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건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25호인 봉정사의 만세루.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에 위치해 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다.
특히 맞배 지붕 옆면의 바람판은 아랫단을 둥글게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곳 봉정사 만세루의 바람판은 아랫단이 일직선이다.
천등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이 사찰은 신라 문무왕 12년(672)
의상대사(義湘大師)의 제자인 능인대사가 창건하였다.
천등산은 원래 대망산이라 불렀는데 능인대사가 젊었을 때 대망산 바위굴에서
도를 닦고 있던 중 스님의 도력에 감복한 천상의 선녀가 하늘에서 등불을 내려
굴 안을 환하게 밝혀 주었으므로 천등산(天燈山)이라 이름하고 그 굴을 천등굴이라 하였다.
그 뒤 수행을 하던 능인스님이 도력으로 종이 봉황을 접어 날리니 이곳에 내려 앉아
절을 창건하였다고 하며 그런데서 봉정사(鳳停寺)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극락전에서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능인대덕(能仁大德)이 창건한 후
조선시대까지 여러차례 중수하여 왔다고 한다.
사찰 경내에는 1972년 해체보수 때 발견된 상량문에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확인된
극락전(極樂殿, 국보 제15호)을 비롯하여, 조선시대에 건립된 대웅전(大雄殿, 국보 제311호),
화엄강당(華嚴講堂, 보물 제448호) 고금당(古今堂, 보물 제449호) 등의 건물들이 있는데,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목조건물들이 나란히 있어 우리나라 건축연구에 큰 자료가 되고 있다.
이 외에도 극락전 앞에는 고려시대에 건립한 삼층석탑이 있고 만세루, 요사채 등의
건물이 있으며, 부속 암자로는 영산암(靈山庵)과 지조암(知照庵)이 있다.
본사(本寺)에 10동(棟), 동 · 서 2개의 암자에 9동 등 총건평 500여평이나 되는
안동에서 가장 큰 고찰(古刹)이다.
1680년(숙종6)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지는 이 만세루는 원래 덕휘루(德輝樓)로
불리웠으나 언제부터 만세루로 바뀌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대웅전으로 이르는 문의 구실도 하고 경치를 조망하는 용도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우물바닥에 평난간으로 둘러져 있으며 법고와 목어, 운판(雲版)이 놓여져 있어
예불을 알리는 고루(鼓樓)의 기능도 겸하고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국보 제311호인 대웅전(大雄殿).
기단 위에 툇마루를 설치한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건물은 봉정사의 중심 건물로 조선 초기의 건물로 추정된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건물로 건물 앞에는 축대를 높이 쌓고
그 윗면에는 좁은 마루를 깔고 난간을 세웠으며 내부도 마루를 깔았다.
중앙 뒷면에 높은 기둥 2개를 세워 그것에 의지해 불단(佛壇)을 만들었다.
기둥 사이의 창문이나 벽체 등 일부가 건립된 이후 변경되었으나 공포의
구성에서 힘있고 단순한 수법은 초기의 다포(多包)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내부의 단청은 건립 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고려시대적 요소를
지니고 있어 건물과 함께 중요한 회화자료로 주목되고 있다.
오랜 세월동안 퇴락하여 2000년에 해체 · 보수 하였다.
대웅전에서 내려다본 스님들이 기거하는 요사체인 무량해회(無量海會) 건물.
해회(海會)라 함은 대반야경, 화엄경에서 '수 없이 많은
법문'의 자리라는 표현으로 쓰인다.
오른쪽 건물은 만세루.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자 국보 제15호인 극락전(極樂殿).
아미타부처님을 모신 건물로 극락보전, 아미타전, 무량수전, 무량전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일반적으로 불전은 정면 전체가 문으로 되어 있지만, 봉정사 극락전은
가운데에 작은 문이 있고 옆은 벽으로 되어 있다.
정면 세칸, 측면 네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기둥 위에만 공포를 얹은 주심포 양식이다.
