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폭발 사건으로 전두환 대통령의 묘소 참배에 배석하기 위해 도열중이던 공식·비공식 수행원 가운데 서석준 부총리 등 16명이 순직하고 15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대통령의외국 방문을 수행하다가 이와 같은 대형 참사를 당한 것은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나머지 일정을 중단하고 이튿날인 10일 새벽 급거 귀국하였다. 이 사고 후 우리 정부는 곧 이원경 당시 체육부장관을 단장으로 한 한국정부조사단을 현지에 파견, 버마측과 합동 조사를 벌였다. 사건 직후 미얀마 정부는 국가정보국에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한 데 이어 정부 차원에서도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사고 이틀 뒤인 11일 현지에서 서석준 부총리를 비롯한 순직자 16위의 유해가 고국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버마 정부는 칫 라잉 외상을 진사·조문 사절로 파한하였다. 13일에는 필리핀 주둔 클라크 미공군 기지에 공수되어 치료를 받던 이기욱 재무차관이 추가로 순국함에 따라 순직자는 17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의 유해는 13일 전국민의 애도 속에 국민장으로 치뤄져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이 사건으로 순직한 희생자는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부장관, 김동휘 상공부장관, 서상철 동자부장관, 함병춘 대통령비서실장, 이계철 주버마대사, 김재익 경제수석비서관, 하동선 기획단장, 이기욱 재무차관, 강인희 농수산차관, 김용한 과기처차관, 심상우 의원, 민병석 주치의, 이재관 비서관, 이중현 동아일보 기자, 한경희 경호원 정태진경호원 등 모두 17명이었다.
사건 직후 곧바로 수사에 착수한 버마 당국은 11일 랭군시 파준다웅 천(川)에서 아웅산 암살사건의 범인으로 보이는 코리언 1명을 검거하고 1명을 사살했다고 발표했다.
다시 12일에는 도주 테러범 1명을 추가로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한국 정부는 현지 우리측 조사단의 자체 조사 결과를 토대로 버마 정부에 대해 북한과의 단교 조치를 강력히 요청하였다. 국회에서는 북한의 [살인만행 규탄결의안]을 채택하였고, 민간에서도 각종 규탄 대회가 곳곳에서 열렸다.
14일 버마 정부는 랭군 근처에서 북한 선박 1척을 나포하였는데, 16일 이후부터 버마 현지의 언론들은 이 사건에 북한이 관련돼 있음이 확실하다는 보도를 하기 시작하였다. 17일 버마 당국은 다시 중간 수사 결과 발표를 통해 이 사건은 북한이 저지른 것이라고 단정하였다. 그러나 당시 버마는 우리 정부는 물론 북한과도 수교국이어서 수사에 상당한 신중을 기하고 있었다. 중간 수사 발표 이후 버마 정부는 우리측 보도진의 입국을 막는 등 최종 수사 결과를 계속 미루었다.
사건 발생 거의 한달 만인 11월 4일에야 버마 정부는 아웅산 테러 사건은 북한 특공대의 소행이라는 완전한 증거를 확보했다고 발표했다. 이와 동시에 버마 정부는 북한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는 한편, 버마 주재 북한 대사관 요원들에 대해서는 48시간 내에 출국하도록 명령하였다.
버마 당국의 발표에 따르면 이 사건의 범인은 개성에 있는 북한군 정찰국 특공대 소속의 진 아무개 소좌와 강민철 상위, 신기철 상위 등 3명으로 밝혀졌다. 이들은 9월 9일 북한 서해안 옹진항에서 북한 선박에 탑승, 22∼23일 경 랭군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미얀마 주재 북한 대사관 정무 담당 참사관 전창휘의 집에 은거하여 암약하다가, 전두환 대통령 일행이 버마에 도착하기 하루 전인 10월 7일 새벽 2시 아웅산 묘소로 잡입하여 지붕에 2개의 폭탄을 설치한 것으로 밝혀졌다.
사건 직후 미국 정부는 와인버거 국방장관을 단장으로 한 이례적인 조문사절을 파견하였다. 우리 정부는 국민장 직후인 14일 내각 개편을 통해 민심 수습을 도모하였다. (이상 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