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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남대학교 내 민속촌으로 들어가는 진입로.

                               길 오른편으로는 구계서원이, 저 멀리로는 의인정사가 눈에 들어온다. 




                               ▶ 관련 / 2014/04/09 - [History] - 영남대학교 민속촌







까치구멍집.


이 집은 영양 남씨들이 모여 살았던 경북 안동시 도목리에서

1975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왔다.

경북 북부지역 산간촌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모습을 한 집으로,

소 마굿간을 비롯한 모든 편의시설을 집안으로 끌어 들이고 있는 것이

이 집의 특징이다.

공간이 닫혀있음으로 해서 비롯되는 오염된 공기는 지붕 양쪽에

공기 배출구를 만들어 뽑아 내었는데, 이 공기 배출구 모양이

까치집처럼 생겼다고 하여 이 집을 까치구멍집이라고 부른다.







                               우거진 송림 속에 위치한 쌍송정.







이곳을 방문한 지난 2014년 11월, 때마침 제례를 올리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영남대 민속촌 내 화산서원에서 봉행된 인동(仁同) 출신  

만회당(晩悔堂) 장경우(張慶遇, 1581~1656)선생의 석채례(釋菜禮) 의식이었다.

석채례란 새로 나는 나물과 생 채소로 스승을 기리는 제사를 올리는 의식을 말한다.







                               화산서당은 만회당 장경우 선생이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효종 2년(1651)에 세운 건물이다.







예복을 갖춰입고 제례에 임하는 참석자들.







머리에 갓과 유건(儒巾)을 쓴 어르신들의 표정이 자못 진지하다.







화산서당은 원래 칠곡군 석적면에 위치했었으나 이곳으로 이건 ·

복원을 완료하고 2009년 11월 4일 준공을 했다.









History




영남대학교 교내에는 민속촌이 자리해 있다.

1975년, 교내부지 2만여 평 위에 조성된 이 민속촌에는 안동수몰지역과

경주, 칠곡에서 옮겨온 옛집들, 그리고 경주 인왕동 고분군 복원지 등이 있다.

이곳에서는 조선시대 여러 계층의 주거문화를 골고루 접해볼 수 있다.







쌍송정(雙松亭).


원래 경북 봉화군 물야면 북지리에 위치해 있던 것을 봉화 금씨

금혜 선생 후손들의 소개로 1975년 7월 이곳으로 옮겼다.

쌍송정은 금혜(1399년~1484년) 선생이 북지리의 본가 옆에 서재로 지은 

별당이다.

선생은 호를 쌍송정이라 하고 이 건물 앞에 용트림하는 소나무 두 그루를

심어 즐겼는데, 쌍송정이라는 건물 이름 역시 이로부터 유래되었다.

현재의 이 건물은 약 300년 전에 다시 세운 것으로 순조(1821년) 때

허물어진 곳을 크게 한번 손질한 후 여러 차례 부분적으로 수리하였다.







일휴당(日休堂).


일휴당 금응협(琴應夾) 선생이 제자를 교육하기 위하여 지은 별당으로,

원래 경북 안동시 예안면 오천동에 위치하였으나 안동댐이 만들어지면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금응협 선생(1526년~1586년)은 쌍송정 금혜 선생의 후손이며 벼슬은

익찬(翊贊)을 지냈고, 퇴계 이황의 문인(文人)으로 오천(烏川) 7군자(君子) 중의 한 사람이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조 정조 11년(1787년)에 다시 고쳐 지은 것이다.

건물 앞면은 툇마루이며 그 뒷편에 대청을 중앙에 두고 양쪽으로 방을 두었으며

팔작지붕을 얹었다.







화산서당(花山書堂).


원래 경상북도 칠곡군 석적면 중리에 소재했으며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20호이다.

화산서당은 조선 효종 2년(1651)에 만회당(晩悔堂) 장경우(張慶遇) 선생이 후진을

양성하기 위하여 석적면 성곡리 화산(花山) 아래에 건립한 서당이다.