작은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측면에 세 개의 기둥을 세워 튼튼한 구조를 취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석조물에서 볼 수 있는 부재가 있는 등, 이 건물의 몇몇 특징들은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로 계승된 옛 건축 양식으로 여겨지고 있어
부석사 무량수전보다 양식적으로 앞서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극락전 앞 뜰에 위치한 봉정사 삼층석탑.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2호이다.
이 탑은 고려시대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높이는 3.18m이다.
탑의 무게로 인하여 기단부의 일부가 약간 파손되었으며, 상륜부 일부가
남아 있지 않으나 거의 완전한 3층 석탑이다.
2중 기단의 방형 석탑으로서 기단부에 비해 탑신부의 폭이 좁으며,
각층 높이의 체감이 적당한 반면 폭의 체감율이 적고, 지붕돌도
높이에 비해 폭이 좁아 처마의 반전이 약하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약간 둔한 느낌을 준다.
이 탑은 봉정사의 극락전과 건립연대가 같을 것으로 추정되며,
당대의 다른 석탑과 비교하여 특이한 점이나 미적으로 뛰어난 점은
없으나, 전체적으로 고려 중엽의 석탑양식을 잘 갖추고 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4호인 석조여래좌상.
극락전과 대웅전 사이에 있다.
이 불상은 안동군 월곡면 미질리에서 발굴된 것으로 그곳에 있던
안정사에 보관되어 있었다.
본래는 연화좌대(蓮花座臺)에 안치된 석불상인데 안정사 주지가
방에 안치하면서 금분을 칠해 원형이 다소 손상되었다.
대좌와 광배(光背)는 없어졌다.
그 뒤 안동댐 건설로 안정사가 폐사되면서 1973년부터 봉정사에 보관되고 있다.
신체에 비해 작은 불두(佛頭)에는 나선형 머리카락(螺髮)과
큼직한 살상투가 표현되었다.
당당하고 둥근 어깨에서 느껴지는 양감에 비해 가슴은 대체로 편평하며,
결가부좌를 튼 하반신을 높게 표현하여 안정감이 느껴진다.
손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고 있다.
이 불상의 양식은 통일신라 하대의 그것과 유사하므로 제작시기를
9세기 경으로 추정한다.
봉정사 동쪽 약 100m 떨어진 곳에는 부속암자인 영산암(靈山庵)이 위치해 있다.
그곳으로 오르는 계단이다.
영산암의 우화루(雨花樓) .
영산암의 입구에 해당되는 우화루의 현판은 원래 극락전 앞에 있던
누각의 현판이었다고 한다.
우화(雨花)는 석가모니께서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처음 설하셨을 때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고 한 것에서 유래한 것이라 하며
영산암의 영산(靈山)은 원래 영축산을 말한다.
봉정사 영산암은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26호로 응진전(應眞殿) · 염화실 ·
송암당 · 삼성각 · 우화루 · 관심당 등 6개 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건물의 구체적인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여러 사료로 볼 때 19세기 말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이 전체적으로 'ㅁ'자형으로 구성되어 폐쇄적인 느낌이 들 수도 있지만,
지형의 높이를 이용한 3단의 마당 구성과 우화루의 벽체를 없애고
송암당을 누마루로 처리한 기법 등에서 폐쇄적인 느낌이 들지 않도록 한
배려가 돋보인다.
우화루 · 송암당의 건물 구조와 삼성각 앞의 조경 등에서 매우 뛰어난
공간처리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우화루를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전각, 주 불전인 응진전(應眞殿)이다.
내부의 후불탱화 제작기록(1888년)으로 보아 19세기말 건물로 추정된다.
이곳 영산암은 좁은 공간에 6개의 건물이 자리잡고 있어
아기자기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송암당(松岩堂).
건물의 이름을 뒷받침 해 주기라도 하듯 바로 집 앞마당
작은 동산의 바위 위에는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건물에는 툇마루와 누마루 등이 설치되어 서로 끊어질 듯 이어져 있고,
좌우 승방들은 전면의 누각과 함께 'ㄷ'자 마당을 이룬다.
안쪽으로 응진전과 삼성각이 있으며 삼성각 옆에는 모두 6동의 건물이 있다.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의 무대였다는 이 영산암은
여느 절집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아름다운 정원을 가지고 있다.
