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릉, 선정릉, 선릉공원 등으로도 불리우는이곳에는 조선 제9대 성종(成宗)과
계비(繼妃)인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尹氏)를 모신 선릉(宣陵)과
제11대 중종(中宗)을 모신 정릉(靖陵)이 있다.
선릉은 조선 성종의 능과 선릉 뒤편에 위치한 정현왕후 윤씨의 능을 합친 이름이다.
조선왕릉인 선릉, 정릉은 사적 제199호이면서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세계유산 조선왕릉은 왕과 왕비의 능 40기에 이른다.
선릉과 조금 비켜서 있는 정자각 앞으로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홍살문이 세워져 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丁字閣)까지 이어지는 길을 참도(參道)라 하는데,
길 한쪽은 다른쪽보다 조금 낮다.
왼편 높은 길은 신도(神道)라 해서 혼령이 다니는 신성한 길이고,
다른 길은 어도(御道)라 하여 왕이 다니는 길이라 한다.
중앙의 정자각 오른편으로 비각과 수복방(守僕房)이 보인다.
수복방은 제사 그릇을 보관하고 능을 지키는 관리인 수릉관(守陵官)
또는 청소일을 하던 관노비인 수복(守僕)이 지내던 집이다.
정자각 오른편에 위치해 있는 비각으로
능 주인의 업적을 기록한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져 있다.
비각 안의 선릉비 전면에는'朝鮮國 成宗大王 宣陵
貞顯王后 祔左岡 [조선국 성종대왕 선릉
정현왕후 부좌강(좌측 언덕에 모심)]이라 적혀있다
선릉. 봄을 맞아 잔디를 손질하고 있다.
조선 9대 왕인 성종은 세조(世祖)의 손자이자 덕종(德宗, 추존)의 둘째아들로,
세조 2년(1457)에 태어나 13세(1469)에 왕위에 올랐다.
재위 25년간 학문을 장려하고 제도를 정비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으며,
16남, 12녀를 두고 1494년 창덕궁에서 38세(1494)로 돌아가셨다.
성종은 경국대전을 반포하여 조선의 법전체제를 완성하였으며,
조세제도로는 관수 관급제(官收 官給制)를 실시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줄였다.
홍문관을 설치하고 동국여지승람, 삼국사절요, 동국통감, 악학궤범,
동문선 등 많은 서적을 편찬하기도 했다.
또한 국조오례의를 만들어 유교예법을 확립하였고
창경궁을 창건하였으며 만주족을 정벌하기도 했다.
선릉에서 내려다본 모습이다.
빌딩 숲 속, 도심과 격리된 또 다른 세상을 확인할 수 있다.
병풍석과 상석이 없고 난간석만 있는 정현왕후릉.
봉분 좌우에 세우는 기둥인 망주석(望柱石) 뒤쪽으로 석양(石羊)과 석호(石虎)가 서 있다.
석양은 죽은 이의 명복을 빌며 땅 속의 사악한 것을 물리친다는 뜻으로,
석호는 석양과 함께 능의 주인이 쉬는 곳인 능침(陵寢)을 수호하는 수호신의 역할을 한다.
정현왕후는 우의정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 윤호(尹壕)의 딸로
성종 11년(1480)에 왕비가 되었고, 중종 25년(1530)에 69세로 돌아가셨다.
정현왕후가 낳은 진성대군은 조선 제11대 왕인 중종이다.
능묘를 수호하는 능묘조각의 하나인 문석인(文石人)과 무석인(武石人)
각 한쌍이 마주보고 있는 가운데 그 뒤로 석마(石馬)가 지키고 서 있다.
그 외에 혼유석, 상석, 향로석 등 기타 석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봄날, 이곳 공원 안에는 싱그러움으로 가득하다.
수목이 울창해 시민들의 산책 및 휴식코스로
사랑받고 있기도 하다.
산책길을 걷다보면 만나게 되는 정릉(靖陵).
