷받침 해 주기라도 하듯 바로 집 앞마당
작은 동산의 바위 위에는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건물에는 툇마루와 누마루 등이 설치되어 서로 끊어질 듯 이어져 있고,
좌우 승방들은 전면의 누각과 함께 'ㄷ'자 마당을 이룬다.
안쪽으로 응진전과 삼성각이 있으며 삼성각 옆에는 모두 6동의 건물이 있다.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의 무대였다는 이 영산암은
여느 절집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아름다운 정원을 가지고 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59호인 삼릉계곡 선각여래좌상(線刻如來坐像).
삼릉계석불좌상을 지나 조금만 올라가면 만날 수 있다.
이 불상은 높이 10m 가량 되는 바위면에 새겨져 있다.
바위면의 중간쯤에 가로로 갈라진 홈이 파여 있는데, 위쪽에 불상을
조각하였으며, 연꽃대좌의 아랫단은 홈 아래에 걸쳐 있다.
얼굴 부분은 돋을새김을 하고 몸은 얕은 돋을새김인데, 나머지는
선으로 표현한 독특한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다.
얼굴은 큼지막하고 넓적하게 표현하고 민머리 위에 상투 모양을
크게 새겼는데 머리와 구분이 없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쳤으며 양손의 손목까지 덮고 있다.
왼손은 엄지와 셋째 손가락을 붙여 무릎 위에 얹고 오른손은 가슴 앞에 들어
엄지와 셋째 손가락을 붙이고 손바닥이 아래로 향하도록 하여
왼손과 오른손이 마주하게 하였다.
바위 속에서 얼굴만 내민 듯한 점이 특이하며,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상선암 바로 위쪽에 위치한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磨崖釋迦如來坐像).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58호이다.
이 불상은 남산의 북쪽 금오봉(金鰲峰)에서 북서쪽으로 뻗어 내리다가
작은 봉우리를 형성한 바둑바위의 남쪽 중턱에 위치해 있다.
자연 암반을 파내어 광배(光背)로 삼았는데 깎아내다가 그만둔 듯 거칠다.
높이 7m로 냉골(三陵溪)에서는 가장 큰 불상이고 남산의 북봉인
금오봉을 향하여 앉아 있다.
이 불상의 머리는 거의 입체불에 가깝고, 그 아래는 선으로만 조각되어 있다.
풍만한 얼굴에 눈썹은 둥글고, 눈은 반쯤 뜨고 입은 굳게 다물었다.
민머리에 턱은 주름이 지고 귀는 어깨까지 큼직하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져 있으며, 가슴 부분의 벌어진 옷 사이로 속옷의 매듭이 보인다.
오른손은 엄지와 둘째, 셋째 손가락을 굽혀 가슴에 올렸고 왼손은 무릎에 얹었다.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양 다리의 발 표현과 연꽃대좌가 아주 특이하다.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능선 안부에서 왼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신들이
바둑을 두었다는 바둑바위가 나온다.
그곳은 전망이 좋아 경주시내가 한눈에 조망된다.
포석정, 첨성대, 황룡사지, 천마총, 대릉원, 분황사 등...
갔던 길을 되돌아와 안부의 오른쪽으로 발걸음을 계속한다.
산행의 출발점인 삼릉과 주차장이 보이고...
이미 지나온 조그마한 암자인 상선암도 내려다보인다.
물론, 마애석가여래좌상도 예외는 아니다.
아랫쪽에서 바라본 것과는 달리 주위의 풍경과
어울리니 더 장엄한 느낌이다.
남산에는 고위봉(高位峰, 494m)과 금오봉(金鰲峰, 468m)의
두 봉우리가 솟아 있는데, 이 봉우리에서 흘러내리는 40여 계곡과
산, 밭들을 모두 합쳐서 남산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곳 금오산 정상은 주위가 나무로 가려져 있어 특별한 조망은 없다.