농암종택(聾巖宗宅).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에 위치한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의 종택이다.
이현보는 1504년(연산군 10년)에 사간원 정언으로 있다가
임금의 노여움을 사 안동으로 유배된 인물이다.
1976년 안동댐 건설로 원래 종택이 있던 분천마을이 수몰되는 바람에
안동의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이건(移建)되어 있던 종택과 사당,
그리고 긍구당을 한 곳으로 옮겨 놓았다.
2007년에 분강서원이 재이건 되어, 지금은 분강촌이라고도 불린다.
중간에 마주 보이는 집은 긍구당이다.
이현보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중종 때 성주목사의 선정(善政)으로
왕에게 표리(表裏)를 하사 받았으며, 호조참판, 자헌대부에 올랐고,
1554년 중추부지사가 되었다.
10장으로 전해지던 어부가(漁父歌)를 5장으로 고쳐 지은 것이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전한다. 저서로는 '농암집'이 있다.
긍구당(肯構堂),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2호로 지정되었다.
원래는 영천이씨(永川李氏) 예안파(禮安派) 시조인 이헌(李軒)이 고려말에
도산면 분천동에 창건하여 손님을 맞이하는 별당으로 사용하던 집이다.
이현보가 중수하여 '긍구당'이라 이름 붙인 후 이현보의 종택(宗宅) 별당으로 사용되었고,
농암종택의 상징적인 건물이 되었다.
시(詩), 서(書), 화(畵)에 능하여 삼절(三絶)이라 불리는 신잠(申潛)이 현판을 쓴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ㄴ'자형 집이다.
규모가 작고 꾸밈이 없어 단조롭지만, 누마루를 두어 별당으로서의 여유와 운치가 있다.
원래 넓은 뒷뜰에는 담이 없어서 주변의 자연공간과 연결되어 있는데
이는 별당 중에서도 매우 자유로운 배치형식이다.
분강서원(汾江書院)
분강서원은 1613년(광해군 5)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의 학덕(學德)을
추모하기 위해 향현사(鄕賢祠)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1700년(숙종 26)에 서원으로 개편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으며, 1967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위패를 모신 숭덕사(崇德祠)와 강당 흥교당(興敎堂), 성정재(誠正齋), 동재 극복재(克復齋),
서재 경서재(敬恕齋), 그리고 관리사로 되어있다.
지금 분강서원은 매년 한 번 향사(享祀)를 치며, 평소에는 학생이나 학술단체 등에
개방되어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분강서원 편액은 성세정(成世珽)이 썼다.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위치한 도산서원의 입구. 사적 제170호이다.
도산서원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1574년(선조 7)에 지어진 서원으로, 퇴계선생 사후 6년 뒤인 1576년에 완공되었다.
1570년 퇴계선생이 돌아가시자, 1572년에 선생의 위패를 상덕사에 모실 것을 결정,
2년 뒤 지방유림의 공의로 사당을 지어 위패를 봉안하였고, 전교당과 동, 서재를 지어 서원으로 완성했다.
1575년(선조 8)에 한석봉이 쓴 '도산서원'의 편액을 하사 받음으로써 사액(賜額)서원으로서
영남유학의 총본산이 되었다.
입구로 들어서면 매화나무가 심어져 있는
조그마한 매화원(梅花園)이 나온다.
서원으로 들어가는 문인 진도문(進道門)은 아래쪽의 서당영역과 서원영역을 구분하고 있다.
외부와 경계를 짓는 문으로, 편액을 걸어 상징적인 예교(禮敎)의 의미를 갖게 하였다.
전교당(典敎堂).
보물 제210호로 유생들의 자기 수양과 자제들을 교육하기 위한 강당이다.
1574년(선조 7년)에 지었고 1969년에 수리를 하였으며,
앞 마당 좌우에는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있다.
팔작지붕과 온돌방, 대청마루로 이루어져 있으며,
현판글씨는 명필 한석봉이 선조의 앞에서 쓴 글씨라고 전해진다.
