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는 신라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 제53대 신덕왕(神德王),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무덤이 한 곳에 모여있어 삼릉이라 부른다.
아달라왕(재위 154~184)은 백제가 침입하여 백성을 잡아가자
친히 군사를 출동시켜 전장에 나아갔다.
그러나 백제가 화친을 요청하자 포로들을 석방하였다.
왜(倭)에서는 사신을 보내왔다.
능의 크기는 밑둘레 58m, 높이 5.4m, 지름 18m이다.
효공왕(孝恭王)이 자손이 없이 죽자 백성들이 헌강왕(憲康王)의 사위인
신덕왕(재위 912~917, 박경휘)을 추대하였다.
견훤(甄萱)과 궁예(弓裔)의 침입이 있어 싸움에 진력하였다.
능의 크기는 밑둘레 61m, 높이 5.8m, 지름 18m이다.
두 차례에 걸쳐 도굴을 당하여 1953년과 1963년에 내부가 조사되었다.
조사결과 매장 주체는 깬 돌로 쌓은 횡혈식 돌방(橫穴式 石室)으로 밝혀졌다.
경명왕(재위 917~924, 박승영)은 신덕왕의 아들로 고려 태조 왕건(王建)과
손잡고 견훤의 대야성(大耶城) 공격을 물리쳤다.
능의 크기는 밑둘레 50m, 높이 4.5m, 지름 16m이다.
반드시 가보리라 했지만 꽤 오랜 기간동안 미루기만 했던 곳, 곳곳에 불상이 산재해 있어 노천박물관으로도 불린다는 그곳, 경주 남산에 다녀왔다.
경주 남산은 1968년 지리산에 이어 두번째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다른 곳과는 달리 유일한 사적형 국립공원이다.
2000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런만큼 남산을 오르는 여러 코스 중 가장 볼 것이 많다는
서남산 제1코스를 찾았다. 삼릉에서 출발, 상선암, 바둑바위를 거쳐 금오봉 정상에 올랐다가 용장사지를 지나 용장골로 하산하는 코스다.
■ 경주 남산 등반코스
▶ 1코스 (서남산)
삼릉에서 용장까지 / 총6km, 6:30소요
이 길은 남산 골짜기 가운데 가장 많은 유적이 있어 남산의 불상을 시대적 미술사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산행의 출발점에 위치한 삼릉 주변으로는 소나무가 빼꼭하게
들어차 있어 많은 사진가들의 사랑을 받기도 한다.
이곳 남산에서 현재까지 발견된 절터는 112곳, 탑은 61기이고,
불상은 80체를 헤아린다.
불상 중에는 입체로 된 것이 29체이고 바위면에 새긴 마애불상은 51체이다.
그러니 노천박물관이라 불리워도 전혀 이상할 것은 없다.
삼릉 바로 우측편에 위치한 사적 제222호인 경애왕릉(景哀王陵).
이 능은 신라 제55대 경애왕(景哀王, 재위 924~927)을 모신 곳이다.
밑둘레 43m, 지름 12m, 높이 4.2m 규모로 흙을 둥글게 쌓은 형태이다.
남산의 북서쪽 구릉의 끝이자 인천(麟川, 기린내)의 동안(東岸)에 위치하고 있다.
왕은 제53대 신덕왕(神德王)의 아들로 927년 포석정(鮑石亭)에서
연회를 베풀고 있을 때 후백제 견훤(甄萱)의 습격을 받아 생을 마쳤다.
삼릉을 지나면서 바로 산행이 시작된다.
산책을 하듯 쉬엄쉬엄 오르니 이내 여래상 하나가 나타난다.
바로 삼릉계 석조여래좌상(三陵溪 石造如來坐像)이다.
계곡 어귀에 3개의 능이 있어 삼릉계라 하는데 계곡이 깊고
여름에도 찬 기운이 돌아 냉골(冷谷)이라고 부른다.
이 계곡에는 11개소의 절터와 15구의 불상이 산재하여 남산에서 가장 많은
유적이 있으며 금오봉 정상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찾는 사람들이 많다.
이 석조여래좌상은 1964년 8월 동국대학교 학생들에 의해
약 30m 남쪽 땅 속에서 머리(佛頭)가 없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특히 이 부처님은 왼쪽 어깨에서 흘러내려 매듭진 가사끈과 아래 옷(裙衣)을
동여맨 끈, 그리고 무릎 아래로 드리워진 두 줄의 매듭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용장사 삼륜대좌불과 함께 복식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불상은 손과 머리가 파손되었으나 몸체가 풍만하고 옷주름이 유려하여
통일신라시대의 우수한 조각품으로 평가된다.
왼쪽 산등성이 바위 벼랑에는 관세음보살상이 새겨져 있고 위쪽으로 오르다 보면
선각의 여섯 부처님과 마애여래좌상, 석가여래좌상, 그리고 남산에서
좌불로는 가장 큰 상선암 마애여래좌상 등 귀중한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다.
석조여래좌상 바로 왼쪽길로 접어드니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磨崖觀音菩薩像)이 반겨주고...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호이다.
이 불상은 남산의 삼릉계곡에 있으며 돌기둥 같은 암벽에
돋을새김되어 있다.
풍만한 얼굴에 머리 위에는 삼면보관(寶冠)을 썼는데,
앞에 작은 불상이 조각되어 있어 이 불상이 관음보살임을 알 수 있다.
입술에는 붉은색이 아직 남아 있으며 연꽃으로 된 대좌 위에 서 있는데,
목걸이를 하고 허리 아래로 흘러내린 옷자락은 양 다리에 각각
U자 모양으로 드리우고 있다.
