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영령들이 안장되어 있는
국립서울현충원은 한강과 과천 사이 넓은 벌판에 우뚝 솟은
관악산 공작봉의 기슭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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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국군묘지로 창설, 전사 또는 순직군인과 군무원 및 종군자의 영현을 안장.
1965년/ 국립묘지로 승격, 국가원수, 애국지사, 순국선열을 비롯하여 국가유공자,
경찰관, 전투에 참가한 향토예비군 등이 추가.
1996년/ '국립묘지관리소'라는 명칭을 '국립현충원'으로 변경,
2006년/ 국립서울현충원으로 명칭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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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된 안장으로 이곳이 만장되자 1979년 국립대전현충원을
창설하여 그곳에 안장하고 있다.
그 뒤로 꽃시계와 현충문, 그리고 현충탑.
국립서울현충원은 전체면적이 143만㎡에 이르며
경내에는 현충관을 비롯하여 무용용사탑, 전쟁기념관, 충렬대 등이 있다.
이곳은 국가원수묘역, 애국지사 묘역, 국가유공자 묘역,
군인·군무원 묘역, 경찰관 묘역, 일반 묘역, 외국인 묘역 등으로
구분, 조성되어 있다.
봄은 가까이 왔건만, 수 많은 영혼들은 차가운 이 땅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
누구에게는 귀한 아들, 또 그 누구에게는 든든한 남편이자 어버이였을 이들...
오로지 이 나라 하나만을 위해 기꺼이 몸을 내던진 그들의 숭고한 정신에
자못 숙연해진다.
여러개의 상징탑 중의 하나... 경찰충혼탑.
이승만 초대 대통령 기념비.
잠시 국가원수묘역을 돌아본다.
이곳에는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하여 박정희, 김대중 대통령의 묘소가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65년 7월 19일 하와이에서 서거, 7월 27일
가족장으로 이곳에 안장되었다.
영부인 프렌체스카 여사는 1992년 3월 19일 서거하여 3월 23일
가족장으로 이곳에 합장되었다.
묘역 한 쪽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국장시에 사용되었던 영구차가 보존되어 있다.
당시 외부에 장식했던 국화는 제거하고 대신 그 자리에는
장기보존할 수 있도록 유화 그림으로 그려 놓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9년 10월 26일 총탄에 서거하여 11월 3일
국장으로 이곳에 안장되었다.
영부인 육영수 여사는 1974년 8.15 광복절 기념행사 도중
흉탄에 서거하여 8월 19일 국민장으로 안장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9년 8월 18일 서거하여 8월 23일
국장으로 이곳에 안장되었다.
잠시, 큰 족적을 남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간 이 나라의 큰 어른들만을
뵙고 나오기는 하였지만, 사실 이곳의 주인은 이분들 만은 아닐 것이다.
어찌보면 이분들 뒤에는 특별한 댓가와 명예도 없이, 오직 이 나라의
밝은 미래만을 염원하며 한 줌 흙으로 사라져간 이름모를 병사들도 있지 않은가.
그들을 비롯하여, 가치있는 삶을 살다 간 이곳 모든 분들의 값진 희생에
고개를 숙이는 바이다.
보물 제383호인 돈화문(敦化門).
창덕궁의 정문으로 1412(태종12년)에 처음 지어졌다.
지금의 돈화문은 1609년(광해군 원년)에 다시 지은 것으로
현재 남아있는 궁궐 정문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敦化는 '중용'의 대덕돈화(大德敦化)에서 가져온 것으로
'(큰 덕은 백성 등을) 가르치어 감화시킴을 도탑게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금천교(錦川橋)와 진선문(進善門).
궁궐의 정문을 지나면 금천교에 이르는데 금천교는 1411년에 축조된
궁궐의 초입부에 놓인 돌다리로 두 개의 홍예를 내어 풍수지리상
길한 명당수를 흐르게 한다.
이 다리 아래에는 궁궐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해태상과 거북상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진선문은 창덕궁의 중문으로 태종 때 신문고를 설치해 두었던 곳이다.
창덕궁은...
1405년(태종 5)에 완공된 조선왕조 제2의 왕궁이다.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한다 하여 이웃한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이라 불렀다.
처음에는 법궁(法宮)인 경복궁에 이어 별궁으로 창건했지만,
이후 국왕이 주로 창덕궁에서 생활하면서 실질적인 법궁의 역할을 하였다.
창덕궁은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임금들이 거처했던 궁궐이기도 하며
인위적인 구조를 따르지 않고 주변 지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자연스럽게 건축하여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창덕궁은 임진왜란 때 모든 궁궐이 불에 타고 광해군 때에 다시 지었다.
1623년에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실화로 불타는 등 이후에도
크고 작은 화재가 여러 차례 있었다.
그러나 금원을 비롯하여 다른 부속건물들이 비교적 원형으로 남아 있어
가장 중요한 고궁의 하나이다.
사적 제122호로 지정되었으며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 되었다.
창덕궁의 정전으로 왕의 즉위식은 물론,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등 국가의 중요한 행사가 행해졌던 인정전(仁政殿).
