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속리산에 위치한 미륵신앙(彌勒信仰)의 요람으로 불리우는 법주사.
먼저 일주문과 수정교를 지나고 나면, 가람에 들어서는 첫 입구라 할 금강문(金剛門)을 만나게 된다.
좌우로는 돌담으로 회랑을 형성하고 있으며, 인왕상을 봉안하기 때문에
인왕문(仁王門)이라고도 부른다.
법주사는 553년 (신라 진흥왕 14)때 의신(義信)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성덕왕 때 중수를 하였는데, 현재 남아 있는 석물(石物)은 모두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중수를 하였으며, 현존하는 목조건물은 모두 조선 후기의 것이다.
먼저 일주문과 수정교를 지나고 나면, 가람에 들어서는 첫 입구라 할 금강문(金剛門)을 만나게 된다.
좌우로는 돌담으로 회랑을 형성하고 있으며, 인왕상을 봉안하기 때문에
인왕문(仁王門)이라고도 부른다.
법주사는 553년 (신라 진흥왕 14)때 의신(義信)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성덕왕 때 중수를 하였는데, 현재 남아 있는 석물(石物)은 모두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중수를 하였으며, 현존하는 목조건물은 모두 조선 후기의 것이다.
이곳 금강문 안에는 1974년에 조성한 금강역사 2위와, 사자를 탄 문수보살,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을 함께 봉안하였다.
대체로 문 양쪽에는 금강저(金剛杵)나 칼과 창을 손에 들고 있는 금강역사가 모셔진다.
그래서 왼쪽에는 밀적금강(蜜跡金剛), 오른쪽에는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을 모시는데,
혹 입을 벌리고 있는 상을 아금강역사, 입을 다물고 있는 상을 우금강역사라 부르기도 한다.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을 함께 봉안하였다.
대체로 문 양쪽에는 금강저(金剛杵)나 칼과 창을 손에 들고 있는 금강역사가 모셔진다.
그래서 왼쪽에는 밀적금강(蜜跡金剛), 오른쪽에는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을 모시는데,
혹 입을 벌리고 있는 상을 아금강역사, 입을 다물고 있는 상을 우금강역사라 부르기도 한다.
금강문을 지나자 하늘을 향해 뻗은 두 그루의 나무가 시원스럽게 맞아준다.
바로 뒤의 건물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되었으며 사천왕상을 봉안한
사천왕문으로, 국내의 천왕문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고 한다.
지붕 위쪽으로는 바로 뒤에 위치한 팔상전의 꼭대기 층이 넘겨다 보인다.
바로 뒤의 건물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되었으며 사천왕상을 봉안한
사천왕문으로, 국내의 천왕문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고 한다.
지붕 위쪽으로는 바로 뒤에 위치한 팔상전의 꼭대기 층이 넘겨다 보인다.
팔상전. 국보 제55호로 지정되었으며 5층으로 이루어졌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목조탑이며 탑 중에서도 가장 높은 건축물이기도 하다.
지금의 건물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짓고 1968년에 해체, 수리한 것인데,
안쪽 벽면에는 부처의 일생을 8장면으로 구분하여 그린
팔상도(八相圖)가 그려져 있어 팔상전이라 이름 붙였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목조탑이며 탑 중에서도 가장 높은 건축물이기도 하다.
지금의 건물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짓고 1968년에 해체, 수리한 것인데,
안쪽 벽면에는 부처의 일생을 8장면으로 구분하여 그린
팔상도(八相圖)가 그려져 있어 팔상전이라 이름 붙였다.
높이 33m로, 동양 최대 규모의 미륵불 입상인 금동미륵대불(청동미륵대불).
신라 혜공왕 때인 776년, 진표율사가 금동미륵대불을 처음 지었다고 하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 몰수되어 1964년에 시멘트로 다시 불사를 했다.
1990년에는 붕괴직전의 시멘트 대불이 청동대불로 다시 태어났으며,
2000년 들어서는 원래의 제 모습을 찾아 주고자 금동미륵불로 복원공사를 했다.
당시, 3mm 두께로 황금을 입히는데 모두 80kg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신라 혜공왕 때인 776년, 진표율사가 금동미륵대불을 처음 지었다고 하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 몰수되어 1964년에 시멘트로 다시 불사를 했다.
1990년에는 붕괴직전의 시멘트 대불이 청동대불로 다시 태어났으며,
2000년 들어서는 원래의 제 모습을 찾아 주고자 금동미륵불로 복원공사를 했다.
당시, 3mm 두께로 황금을 입히는데 모두 80kg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대웅보전에서 팔상전에 이르는 앞마당에는 신라시대의 걸작이라 할
쌍사자석등(雙獅子石燈)이 서 있다.
국보 제5호로, 높이 3.3m에 이르는 팔각석등이다.
신라시대의 석등은 대게 하대석과 중대석, 상대석으로 구성되는데,
이 중대석을 두 마리의 사자가 앞발을 높이 치켜들어 상대석을 떠받치는
독특한 양식으로 되어있다.