▶ 남산(南山)과 또 다른 산 망산(望山, 망성산)의 유래
옛날 경주의 이름은 '서라벌(徐羅伐)' 또는 '새벌'이라 했으며 새벌은 동이 터서
솟아오른 햇님이 가장 먼저 비춰주는 광명에 찬 땅이라는 뜻으로 아침 햇님이
새벌을 비추고 따스한 햇살에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변화가 아름답고
온갖 곡식과 열매가 풍성하여 언제나 복된 웃음으로 가득 찬 평화로운 땅이었다.
이 평화로운 땅에 어느날 두 신이 찾아왔다.
한 신은 검붉은 얼굴에 강한 근육이 울퉁불퉁한 남신(男神)이었고, 또 한 사람은
갸름한 얼굴에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 예쁜 웃음이 아름다운 여신(女神)이었다.
두 신은 아름다운 새벌을 둘러보고 "야! 우리가 살 땅은 바로 이곳이구나!"하고 외쳤고,
이 소리는 너무나 우렁차 새벌의 들판을 진동하였다.
이때 개울가에서 빨래하던 처녀가 놀라 소리나는 곳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산 같이 큰 두 남녀가 자기 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아닌가?
처녀는 겁에 질려 "산 봐라!"하고 소리 지르고는 정신을 잃었다.
"산 같이 큰 사람 봐라!"라고 해야 할 말을 급한 나머지 "산 봐라!"라고 외쳤던 것이다.
갑자기 발 아래에서 들려오는 외마디 소리에 두 신도 깜짝 놀라 그 자리에
발을 멈췄는데 그만 웬일인지 다시는 발을 옮길 수 없었다.
두 신은 그 자리에 굳어 움직일 수 없는 산이 되었는데 소원대로 이곳 아름답고
기름진 새벌에서 영원히 살게 된 것이다.
남신은 기암괴석이 울퉁불퉁하고 강하게 생긴 남산(南山)이 되었고, 여신은 서쪽에
솟아있는 부드럽고 포근한 망산(望山)이 되었다고 전해져 온다. (참고문헌/ 경주시지)
금오산 정상을 내려서니 제법 넓은 신작로길이 나타난다.
그 길을 따라 잠시 내려오다가 용장사지 방향인 오른쪽으로 접어들고,
얼마못가 보물 제186호인 경주 남산 용장사곡 삼층석탑과 마주치게 된다.
경사면 위에 세워져 있어 조망이 시원하다.
용장사(茸長寺)의 법당터보다 높은 곳에 세워진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자연 암반을 다듬어 아랫기단으로 삼고, 그 위에
면마다 기둥새김 셋이 있는 윗기단을 설치하여 산 전체를
기단으로 여기도록 고안되었다.
층마다 몸체돌 하나에 지붕돌 하나씩 3층으로 쌓았는데, 지붕돌과 몸돌을
별도의 석재로 조성하였다.
이곳에는 신라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 제53대 신덕왕(神德王),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무덤이 한 곳에 모여있어 삼릉이라 부른다.
아달라왕(재위 154~184)은 백제가 침입하여 백성을 잡아가자
친히 군사를 출동시켜 전장에 나아갔다.
그러나 백제가 화친을 요청하자 포로들을 석방하였다.
왜(倭)에서는 사신을 보내왔다.
능의 크기는 밑둘레 58m, 높이 5.4m, 지름 18m이다.
효공왕(孝恭王)이 자손이 없이 죽자 백성들이 헌강왕(憲康王)의 사위인
신덕왕(재위 912~917, 박경휘)을 추대하였다.
견훤(甄萱)과 궁예(弓裔)의 침입이 있어 싸움에 진력하였다.
능의 크기는 밑둘레 61m, 높이 5.8m, 지름 18m이다.
두 차례에 걸쳐 도굴을 당하여 1953년과 1963년에 내부가 조사되었다.
조사결과 매장 주체는 깬 돌로 쌓은 횡혈식 돌방(橫穴式 石室)으로 밝혀졌다.
경명왕(재위 917~924, 박승영)은 신덕왕의 아들로 고려 태조 왕건(王建)과
손잡고 견훤의 대야성(大耶城) 공격을 물리쳤다.