서원의 맞은편, 강 건너 석축위에 세워진 시사단(試士壇).
1792년(정조 16년) 규장각 각신 이만수를 도산서원에 보내 과시를 보게 한 곳이다.
복례문(復禮門), 경북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에 위치한 병산서원의 정문이다.
서원의 정문은 삼문(三門)이 일반적인데, 병산서원의 솟을삼문은
가운데 칸만 판문(板門)이고, 좌우로는 담장과 구분되는 벽채를 한 칸씩 두고 있다.
'복례'라는 이름은 논어 '克己復禮爲仁'에서 유래한다.
이는 공자의 가르침을 함축한 경구(警句)로서, '자기를 낮추고 예(禮)로 돌아가는 것이
곧 인(仁)이다'라는 유학의 자기절제의 정신을 표현해 놓은 것이다.
원래 서원 측면에 있었던 것을 1921년 이 곳으로 이전시켰다.
입교당(立敎堂).
서원의 가장 핵심적인 건물인 강당으로,
원래의 명칭은 숭교당(崇敎堂)이었고 명륜당이라고도 불렀다.
'가르침을 바로 세운다'는 의미이며, 서원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병산서원은 사적 제260호로 지정되었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이 선조 5년(1572)에 지금의 풍산읍에 있던
풍악서당을 이 곳으로 옮겨 온 것이 병산서원의 처음 모습이다.
풍악서당은 원래 풍산 유씨의 교육기관이었다.
류성룡은 선조 때 도체찰사와 영의정을 지냈던 정치가이며 유학자로, 1607년에 타계한 뒤
1614년에 선생을 따르던 제자와 유생들이 이 곳에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세웠다.
이로써 학문을 연구하는 강학공간과 제사를 지내는 제향공간을 모두 갖춘 정식 서원이 되었으며,
철종 14년(1863)에 '병산'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고종 때 흥선 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렸을 때에도 헐리지 않고 그대로 존속된
47개의 서원과 사당 중 하나이다.
서원의 정문인 복례문과 만대루를 지나면 강당과 동재, 서재가 있다.
동재 뒤편으로 서 있는 것은 서원 관리인이 살았던 고직사(庫直舍)이고,
입교당의 서쪽 뒤편에 서 있는 것은 목판과 유물을 보관하는 장판각(藏板閣)이다.
입교당의 동쪽 뒤편에 있는 계단을 오르면 사당으로 들어가는 내삼문과 사당인 존덕사(尊德祠)가 있고,
내삼문 동쪽에는 전사청(典祀廳)이 있다. 열려 있는 복례문 앞에 서서 안쪽을 바라보거나,
서원 안에서 만대루를 통해 바깥을 내다보면 어디 하나 막힘이 없이 탁 트여 있어
건물과 건물 밖의 자연이 하나인 듯 느껴진다.
병산서원은 서원이 번성하던 시기의 한 본보기로 여겨질 만큼 지은 솜씨가 빼어나고 보존이 잘 되어 있으며,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지은 점에서 한국 서원건축의 백미로 이름 나 있다.
뒷마당에서 바라 본 입교당의 마루와 만대루, 그리고 입구인 복례문.
신문(神門). 서원의 내삼문에 해당하며 향사(享祀) 때에 제관(祭官)들이 출입하였다.
정면 3칸의 솟을삼문으로 사당의 출입문답게 붉은 색칠을 하여 부정한 것의 접근을 막고 있다.
이곳을 들어서면 서애 류성룡과 그의 셋째 아들인 수암(修巖) 류진(柳袗, 1582~1635)의
위패를 모신 존덕사(尊德祠)가 있다.
류진이 이 곳에 추가로 배향된 것은 현종 3년(1662)이다.
사당은 신성한 공간이며 위엄을 갖추어야 하기에 내삼문의 좌우로는 담장을 둘렀다.
경사진 지형에 서원을 짓고 가장 높은 곳에 사당을 배치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이다.
또한 강학공간은 선비 정신에 따라 검소하고 단아하게 꾸민데 비해,
제향공간은 단청도 하고 태극문양으로 장식하고 있어 대조를 이룬다.
