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곳 해인사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다.
이미 모두가 익히 알고있는 곳이다 보니...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256호인 대적광전
대적광전은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모시는 화엄종 사찰의 중심 법당이다.
부처가 설법한 진리가 태양처럼 우주에 가득 비추는 것을 형상화한 비로자나불은
불교의 진리자체를 상징하는 불상이다.
비로자나불을 모신 전각은 대적광전 이외에도 화엄전과 비로전이 있다.
대적광전은 802년(애장왕 3)에 순응,이정 두 스님이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의 명칭은 비로전이었으나, 1488년(성종 19)에 왕실의 지원에 의해
학조대사가 중창하면서 대적광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현재의 건물은 1817년(순조17)에 불타버려 이듬해 중건한 것을 1971년에
지관스님이 다시 중수한 것이다.
큰 절의 중심 불전에 걸맞게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을 한 우람한 모습이다.
정선이 그린 해인사 그림에는 대적광전이 2층으로 그려졌는데,
1817년의 화재 이전에는 지금보다 더 큰 건물이었을 것이다.
지금의 모습은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다포계 팔작집으로서
중수과정에서 많이 변형되었음을 알 수 있다.
법당 안에는 용기사에서 옮겨온 중앙의 큰 비로자나불을 비롯해
법단의 좌에서 우측으로 법기보살, 보현보살, 지장보살, 비로자나불(대),
비로자나불(소), 문수보살, 관세음보살 순으로 일곱분의 불보살님이 봉안되어 있는데
비로자나불과 지장보살이 함께 모셔진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이는 주변지역의 불타버린 법당에 있던 지장보살을 옮겨 놓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4호인 해인사 3층석탑
해인사의 대적광전 아래 서 있는 석탑으로, 넓은 뜰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어
일명 ‘정중탑(庭中塔)’이라고도 불린다.
이 탑은 2중 기단과 3층의 탑신 및 지붕돌로 이루어진 통일신라 후기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이다.
원래 이 탑의 받침은 신라 석탑 양식인 2중이었으나, 1926년에 탑을 수리하면서
받침을 확장하고 한 층을 더 올려, 본래 지니고 있던 조화미를 상당 부분 상실하고 말았다.
4면의 각 모서리에 기중을 새긴 것 외에는 별다른 조각이 없다.
지붕돌받침은 신라 석탑의 전형인 5층으로 되어 있고,
지붕돌 추녀 끝은 살짝 들어올려져 완만하게 처리되었다.
지붕돌의 각 모서리에는 작은 종이 달려있는데, 본래의 것은 없어지고
나중에 다시 매단 것이다.
탑의 꼭대기 역시 일부가 소실되어 꼭대기를 떠받치는 받침대와
위로 핀 연꽃, 바퀴만 남아있다.
1926년 6월에 이 탑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상층 받침의 돌 함 속에서 9개의
작은 불상이 발견되었는데, 석탑을 수리하고 나서 이들 불상을 다시 탑 안에 봉안하였다.
또 이 석탑 앞에는 코끼리의 눈모양을 형상화했다는 안상과 연꽃무늬가 조각된
배례석이 있었으나 수리하는 과정에서 석등 앞으로 옮겨졌다.
[조선불교통사] 에는 태조가 즉위하여 이 탑을 수리할 때, 대장경을 탑 안에 봉안하면서
나라의 번영과 백성의 평안을 빌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그러나 1926년에 탑을 수리할때 대장경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태조가 수리한 탑이
이 탑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더욱이 근래의 사찰 보수 때 경학원 근처에서 신라 석탑의 재료가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또 다른 석탑이 있었을 가능성도 크다고 하겠다.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5호인 해인사 석등
석등은 부처님이 계신 사찰에 어둠을 밝히기 위해 만든 것이다.
부처님에 대한 등 공양과 관계된 것이므로 부처님을 상징하는 탑과 함께 법당 앞에 설치된다.
이 석등 역시 원래 석탑 앞에 있었지만 현재 위치로 옮겨놓았다.
옮겨진 이유와 시기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없다.
석등은 받침돌과 기둥돌, 등불을 놓는 화사석, 지붕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둥돌이 원래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전체의 크기는 알 수 없다.
맨아래 네모난 받침대에는 코끼리 눈 모양의 무늬를 새겨 넣었으며,
8각형의 아래 위 받침대에는 8장의 연꽃잎을 각각 따고 하늘을 향하도록 새겨넣었다.
화사석에는 4개의 창을 두었는데, 창 사이의 모서리 4면에 각각 사천왕상을
돋을새김한 것이 이채롭다.
지붕돌은 역시 8각으로 처리하여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었으며 맨 위에는 둥근 구슬을 올렸다.
새겨진 눈 모양과 연꽃무늬의 우아한 조각수법, 그리고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볼 수 있다.
한편 1398년 조선 태조 7년에 강화 선원사에 있던 팔만대장경을 지천사로 옮겼다가
이듬해 이곳으로 옮겨왔다.
팔만대장경판전은 1995년 12월에 세계문화 유산으로 공식지정되었다.
경내에는 일주문, 대적광전,구광루 등 문화재 및 암자들이 즐비하여
찾는 이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다.
붉게 물든 덩굴은 담장을 휘감고,
하늘은 마냥 높기만 하다.
대적광전의 화려한 단청.
섬세한 인간의 손길이 이루어 놓은,
획 하나마다에 가득 담긴 불심...
고려팔만대장경판이 보존되어 있는
대장경판전의 입구.
장경판전은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경이나 그것을 인쇄하기 위한 목판을 보존하고 있는 전각으로
사찰에 따라 대장전 혹은 판전, 법보전 등으로 불리운다.
합천 해인사의 장경판전에는 세계의 문화유산인 고려 팔만대장경이 모셔져 있다.
해인사는 신라 창건 이래 조선 말기까지 여러차례에 걸쳐 화재를 입고 중건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천만다행히도 고려의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던 대장경판전(국보 제52호)은
조선 초기 개수를 한 그대로 보존이 되어있어 국보 가운데의 국보인
고려팔만대장경판(국보 제32호)이 함께 온전하게 보존,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
▶ 합천 학사대(學士臺) 전나무, 경상남도 기념물 제 215호이다.
이 전나무는 높이 약30m, 둘레 5.1m 쯤 되는 수령이 1,000년 이상 된 고목이다.
나무의 줄기가 지상 10m 높이에서 두 개로 벌어져 있으며, 나뭇가지가 아래로 향해 뻗어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곳은 고운 최치원 선생이 만년에 벼슬을 버리고
가야산에 은거할 때 찾았던 곳이다.
학사대라는 이름은 고운 선생이 헌강왕때 29세의 나이로 한림학사 벼슬을 하였는데
그 벼슬 이름을 따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고운 최치원 선생은 말년에 제자들 앞에서 이 곳에 지팡이를 꽂으며
"내가 살아 있다면 이 지팡이도 또한 살아 있을 것이니 학문에 열중하라" 는 유언을 남기고
지금의 홍제암 뒤 진대밭골로 유유히 홀로 들어가신 전설로 유명하다.
그래서 이 전나무를 일러 고운 선생의 "지팡이 나무"라고 불리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