능의 크기는 밑둘레 50m, 높이 4.5m, 지름 16m이다.
반드시 가보리라 했지만 꽤 오랜 기간동안 미루기만 했던 곳, 곳곳에 불상이 산재해 있어 노천박물관으로도 불린다는 그곳, 경주 남산에 다녀왔다.
경주 남산은 1968년 지리산에 이어 두번째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다른 곳과는 달리 유일한 사적형 국립공원이다.
2000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런만큼 남산을 오르는 여러 코스 중 가장 볼 것이 많다는
서남산 제1코스를 찾았다. 삼릉에서 출발, 상선암, 바둑바위를 거쳐 금오봉 정상에 올랐다가 용장사지를 지나 용장골로 하산하는 코스다.
■ 경주 남산 등반코스
▶ 1코스 (서남산)
삼릉에서 용장까지 / 총6km, 6:30소요
이 길은 남산 골짜기 가운데 가장 많은 유적이 있어 남산의 불상을 시대적 미술사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산행의 출발점에 위치한 삼릉 주변으로는 소나무가 빼꼭하게
들어차 있어 많은 사진가들의 사랑을 받기도 한다.
이곳 남산에서 현재까지 발견된 절터는 112곳, 탑은 61기이고,
불상은 80체를 헤아린다.
불상 중에는 입체로 된 것이 29체이고 바위면에 새긴 마애불상은 51체이다.
그러니 노천박물관이라 불리워도 전혀 이상할 것은 없다.
삼릉 바로 우측편에 위치한 사적 제222호인 경애왕릉(景哀王陵).
이 능은 신라 제55대 경애왕(景哀王, 재위 924~927)을 모신 곳이다.
밑둘레 43m, 지름 12m, 높이 4.2m 규모로 흙을 둥글게 쌓은 형태이다.
남산의 북서쪽 구릉의 끝이자 인천(麟川, 기린내)의 동안(東岸)에 위치하고 있다.
왕은 제53대 신덕왕(神德王)의 아들로 927년 포석정(鮑石亭)에서
연회를 베풀고 있을 때 후백제 견훤(甄萱)의 습격을 받아 생을 마쳤다.
삼릉을 지나면서 바로 산행이 시작된다.
산책을 하듯 쉬엄쉬엄 오르니 이내 여래상 하나가 나타난다.
바로 삼릉계 석조여래좌상(三陵溪 石造如來坐像)이다.
계곡 어귀에 3개의 능이 있어 삼릉계라 하는데 계곡이 깊고
여름에도 찬 기운이 돌아 냉골(冷谷)이라고 부른다.
이 계곡에는 11개소의 절터와 15구의 불상이 산재하여 남산에서 가장 많은
유적이 있으며 금오봉 정상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찾는 사람들이 많다.
이 석조여래좌상은 1964년 8월 동국대학교 학생들에 의해
약 30m 남쪽 땅 속에서 머리(佛頭)가 없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특히 이 부처님은 왼쪽 어깨에서 흘러내려 매듭진 가사끈과 아래 옷(裙衣)을
동여맨 끈, 그리고 무릎 아래로 드리워진 두 줄의 매듭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용장사 삼륜대좌불과 함께 복식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불상은 손과 머리가 파손되었으나 몸체가 풍만하고 옷주름이 유려하여
통일신라시대의 우수한 조각품으로 평가된다.
왼쪽 산등성이 바위 벼랑에는 관세음보살상이 새겨져 있고 위쪽으로 오르다 보면
선각의 여섯 부처님과 마애여래좌상, 석가여래좌상, 그리고 남산에서
좌불로는 가장 큰 상선암 마애여래좌상 등 귀중한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다.
석조여래좌상 바로 왼쪽길로 접어드니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磨崖觀音菩薩像)이 반겨주고...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호이다.
이 불상은 남산의 삼릉계곡에 있으며 돌기둥 같은 암벽에
돋을새김되어 있다.