쌍사자석등(雙獅子石燈)이 서 있다.
국보 제5호로, 높이 3.3m에 이르는 팔각석등이다.
신라시대의 석등은 대게 하대석과 중대석, 상대석으로 구성되는데,
이 중대석을 두 마리의 사자가 앞발을 높이 치켜들어 상대석을 떠받치는
독특한 양식으로 되어있다.
보물 제915호로 지정된 대웅보전.
창건무렵인 신라 때에는 미륵장륙상을 모신 용화보전이 미륵신앙 도량인
법주사의 중심역할을 했을 것이기 때문에, 대웅보전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지금의 건물은 고려 중기에 처음 세운 것으로 보이며, 1624년(인조 2)에 중건하였고
이후 잦은 중수를 거듭하였지만, 조선 중기의 양식을 잘 갖추고 있어 보물로 지정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벽암대사가 중창한 이후 400년 만인 2005년,
4년간의 공사끝에 옛모습 그대로 복원한 것이다.
대웅보전 앞에 보이는 석탑은 보물 제15호로 지정된 사천왕석등(四天王石燈)으로,
상대석에 사천왕이 새겨져 있어 그렇게 부른다.
창건무렵인 신라 때에는 미륵장륙상을 모신 용화보전이 미륵신앙 도량인
법주사의 중심역할을 했을 것이기 때문에, 대웅보전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지금의 건물은 고려 중기에 처음 세운 것으로 보이며, 1624년(인조 2)에 중건하였고
이후 잦은 중수를 거듭하였지만, 조선 중기의 양식을 잘 갖추고 있어 보물로 지정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벽암대사가 중창한 이후 400년 만인 2005년,
4년간의 공사끝에 옛모습 그대로 복원한 것이다.
대웅보전 앞에 보이는 석탑은 보물 제15호로 지정된 사천왕석등(四天王石燈)으로,
상대석에 사천왕이 새겨져 있어 그렇게 부른다.
두툼한 판석과 커다란 그릇을 머리에 이고 있는 모습의 희견보살상(喜見菩薩像).
우리나라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보살상으로
전체 높이가 2m에 이르며, 보물 제1417호로 지정되었다.
전체적으로 선이 굵고 대담한 기법이 돋보이는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다.
희견보살은 법화경을 공양하기 위해 스스로 몸과 팔을 불태워
소신(燒身)공양을 올렸다는 보살이다.
그러나 이 보살상의 주인공을 석가여래의 으뜸가는 제자였던
가섭존자(迦葉尊者)에 가깝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가섭존자는 석가가 입멸한 후,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열반에 들지말고
세상에 남아, 가사와 발우를 전하라는 석가여래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경설을 바탕으로
이를 형상화 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우리나라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보살상으로
전체 높이가 2m에 이르며, 보물 제1417호로 지정되었다.
전체적으로 선이 굵고 대담한 기법이 돋보이는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다.
희견보살은 법화경을 공양하기 위해 스스로 몸과 팔을 불태워
소신(燒身)공양을 올렸다는 보살이다.
그러나 이 보살상의 주인공을 석가여래의 으뜸가는 제자였던
가섭존자(迦葉尊者)에 가깝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가섭존자는 석가가 입멸한 후,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열반에 들지말고
세상에 남아, 가사와 발우를 전하라는 석가여래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경설을 바탕으로
이를 형상화 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능인전 옆의 추래암(墜來岩) 암벽에 새겨진, 전체 높이 5m의
마애여래의상(磨崖如來倚像).
고려시대의 마애불상으로서 보물 제216호로 지정되었다.
의상(倚像)이란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마애불로서 이러한 예는 경주 남산의 삼화령 미륵불이 유일한 작품인데,
그 양식상의 특징과 연관지어 미륵불로 추정하고 있다.
마애여래의상(磨崖如來倚像).
고려시대의 마애불상으로서 보물 제216호로 지정되었다.
의상(倚像)이란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마애불로서 이러한 예는 경주 남산의 삼화령 미륵불이 유일한 작품인데,
그 양식상의 특징과 연관지어 미륵불로 추정하고 있다.
오른편으로 높이 솟은 것은 당간지주로, 고려 초인 1006년(목종 7)에 조성되었는데
당시에는 높이가 16m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뒤 조선 후기인 1866년(고종 3)에는 대원군의 명령으로 국가에서
당백전(當百錢)을 주조하면서 사찰의 많은 금속물들이 징발 당했는데,
그 과정에서 당시 용화전의 미륵장륙상과 이 철당간이 사라졌다.
이후, 1910년경에는 22m 높이의 철당간을 확대, 복원하였고, 1972년에 보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당시에는 높이가 16m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뒤 조선 후기인 1866년(고종 3)에는 대원군의 명령으로 국가에서
당백전(當百錢)을 주조하면서 사찰의 많은 금속물들이 징발 당했는데,
그 과정에서 당시 용화전의 미륵장륙상과 이 철당간이 사라졌다.
이후, 1910년경에는 22m 높이의 철당간을 확대, 복원하였고, 1972년에 보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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