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광역시 동구 신무동 팔공산에 위치한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도량인 부인사.
요사채 앞마당의 모습으로, 왼쪽에는 부인사 삼층석탑 서탑, 오른쪽은 동탑,
그리고 그 사이에는 석등이 두 탑과 삼각을 이루며 서 있다.
팔공산 부인사(夫人寺 · 符仁寺 · 夫仁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로, 민족의 보물인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을 봉안했던 대가람이며, 창건연대와 창건자는
알지 못하나 7세기 중반 경 신라 27대 선덕여왕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도 그럴것이 지난 100여년동안 신라 선덕여왕을 기려왔으며, 지금도 해마다
음력 3월 보름이면 선덕대왕 숭모제를 봉행한다.
부인사는 958년에 세워진 '옥룡사 동진대사 보운비(玉龍寺 洞眞大師 寶雲碑)'에는
'부인산사(夫仁山寺)'로 표기되어 있고, 고려시대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1241)'과 '진각국사(眞覺國師) 비문(1382)'에는 '符仁寺'로 표기되어 있으며,
조선시대 15세기의 기록 중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1453), 고려사(高麗史, 1454),
그리고 '삼봉집(三峰集, 1486)에도 '符仁寺'로 표기되어 있다.
하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1530)과 1920년대 이후의
'대구부읍지(大丘府邑誌)에는 '夫人寺'로 표기되어 있는데, 여기서 '부인'이란
신라시대에 왕비를 부인이라 일컬은 데에서 온 것이고 그 주인공은 선덕여왕으로 보고 있다.
또한 '명부전이건기(冥府殿移建記, 1788), 조선총독부 사찰령(寺刹領) 동화사조
(桐華寺條, 1911) 자료와 '백불암선생(1705~1786) 언행록(1999)에는 '夫仁寺'로
표기되어 전해지고 있다.
고려시대인 1011년부터 1078년까지 각인되어 부인사에서 봉안되어 있던
초조대장경은 해인사의 팔만대장경보다 200여년이나 앞섰으나
안타깝게도 1232년 몽고병의 제2차 침입 때 병화로 소실되었다.
현재의 부인사는 대웅전, 일화선원을 중심으로 하는 수행공간인 '부인사'와
초조대장경 유허지로 비정되는 역사공간인 '부인사지(址)로 나누어져 보존되고 있다.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7호인 부인사 서탑(西塔).
원래 심하게 파손되어 있던 높이 3.5m의 동서 쌍탑인데
1964년 서탑이 복원되었다.
2층 기단에 삼층을 이루는 일반적인 양식을 취하고 있고,
아래층 기단은 네 개의 돌로 짜 맞추어졌으며, 위층 기단을
받치기 위한 괴임돌 2단을 조각하여 놓았다.
아래층 기단의 바닥돌에는 두 개의 버팀 기둥무늬와 모서리
기둥무늬를 새겼고 위층 기단의 바닥돌에는 버팀 기둥 1개와
모서리 기둥으로 되어 있다.
또한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기 한 덩어리 돌을 깎아 쌓아
올렸으며 몸돌의 경우 모서리 기둥을 조각하여 드러내고
윗면에는 몸돌을 받치는 괴임돌 1단이 드러나 있다.
지붕돌은 5단씩의 층급받침을 두었다.
그러나 꼭대기를 장식하기 위한 부재들은 모두 없어지고
네모난 지붕 모양의 노반만 남아 있다.
부인사 석등(石燈).
석등은 중생의 마음에 불력을 밝히기 위한 상징적인 것으로
석탑 앞에 설치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 석등은 1964년 7월 부인사 쌍탑을 복원하면서 흩어져 있던
석등 조각들을 모아 지금 자리에 복원한 것이다.
석등의 겉모습은 네모난 바닥돌 위에 3단의 받침을 두어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과 지붕돌을 올린 8각 석등이다.
받침은 가운데 기둥을 사이에 두고 아래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위에는 솟은 연꽃무늬를 표현하였다.
