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의 정문으로 1412(태종12년)에 처음 지어졌다.
지금의 돈화문은 1609년(광해군 원년)에 다시 지은 것으로
현재 남아있는 궁궐 정문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敦化는 '중용'의 대덕돈화(大德敦化)에서 가져온 것으로
'(큰 덕은 백성 등을) 가르치어 감화시킴을 도탑게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금천교(錦川橋)와 진선문(進善門).
궁궐의 초입부에 놓인 돌다리로 두 개의 홍예를 내어 풍수지리상
길한 명당수를 흐르게 한다.
이 다리 아래에는 궁궐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해태상과 거북상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진선문은 창덕궁의 중문으로 태종 때 신문고를 설치해 두었던 곳이다.
창덕궁은...
접견 등 국가의 중요한 행사가 행해졌던 인정전(仁政殿).
국보 제225호로 궁궐의 대표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임금을 상징하는 봉황이 새겨져 있다.
조선의 궁궐 정전에는 공통적으로 정면에 임금의 용상(龍床)과 나무로 만든
곡병(曲屛)을 두고 뒤에는 일월오악병(日月五岳屛)을 둘렀는데
일월오악도에는 해와 달, 다섯개의 산봉우리, 폭포, 파도, 소나무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천장에는 봉황 한 쌍이 새겨져 있다.
1908년 전기시설이 가설되면서 이곳 인정전에 전등이 설치되었다.
창덕궁 인정전의 지붕에는 9개의 잡상(雜像, 어처구니)이 놓여있다.
대청마루를 가운데 두고 왕비의 침전인 서온돌과 임금의 침전인 동온돌로 나뉘어진다.
이 건물에는 용마루가 없는데 이는 용으로 비유되는 임금이 잠자는 곳에
또 다른 용을 나타내는 용마루가 있으면 두 용이 충돌한다 하여 설치하지 않았다고 한다.
1917년 이 건물이 불에 타자 1920년 경복궁의 교태전(交泰殿)을 옮겨다 지었으며,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대조전에 비치되어 있으며 길이 224cm, 폭 154cm, 높이 113.5cm의 크기이다.
1988년경 한차례 일부 수리가 있었으나 매트리스 중앙부가 함몰되고
덮개천도 부분적으로 훼손되어 2008년부터 2009년까지 수리 · 복원하였다.
조성하고 괴석을 설치하였다.
좌측 구조물은 벽돌로 쌓아 만든 굴뚝으로 가운데에는
사슴과 학을 조각해 장식하였으며, 우측 계단과 연결된 문은
북쪽 후원으로 통하는 출입문이다.
왕세자가 교육을 받거나 책을 읽던 곳으로 일제강점기에는 잠시
왕가의 내의원으로 쓰이기도 했던 성정각(誠正閣).
지금은 후원으로 가는 길에 조선시대에는 중회당이 있었으며,
이 일대는 왕세자의 거처인 동궁이었다.
또한 순조의 장남인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할 때 주로 기거하면서
정궁으로 쓰던 곳이기도 하다.
성정각의 동쪽 누각에는 동쪽을 향해 희우루(喜雨樓),
남쪽을 향해 보춘정(報春亭)이란 편액이 각각 걸려있다.
희우루는 '가뭄끝에 단비가 내려 기뻐하다'라는 뜻으로
1777년(정조1년), 매우 가물었을 때 이 누각을 중건하기 시작하자마자
비가 내렸고, 또 얼마간 가뭄이 들었다가 누각이 완성되어 임금이
행차하자 또 다시 비가 내렸다고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보춘정은 '봄을 알린다'는 뜻으로 봄은 동쪽을 의미하며
태양이 뜨는 방향, 즉 왕세자를 일컫는다.
이 외에도 창덕궁은 비원(秘苑)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후원(後苑)과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황실 가족이 마지막까지 머무르던 낙선재가 유명하다.
참고/ 네이버백과사전, 창덕궁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