능 앞으로는 왕과 왕비의 신좌(神坐)를 모시고 각종 제사를 지내는
정자각(丁字閣)과 홍살문이 호위하듯 서 있다.
중종은 성종의 둘째 아들로 성종 19년(1488)에 태어나 1506년에
왕위에 올랐고, 재위 39년(1544) 57세로 돌아가셨다.
재위기간 중에는 현량과를 설치하였고 향약을 실시하여 향촌자치를
시도하였으며, 서원이 설립되기 시작하여 사림의 기틀이 되었다.
또한 주자도감을 두어 신증동국여지승람, 소학, 삼강행실, 이륜행실,
속동문선을 편찬하는 등 활자를 개량하여 많은 책을 펴냈으며
비변사를 설치하여 국방체제를 정비하기도 했다.
높이 위치해 있는 관계로 가까이에서는 잘 보이지 않아
멀리서 당겨본 정릉의 모습.
중종에게는 세 명의 정식 부인이 있었다.
첫번째 부인인 단경왕후 신씨는 고모가 연산군의 비 신씨라는 이유로
중종반정 이후에 반정세력에 의해 축출되었다.
두 번째 부인인 장경왕후 윤씨는 세자(훗날 인종)를 낳고 산후병으로
생을 마감하였으며, 세 번째 부인이 된 문정왕후 윤씨는 자신의 아들이
인종의 뒤를 이어 명종이 되었을 때 8년 동안이나 수렴청정을 행사하며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기도 했다.
원래 중종의 능도 지금의 고양시에 있는 희릉(禧陵)에 있었다.
희릉은 두 번째 부인인 장경왕후의 능으로 중종이 돌아가시면서 같이
장사 지내어 정릉으로 바뀌어 불리었지만, 문정왕후가 자신이 죽은 뒤
같이 묻히기를 희망하여 정릉은 지금의 선릉 옆으로 이장하게 되었고,
장경왕후의 능도 희릉으로 다시 고쳐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정릉은 장마철이 되면 정자각까지 물이 차는 바람에 명당자리가
아니라는 이유로 정작 문정왕후 자신은 지금의 태릉에 자신의 아들
명종과 함께 묻히게 되었다.
제관들이 제사를 준비하고 왕의 휴식을 위해 마련된 재실(齋室).
능을 관리하는 능참봉(陵參奉)의 집무실로 사용하였다.
원래는 성종대왕능과 중종대왕능에 각각의 재실이 있었으나
대한제국 시절에 2개소의 재실이 현재의 재실로 합쳐 지어졌다.
이곳에는 신라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 제53대 신덕왕(神德王),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무덤이 한 곳에 모여있어 삼릉이라 부른다.
아달라왕(재위 154~184)은 백제가 침입하여 백성을 잡아가자
친히 군사를 출동시켜 전장에 나아갔다.
그러나 백제가 화친을 요청하자 포로들을 석방하였다.
왜(倭)에서는 사신을 보내왔다.
능의 크기는 밑둘레 58m, 높이 5.4m, 지름 18m이다.
효공왕(孝恭王)이 자손이 없이 죽자 백성들이 헌강왕(憲康王)의 사위인
신덕왕(재위 912~917, 박경휘)을 추대하였다.
견훤(甄萱)과 궁예(弓裔)의 침입이 있어 싸움에 진력하였다.
능의 크기는 밑둘레 61m, 높이 5.8m, 지름 18m이다.
두 차례에 걸쳐 도굴을 당하여 1953년과 1963년에 내부가 조사되었다.
조사결과 매장 주체는 깬 돌로 쌓은 횡혈식 돌방(橫穴式 石室)으로 밝혀졌다.
경명왕(재위 917~924, 박승영)은 신덕왕의 아들로 고려 태조 왕건(王建)과
손잡고 견훤의 대야성(大耶城) 공격을 물리쳤다.
능의 크기는 밑둘레 50m, 높이 4.5m, 지름 16m이다.