지붕돌은 처마가 길며 각 귀퉁이는 들려 있으며, 꼭대기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둥근 받침만 남아 있다.
석등 전체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고 섬세하여
통일신라시대의 뛰어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요사채 앞마당의 석등 앞에는 배례석(拜禮石)이 놓여 있다.
윗면에는 사찰을 상징하는 연꽃이 양각되어 있고
옆면에는 24장의 연잎이 사방을 돌아가며 새겨져 있다.
대웅전(大雄殿)과 그 우측으로 명부전과 묘심원(妙心院).
불교가 흥성하였던 신라와 고려 때의 부인사는 39개의 부속암자를
관장하였고 2천여 명의 승려가 수도하였으며 전국에서 유일하게
승려들간의 거래가 이루어지던 승시장(僧市場)이 서기도 했다.
현재의 건물은 원래의 위치에서 서북쪽으로 약 400m에 위치한 암자터에다
1930년대 초에 비구니 허상득(許相得)이 중창한 것이다.
당우에는 석가모니불상과 아미타불상, 관세음보살상을 안치한 대웅전과
선덕여왕의 영정을 모신 선덕묘, 그리고 2동의 요사채가 있다.
종각인 현음각(玄音閣).
문화재로는 쌍탑을 비롯하여 신라시대의 당간지주, 석등,
석등대석(石燈臺石), 마애여래좌상, 배례석 등이 있다.
국내외 비구니 선방 가운데 으뜸이 되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은 일화선원(一花禪院).
뒷 건물은 영산전(靈山殿)이다.
산신각(山神閣).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2호인 명부전(冥府殿).
명부전은 원래 부인사의 중심전각이었던 대웅전 건물이었는데
지금의 대웅전을 새로 세운 이후에는 한쪽으로 옮겨
지장보살을 모시고 명부전으로 부른다.
명부전 앞에는 화창(火窓) 두 개를 하나로 합쳐놓은 듯한
특이한 모양의 석등이 있다.
일명암지(逸名庵址) 석등으로 현재의 부인사에서 동남쪽으로
200m 거리에 있는 작은 암자터에 흩어져 있던 석등 조각들을
모아 복원한 것이다.
고려 전기의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보기드믄 형태인데
넓은 면에는 2개의 창을 뚫었고 좁은 면은 1개의 창을 뚫어
정면에서 보면 화창이 두 개이나 옆면에서 보면 하나의 화창만 보여
마치 두 개의 화사석을 합쳐 놓은 것 같은 형태이다.
화사석은 8각이라기보다 거의 4각에 가까워서 마치 직사각형의
네 모서리를 반듯이 자른 모양이다.
상륜은 화사석과 함께 새로 보완된 것이다.
오랜 연륜을 가진 부인사라고는 하지만,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이 1959년에 중창된 명부전일 정도로
대부분의 전각들은 근래에 복원되었다
따라서 아쉽게도 세월의 깊은 맛은 찾아볼 수가 없다.
필리핀의 식민역사가 시작된 뼈 아픈 곳에 세워진 혈맹기념비(Blood Compact marker).
국왕 대신의 자격으로 온 스페인 초대 총독인 미구엘 로페즈 드
레가스피(Miguel lopez de Legazipi) 장군과 시카투나(Datu Sikatuna)
보홀 족장이 1565년 평화우호협정을 맺게 된다.
이 협정은 동양인과 서양인 사이에 이루어진 최초의 국제조약으로,
필리핀의 전통에 따라 와인에 자신의 피를 섞어 마셨다고 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이 바로 이 혈맹기념비이다.
레가스피 장군은 지금의 멕시코인 누에바에스파냐에서 지방 정부의
서기관으로 근무하다가 필리핀에 대한 스페인의 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5척의 선박을 이끌고 멕시코의 아카풀코를 출발해 필리핀 남부의
세부에 도착한 후, 1566년 최초의 스페인 정착지를 건설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