풍만한 얼굴에 머리 위에는 삼면보관(寶冠)을 썼는데,
앞에 작은 불상이 조각되어 있어 이 불상이 관음보살임을 알 수 있다.
입술에는 붉은색이 아직 남아 있으며 연꽃으로 된 대좌 위에 서 있는데,
목걸이를 하고 허리 아래로 흘러내린 옷자락은 양 다리에 각각
U자 모양으로 드리우고 있다.
왼손은 정병(보병)을 들고, 오른손은 가슴에 들어올려
손가락을 구부려 밖으로 향하고 있다.
갔던 길을 되돌아와 원래 오르던 길로 계속 진행한다.
얼마못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호인
삼릉계곡 선각육존불(線刻六尊佛)과 만나게 된다.
이 불상은 남산에서는 보기 드물게 선각으로 된
여섯 분의 불상이 두 개의 바위면에 새겨져 있다.
그리고 오른쪽 암벽 위에는 당시 이들 불상을 보호하기 위한
법당(法堂)을 세웠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 바위 위쪽으로는 또 다른 등산로가 개설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이 그대로 밟고 지나간다.
보고 있으려니 웬지 마음이 불편해진다.
앞쪽 바위면 가운데에는 본존이 서고 좌우의 보살은 꿇어앉은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본존은 연꽃 위에 서서 왼손은 아래에, 오른손은 위에서 서로 마주보게 하고
두광만 조각되어 있다.
그 좌우의 보살상은 웃옷을 벗고 한쪽 무릎을 세운 모습을 하였다.
손에는 꽃 쟁반을 받쳐들고 있는데, 두광만 조각되었으며 목에는
구슬 2개를 꿰어 만든 목걸이를 하였다.
이를 아미타삼존이라고 한다.
안쪽 바위면 가운데에는 본존이 오른 어깨에만 법의를 걸치고
연꽃 대좌(臺座)에 앉아 있다.
머리 둘레에 두광(頭光)만 새기고 몸 둘레의 신광(身光)은
새기지 않았으며, 왼손은 무릎에 얹고 오른손은 들어올린 모습이다.
그 좌우에는 연꽃 대좌에 두광만 조각되고, 방울 3개를 꿰어 만든
목걸이를 한 보살 두 분이 서 있다.
보통 이 세 분을 석가삼존이라 부른다.
누군가의 소망은 향불이 되어 피어 오르고...
산길을 밟아 오르면서 신라시대의 불교유적지를 찾아
하나하나 대면해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번에는 보물 제666호인삼릉계석불좌상(石佛坐像)이다.
남산의 삼릉계곡 중부능선쯤에 자리하고 있는 이 불상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맺고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한 석불좌상이다.
불상은 불두와 불신을 따로 제작하여 결합하였다.
이 불상의 상호(相好)는 파손이 심했기 때문에 뺨과 코, 입 등 대부분을 복원하였다.
불상의 몸은 당당하면서도 안정감 있는 신체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가사(袈裟)는 왼쪽 어깨에만 두르고 오른쪽 어깨는 노출된
편단우견(偏袒右肩)식으로 걸쳤는데, 이 가사는 얇게 몸에 밀착하여
신체의 윤곽 등이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정강이에서 발목으로 옷주름이 비스듬히 흐르고 있다.
광배는 간결하면서도 섬세하게 새겨진 화염문(火焰紋)과 당초문(唐草紋)
등으로 보아 우수한 조형성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연화좌(蓮花座)는 상대(上臺)에 앙련(仰蓮)을 3단으로 새겼는데,
꽃잎 안에 다시 꽃잎을 새겼다.
팔각의 중대(中臺)에는 면마다 안상(眼象)을 두었으나, 하대(下臺)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이 불상은 풍만하면서 당당하고 안정감 있는 신체 표현, 대좌와 광배의
간결하면서도 섬세한 조각 수법, 몸에 밀착시켜 입은 얇은 가사,
발목으로 흐르는 옷주름 등으로 보아 삭굴암 본존불상에서 완성된
통일신라시대 조각의 양식과 수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