그 후 사림(士林)의 공의(公議)에 따라 헌종 6년(1840)에 석적면 중리로 이건되었으며,

철종 4년(1853)에는 묘우(廟宇) 낙성과 더불어 화산서원으로 승원(陞院)되어

만회당의 봉향지소(奉享之所)가 되었다.

그러나 고종 8년(1871)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묘우는 훼철(毁撤)되고

강당만 남게 되면서 화산서원은 다시 화산서당으로 되었다.

1989년 화산서당의 강당과 대문채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20호로 지정되면서 

1990년 한차례 보수하였으나 주변의 개발로 인하여 건물이 점차 쇠락되어 가는 것을 보고

영남대학교가 2009년에 민속촌으로 이 건물들을 이건 복원하여 보존하고 있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서당으로서는 비교적 규모가 큰 건물인데,

평면은 6칸 우물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꾸민 형태이다.

5량가(五樑架)의 팔작 기와집이며, 전체적으로 조선시대 후기 건축양식의 특징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경주 맞배집.


원래 경주시 구황동 황룡사지에 있던 집으로 황룡사지 발굴과 함께

1976년에 현재 위치로 옮겨왔다.

이 집은 一자형 모양을 하고 있는데 왼쪽으로부터 부엌, 안방, 대청, 건너방 순으로 되어 있다.

맞배집의 특징 중 하나는 형식적인 공간나눔을 철저히 줄이고, 작은 공간에서도

여러 가지 기능을 수월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데 있다.

평민들의 가옥이라 할 수 있는 3칸 초가와 그 기본 모양과 기능이 같다고 할 수 있다.







                               놀이마당에는 기다란 그네가 설치되어 방문객들을 즐겁게 한다.







의인정사 담장 밖으로는 벚꽃이 만개해 있고...







의인정사(宜仁精舍).


조선조 성리학의 큰 스승인 퇴계 이황 선생의 후손으로 진보현감을 지낸 

이중철(李中喆)이 1887년에 지은 집으로, 원래 경북 안동시 도산면 의인마을에 위치했었다.

이 집의 택호(宅號)는 진보댁(眞寶宅)이었으나 1976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지면서

이 집에 있었던 의인마을의 이름을 따서 의인정사라 하였다.

이 집은 모두 56칸으로 전형적인 안동 양반집의 하나이다.

안채, 사랑채, 아래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사랑채는 바깥에 개방하여 남성공간의

중심으로 삼고, 안채는 중문으로 막아 여성공간의 중심으로 삼았다.

집 입구 대문 옆에는 행랑채를 세우고, 안채 부엌 뒷편 외진 곳에는

찬모방(饌母房)과 디딜방아간을 두었다.







구계서원(龜溪書院).


원래 경북 안동시 월곡면 미질동에 위치해 있었으나 안동댐이 들어서면서 

1975년에 현재 위치로 옮겨왔다.

구계서원은 고려말 유학의 큰 스승인 역동(易東) 우탁(禹倬) 선생을 모시고 있는 서원이다.

숙종 22년(1696) 도동서원(道東書院)이라는 이름으로 세워졌으며, 숙종 39년(1713)에 

이건하여 구계서원이라 개칭하였다.

고종 8년에 훼철되어 건양 1년(1896)에 복원되었다.







구계서원의 부속 건물인 모현사(慕賢祠).


서원을 옮겨올 당시에는 독역재(讀易齋) 건물밖에 없었으나 2000년 11월 27일 묘우(廟宇)인

모현사(慕賢祠), 모현사의 삼문(三門)인 내삼문(內三門), 동, 서재인 일신재(日新齋)와

시습재(時習齋), 그리고 서원의 대문인 진덕문(進德門)을 지으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참고 / 현장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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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시각으로 바라본 일상속의 사진 나부랭이 / 작품성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저 '시간을 기록한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셔터를 눌러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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