제향공간으로 존덕사(尊德祠), 신문(神門), 전사청(典祀廳)이 있고,
강학공간으로 입교당(立敎堂), 동재(東齋), 서재(西齋)가 있으며,
부속건물로 장판각(藏板閣), 만대루(晩對樓), 복례문(復禮門), 주사(廚舍) 등이 있다.
만대루(晩對樓)는 휴식과 강학의 복합공간이다.
200여명을 수용하고도 남음직한 장대한 이 누각에는 다른 서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하고 아름다운 면이 있다.
휘어진 모습 그대로 서 있는 아래층의 나무 기둥들과 자연 그대로의 주춧돌, 커다란 통나무를
깎아 만든 계단, 굽이도는 강물의 형상을 닮은 대들보의 모습은 건축물조차 자연의 일부로
생각했던 조상들의 의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하다.
만대루의 2층 누각에서 여유로움을 맛보다.
'만대'는 두보의 시 '백제성루(百濟城樓)' 중 '푸른 절벽은
저녁무렵 마주하기 좋으니(翠屛宜晩對)'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그 이름처럼 해질 무렵에 2층 누각에 올라서 바라보는 낙동강과 병산의 경치는
이곳의 경치 중 으뜸이다.
서원 앞쪽으로 펼쳐진 넓은 백사장과 우뚝 솟은 병산(屛山).
그리고 그 밑을 흐르는 낙동강의 모습은 무척이나 시원스럽게 보인다.
달팽이 뒷간.
서원 밖 주소(廚所, 부엌) 앞에 있는 화장실로, 진흙 돌담의 시작 부분이
끝 부분에 가리도록 둥글게 감아 세워 놓았는데, 그 모양새에서 이름을 따왔다.
출입문을 달아 놓지 않아도 안의 사람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배려한 구조로,
지붕이 따로 없는 이 곳은 유생들의 뒷바라지를 하던 일꾼들이 사용하던 곳이다.
뒷간의 안쪽 모습이다.
400여년 전 서원건물과 함께 지어졌으며, 옛 기록에는 대나무로 벽을 둘렀다고도 전해진다.
병산서원의 부속건물에 포함되어 사적 제206호로 지정되었으며,
2003년 보수작업이 이루어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부용대에 올라서서 바라 본 하회마을의 전경.
하회마을은 중요민속자료 제122호로,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 위치해 있다.
이 마을은 풍산류씨(豊山柳氏)가 대대로 살아오던 전형적인 동성(同姓)마을로서
아름다운 경관을 배경으로 사대부집으로 부터 가랍집(서민 집) 등
고건축물들이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특히 이 곳은 조선시대의 대유학자인 겸암(兼菴) 류운룡(柳雲龍, 1539~1601)과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이
태어난 곳으로도 유명하다.
하회는 풍수지리적으로 태극형(太極形),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다리미형 등의
길지로 알려져 있으며, 낙동강이 동쪽으로 흐르다가 'S'자형을 이루면서
마을을 감싸 돌고 있어서 지명도 하회(河回)가 되었다.
그리고 동쪽으로 태백산의 지맥인 화산(花山)이 있고,
그 줄기의 끝이 강에 싸인 마을까지 뻗어서 아주 낮은 구릉을 이루고 있다.
하회의 집들은 이 구릉을 중심으로 낮은 곳을 향하여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집의 좌향(坐向)이 일정하지 않고 동서남북을 향한 각 방향의 집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집들의 배치는 마을 중심부에 큰 기와집들이 자리잡고 있으며,
가랍집은 그 주위를 둘러싸고 배치되어 있다.
마을에는 하회별신굿탈놀이, 줄불놀이 등이 전승되며,
이 때 사용되던 하회탈이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대종택(大宗宅)인 양진당(養眞堂)과 함께 서애종택(西厓宗宅)인 충효당(忠孝堂)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고, 중요민속자료 10여점이 보존되고 있다.
양진당(養眞堂), 보물 제306호이다.