반드시 가보리라 했지만 꽤 오랜 기간동안 미루기만 했던 곳, 곳곳에 불상이 산재해 있어 노천박물관으로도 불린다는 그곳, 경주 남산에 다녀왔다.
경주 남산은 1968년 지리산에 이어 두번째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다른 곳과는 달리 유일한 사적형 국립공원이다.
2000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런만큼 남산을 오르는 여러 코스 중 가장 볼 것이 많다는
서남산 제1코스를 찾았다. 삼릉에서 출발, 상선암, 바둑바위를 거쳐 금오봉 정상에 올랐다가 용장사지를 지나 용장골로 하산하는 코스다.
■ 경주 남산 등반코스
▶ 1코스 (서남산)
삼릉에서 용장까지 / 총6km, 6:30소요
이 길은 남산 골짜기 가운데 가장 많은 유적이 있어 남산의 불상을 시대적 미술사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산행의 출발점에 위치한 삼릉 주변으로는 소나무가 빼꼭하게
들어차 있어 많은 사진가들의 사랑을 받기도 한다.
이곳 남산에서 현재까지 발견된 절터는 112곳, 탑은 61기이고,
불상은 80체를 헤아린다.
불상 중에는 입체로 된 것이 29체이고 바위면에 새긴 마애불상은 51체이다.
그러니 노천박물관이라 불리워도 전혀 이상할 것은 없다.
삼릉 바로 우측편에 위치한 사적 제222호인 경애왕릉(景哀王陵).
이 능은 신라 제55대 경애왕(景哀王, 재위 924~927)을 모신 곳이다.
밑둘레 43m, 지름 12m, 높이 4.2m 규모로 흙을 둥글게 쌓은 형태이다.
남산의 북서쪽 구릉의 끝이자 인천(麟川, 기린내)의 동안(東岸)에 위치하고 있다.
왕은 제53대 신덕왕(神德王)의 아들로 927년 포석정(鮑石亭)에서
연회를 베풀고 있을 때 후백제 견훤(甄萱)의 습격을 받아 생을 마쳤다.
삼릉을 지나면서 바로 산행이 시작된다.
산책을 하듯 쉬엄쉬엄 오르니 이내 여래상 하나가 나타난다.
바로 삼릉계 석조여래좌상(三陵溪 石造如來坐像)이다.
계곡 어귀에 3개의 능이 있어 삼릉계라 하는데 계곡이 깊고
여름에도 찬 기운이 돌아 냉골(冷谷)이라고 부른다.
이 계곡에는 11개소의 절터와 15구의 불상이 산재하여 남산에서 가장 많은
유적이 있으며 금오봉 정상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찾는 사람들이 많다.
이 석조여래좌상은 1964년 8월 동국대학교 학생들에 의해
약 30m 남쪽 땅 속에서 머리(佛頭)가 없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특히 이 부처님은 왼쪽 어깨에서 흘러내려 매듭진 가사끈과 아래 옷(裙衣)을
동여맨 끈, 그리고 무릎 아래로 드리워진 두 줄의 매듭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용장사 삼륜대좌불과 함께 복식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불상은 손과 머리가 파손되었으나 몸체가 풍만하고 옷주름이 유려하여
통일신라시대의 우수한 조각품으로 평가된다.
왼쪽 산등성이 바위 벼랑에는 관세음보살상이 새겨져 있고 위쪽으로 오르다 보면
선각의 여섯 부처님과 마애여래좌상, 석가여래좌상, 그리고 남산에서
좌불로는 가장 큰 상선암 마애여래좌상 등 귀중한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다.
석조여래좌상 바로 왼쪽길로 접어드니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磨崖觀音菩薩像)이 반겨주고...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호이다.
이 불상은 남산의 삼릉계곡에 있으며 돌기둥 같은 암벽에
돋을새김되어 있다.
풍만한 얼굴에 머리 위에는 삼면보관(寶冠)을 썼는데,
앞에 작은 불상이 조각되어 있어 이 불상이 관음보살임을 알 수 있다.