국보 제225호로 궁궐의 대표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인정전 월대(月臺)의 중앙 답도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봉황이 새겨져 있다.
조선의 궁궐 정전에는 공통적으로 정면에 임금의 용상(龍床)과 나무로 만든
곡병(曲屛)을 두고 뒤에는 일월오악병(日月五岳屛)을 둘렀는데
일월오악도에는 해와 달, 다섯개의 산봉우리, 폭포, 파도, 소나무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천장에는 봉황 한 쌍이 새겨져 있다.
1908년 전기시설이 가설되면서 이곳 인정전에 전등이 설치되었다.
창덕궁 인정전의 지붕에는 9개의 잡상(雜像, 어처구니)이 놓여있다.
궁궐 지붕을 보면 기와지붕 내림마루나 추녀마루에 흙으로 빚어 만든
한 줄로 서 있는 토우를 볼 수가 있는데 이를 잡상이라 한다.
잡상은 일반 백성들 주택에는 쓰지 않았고 궁궐, 정문, 능이나 원의 정자각,
종묘, 성균관 등의 지붕에 사용하였다.
궁궐의 재료는 나무가 많아 화재에 취약하므로 이를 예방하고 나쁜 기운과
잡귀의 사악함에서 왕실을 보호하는 한편, 궁궐의 위엄을 표시하기 위해
만들었으며, 보통 3개에서 11개 까지 홀수로 두었다.
잡상은 중국의 소설 서유기(西遊記)에 등장하는 인물과 토신(土神)을
형상화한 것으로, 잡상의 첫 순위(맨 앞자리)에 놓이는
대당사부(大唐師傅/삼장법사)를 비롯, 손행자(孫行者/손오공),
저팔계(猪八戒), 사화상(沙和尙/사오정), 마화상(麻和尙), 삼살보살(三煞菩薩),
이구룡(二口龍), 천산갑(穿山甲), 이귀박(二鬼朴) 등이다.
그리고 맨 뒤에 놓여진 것은 나토두(羅土頭)로, '나토'라는 짐승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나티'의 다른 표기로 추측한다.
나티는 짐승같이 생긴 귀신으로 작은 용의 얼굴형상 또는 검붉은 곰의 형상이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9세기 말경에 잡상이 보이기 시작해서 명,청시대에 유행했고,
우리나라에는 고려 말에 보이기 시작해서 조선시대에 유행했다.
왕비의 침전으로 지어졌으나 임금도 자주 거처하였다는 보물 제816호인 대조전(大造殿).
대청마루를 가운데 두고 왕비의 침전인 서온돌과 임금의 침전인 동온돌로 나뉘어진다.
이 건물에는 용마루가 없는데 이는 용으로 비유되는 임금이 잠자는 곳에
또 다른 용을 나타내는 용마루가 있으면 두 용이 충돌한다 하여 설치하지 않았다고 한다.
1917년 이 건물이 불에 타자 1920년 경복궁의 교태전(交泰殿)을 옮겨다 지었으며,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후인 순정효황후가 사용했던 침대.
대조전에 비치되어 있으며 길이 224cm, 폭 154cm, 높이 113.5cm의 크기이다.
1988년경 한차례 일부 수리가 있었으나 매트리스 중앙부가 함몰되고
덮개천도 부분적으로 훼손되어 2008년부터 2009년까지 수리 · 복원하였다.
경훈각(景薰閣) 뒷편에는 계단식 화단인 화계(花階)를
조성하고 괴석을 설치하였다.
좌측 구조물은 벽돌로 쌓아 만든 굴뚝으로 가운데에는
사슴과 학을 조각해 장식하였으며, 우측 계단과 연결된 문은
북쪽 후원으로 통하는 출입문이다.
왕세자가 교육을 받거나 책을 읽던 곳으로 일제강점기에는 잠시
왕가의 내의원으로 쓰이기도 했던 성정각(誠正閣).
지금은 후원으로 가는 길에 조선시대에는 중회당이 있었으며,
이 일대는 왕세자의 거처인 동궁이었다.
또한 순조의 장남인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할 때 주로 기거하면서
정궁으로 쓰던 곳이기도 하다.
성정각의 동쪽 누각에는 동쪽을 향해 희우루(喜雨樓),
남쪽을 향해 보춘정(報春亭)이란 편액이 각각 걸려있다.
희우루는 '가뭄끝에 단비가 내려 기뻐하다'라는 뜻으로
1777년(정조1년), 매우 가물었을 때 이 누각을 중건하기 시작하자마자
비가 내렸고, 또 얼마간 가뭄이 들었다가 누각이 완성되어 임금이
행차하자 또 다시 비가 내렸다고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보춘정은 '봄을 알린다'는 뜻으로 봄은 동쪽을 의미하며
태양이 뜨는 방향, 즉 왕세자를 일컫는다.
이 외에도 창덕궁은 비원(秘苑)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후원(後苑)과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황실 가족이 마지막까지 머무르던 낙선재가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