이 건물은 1500년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겸암(兼菴) 류운룡(柳雲龍)이 살던 집으로
풍산류씨 대종가이다.
하회 북촌(北村)을 대표하는 가옥으로, 안채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그 후에 다시 지었다 한다.
이 건물은 'ㅁ'자형의 안채와 '一'자형의 사랑채와 행랑채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의 구조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높은 축대위에 건물을 세우고
주위에 난간을 둘러 마치 누각(樓閣)과 같은 인상을 풍기고 있다.
사랑채의 앞에는 넓은 사랑마당을 사이에 두고 행랑채가 있는데, 출입문의 역할을 한다.
안채에는 큰 안방과 안대청이 있으며 사랑채와는 마루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사랑채 뒤에는 두 개의 사당이 있다.
충효당(忠孝堂), 보물 제414호이다.
이 건물은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후손과 문하생들이 그의 덕을 기리는 뜻에서
1600년대에 지은 가옥이다.
졸재(拙齋) 류원지(柳元之, 1598~1674)가 처음 건립하였고,
그 후 그의 증손 익찬(翊贊) 류의하(柳宜河)가 전체 52칸의 규모로 확장한 목조건물이다.
집 앞에 행랑채가 길게 가로 놓여 있고 그 뒷편에 'ㅁ'자형 안채와 '一'자형 사랑채가 자리잡고 있다.
사랑채 뒤쪽에는 따로 사당이 마련되어 있고, 그 오른편에는 서애의 유물 등을 보관, 전시하고 있는
영모각(永慕閣)이 있다.
충효당의 현판글씨는 전서체(篆書體)로, 미수(眉搜) 허목(許穆)이 썼다고 한다.
허목은 전서체의 대두라 불릴만 하여 그의 글은 중국에서도 귀하게 여겼다고 한다.
골목길에서 만난, 웬지 위압감이 느껴지는 고택 하나...
빈연정사(賓淵精舍), 중요민속자료 제86호이다.
이 건물은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맏형으로 청백리(淸白吏)로 이름난
겸암(兼菴) 류운룡(柳雲龍, 1539~1601)이 조선 선조(宣祖) 16년(1583)에 지어서
서재로 사용하던 정사이다.
당호(堂號)는 부용대(芙蓉臺) 절벽 아래의 깊은 물을 빈연(賓淵)이라 불렀던 것에서 유래되었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왼쪽 1칸에는 앞뒤로 온돌방을 두고
오른쪽의 2칸은 모두 대청으로 꾸몄다.
온돌방 앞쪽 기단(基壇)에 아궁이를 설치하고 뒤쪽 기단에 굴뚝을 내었으며,
대청의 앞면은 개방하고 오른쪽과 뒷면은 쌍여닫이문을 달았다.
정사 안에는 완송문(玩松門)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하회 북촌댁(北村宅) 화경당(和敬堂), 중요민속자료 제84호이다.
조선 중기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낸 류사춘(柳師春)이
정조21년(1797)에 작은 사랑과 좌우익량을 건립한 것이 이 집의 시초이다.
그 후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를 지낸 그의 증손인 석호(石湖) 류도성(柳道性)이
철종13년(1862)에 안채, 큰사랑, 대문간, 사당을 건립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전형적인 사대부 주택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이 집의 대문간채는 정면 7칸, 측면 1칸으로 중앙에 솟을대문을 두었으며,
몸채의 대문간축과는 축을 달리하고 있다.
안채에는 높은 기둥을 사용하여 겹으로 구성한 안방과 안대청이 있다.
안방은 독특한 田자형의 4칸 방으로 앞의 2개방은 평소 거처하는 곳이고,
뒤의 2개방은 수장공간으로 활용하는 곳이다.
안방 왼쪽에 3칸이 넘는 큰 규모의 부엌이 있다.
큰사랑인 북촌유거는 은퇴한 바깥주인이 여생을 보내기 위해 지은 것으로,
누마루에 앉으면 하회의 아름다운 풍광을 한 눈에 감상할 수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집이다.
하회마을 낙동강변의 나룻배.
강 건너편 절벽 위쪽이 이 마을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부용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