입술에는 붉은색이 아직 남아 있으며 연꽃으로 된 대좌 위에 서 있는데,
목걸이를 하고 허리 아래로 흘러내린 옷자락은 양 다리에 각각
U자 모양으로 드리우고 있다.
왼손은 정병(보병)을 들고, 오른손은 가슴에 들어올려
손가락을 구부려 밖으로 향하고 있다.
갔던 길을 되돌아와 원래 오르던 길로 계속 진행한다.
얼마못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호인
삼릉계곡 선각육존불(線刻六尊佛)과 만나게 된다.
이 불상은 남산에서는 보기 드물게 선각으로 된
여섯 분의 불상이 두 개의 바위면에 새겨져 있다.
그리고 오른쪽 암벽 위에는 당시 이들 불상을 보호하기 위한
법당(法堂)을 세웠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 바위 위쪽으로는 또 다른 등산로가 개설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이 그대로 밟고 지나간다.
보고 있으려니 웬지 마음이 불편해진다.
앞쪽 바위면 가운데에는 본존이 서고 좌우의 보살은 꿇어앉은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본존은 연꽃 위에 서서 왼손은 아래에, 오른손은 위에서 서로 마주보게 하고
두광만 조각되어 있다.
그 좌우의 보살상은 웃옷을 벗고 한쪽 무릎을 세운 모습을 하였다.
손에는 꽃 쟁반을 받쳐들고 있는데, 두광만 조각되었으며 목에는
구슬 2개를 꿰어 만든 목걸이를 하였다.
이를 아미타삼존이라고 한다.
안쪽 바위면 가운데에는 본존이 오른 어깨에만 법의를 걸치고
연꽃 대좌(臺座)에 앉아 있다.
머리 둘레에 두광(頭光)만 새기고 몸 둘레의 신광(身光)은
새기지 않았으며, 왼손은 무릎에 얹고 오른손은 들어올린 모습이다.
그 좌우에는 연꽃 대좌에 두광만 조각되고, 방울 3개를 꿰어 만든
목걸이를 한 보살 두 분이 서 있다.
보통 이 세 분을 석가삼존이라 부른다.
누군가의 소망은 향불이 되어 피어 오르고...
산길을 밟아 오르면서 신라시대의 불교유적지를 찾아
하나하나 대면해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번에는 보물 제666호인삼릉계석불좌상(石佛坐像)이다.
남산의 삼릉계곡 중부능선쯤에 자리하고 있는 이 불상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맺고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한 석불좌상이다.
불상은 불두와 불신을 따로 제작하여 결합하였다.
이 불상의 상호(相好)는 파손이 심했기 때문에 뺨과 코, 입 등 대부분을 복원하였다.
불상의 몸은 당당하면서도 안정감 있는 신체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가사(袈裟)는 왼쪽 어깨에만 두르고 오른쪽 어깨는 노출된
편단우견(偏袒右肩)식으로 걸쳤는데, 이 가사는 얇게 몸에 밀착하여
신체의 윤곽 등이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정강이에서 발목으로 옷주름이 비스듬히 흐르고 있다.
광배는 간결하면서도 섬세하게 새겨진 화염문(火焰紋)과 당초문(唐草紋)
등으로 보아 우수한 조형성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연화좌(蓮花座)는 상대(上臺)에 앙련(仰蓮)을 3단으로 새겼는데,
꽃잎 안에 다시 꽃잎을 새겼다.
팔각의 중대(中臺)에는 면마다 안상(眼象)을 두었으나, 하대(下臺)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이 불상은 풍만하면서 당당하고 안정감 있는 신체 표현, 대좌와 광배의
간결하면서도 섬세한 조각 수법, 몸에 밀착시켜 입은 얇은 가사,
발목으로 흐르는 옷주름 등으로 보아 삭굴암 본존불상에서 완성된
통일신라시대 조각의 양식과 수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