왼손은 정병(보병)을 들고, 오른손은 가슴에 들어올려
손가락을 구부려 밖으로 향하고 있다.
갔던 길을 되돌아와 원래 오르던 길로 계속 진행한다.
얼마못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호인
삼릉계곡 선각육존불(線刻六尊佛)과 만나게 된다.
이 불상은 남산에서는 보기 드물게 선각으로 된
여섯 분의 불상이 두 개의 바위면에 새겨져 있다.
그리고 오른쪽 암벽 위에는 당시 이들 불상을 보호하기 위한
법당(法堂)을 세웠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 바위 위쪽으로는 또 다른 등산로가 개설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이 그대로 밟고 지나간다.
보고 있으려니 웬지 마음이 불편해진다.
앞쪽 바위면 가운데에는 본존이 서고 좌우의 보살은 꿇어앉은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본존은 연꽃 위에 서서 왼손은 아래에, 오른손은 위에서 서로 마주보게 하고
두광만 조각되어 있다.
그 좌우의 보살상은 웃옷을 벗고 한쪽 무릎을 세운 모습을 하였다.
손에는 꽃 쟁반을 받쳐들고 있는데, 두광만 조각되었으며 목에는
구슬 2개를 꿰어 만든 목걸이를 하였다.
이를 아미타삼존이라고 한다.
안쪽 바위면 가운데에는 본존이 오른 어깨에만 법의를 걸치고
연꽃 대좌(臺座)에 앉아 있다.
머리 둘레에 두광(頭光)만 새기고 몸 둘레의 신광(身光)은
새기지 않았으며, 왼손은 무릎에 얹고 오른손은 들어올린 모습이다.
그 좌우에는 연꽃 대좌에 두광만 조각되고, 방울 3개를 꿰어 만든
목걸이를 한 보살 두 분이 서 있다.
보통 이 세 분을 석가삼존이라 부른다.
누군가의 소망은 향불이 되어 피어 오르고...
산길을 밟아 오르면서 신라시대의 불교유적지를 찾아
하나하나 대면해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번에는 보물 제666호인삼릉계석불좌상(石佛坐像)이다.
남산의 삼릉계곡 중부능선쯤에 자리하고 있는 이 불상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맺고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한 석불좌상이다.
불상은 불두와 불신을 따로 제작하여 결합하였다.
이 불상의 상호(相好)는 파손이 심했기 때문에 뺨과 코, 입 등 대부분을 복원하였다.
불상의 몸은 당당하면서도 안정감 있는 신체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가사(袈裟)는 왼쪽 어깨에만 두르고 오른쪽 어깨는 노출된
편단우견(偏袒右肩)식으로 걸쳤는데, 이 가사는 얇게 몸에 밀착하여
신체의 윤곽 등이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정강이에서 발목으로 옷주름이 비스듬히 흐르고 있다.
광배는 간결하면서도 섬세하게 새겨진 화염문(火焰紋)과 당초문(唐草紋)
등으로 보아 우수한 조형성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연화좌(蓮花座)는 상대(上臺)에 앙련(仰蓮)을 3단으로 새겼는데,
꽃잎 안에 다시 꽃잎을 새겼다.
팔각의 중대(中臺)에는 면마다 안상(眼象)을 두었으나, 하대(下臺)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이 불상은 풍만하면서 당당하고 안정감 있는 신체 표현, 대좌와 광배의
간결하면서도 섬세한 조각 수법, 몸에 밀착시켜 입은 얇은 가사,
발목으로 흐르는 옷주름 등으로 보아 삭굴암 본존불상에서 완성된
통일신라시대 조각의 양식과 수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므로
경주에 있는 석빙고는 얼음을 넣어두던 창고로 보물 제66호이다.
조선 영조 14년(1738)에 축조하였고, 4년후 반월성인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석빙고는 이곳 뿐만 아니라 현풍, 청도, 창녕, 안동 등지에서도 볼 수가 있다.
국보 제31호인 첨성대.
현존하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라는 것이 정설로 되어있으나,
선덕여왕을 기리는 상징탑, 혹은 제단이라는 일부의 주장도 있다.
그러나 최근 첨성대가 천문대로 활용되었음을 증명하는 연구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기록에 의하면 첨성대 축조 이후 관측기록이 8배 이상이나 증가했으며,
당시 유성 관측 기록이 첨성대 주변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에 위치한 신라 29대 태종무열왕의 능(무열왕릉).
사적 제20호로 지정되어 있다.
능의 외형은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밑지름 36.3m, 높이 8.7m이다.
밑둘레를 따라 비교적 큰 자연석을 사용하여 무덤의 보호석으로 드문드문
놓았으며, 능 앞에는 혼유석(魂遊石)이 있다.
국보 제25호인 신라 태종무열왕릉비(太宗武烈王陵碑).
무열왕릉 경내의 비각으로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만 남아있다.
이수에는 '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글이 전서로 양각되어 있는데,
이는 김인문(金仁問)의 글씨라 전한다.
서악리 고분군(西岳里 古墳群). 사적 제142호로 무열왕릉 바로 뒷편에
위치한 4개의 대형 무덤을 가리킨다.
무덤의 주인은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무열왕릉 뒷편에 있는 것으로 보아
무열왕과 가까운 왕이나 왕족의 무덤일 것으로 추정된다.
대구광역시 동구 신무동 팔공산 기슭의 삼성암지 마애약사여래입상.
유형문화재 제21호로 현재 바위가 세로로 갈라져서 여래상이 새겨진
바위가 많이 기울어진 상태이다.
그러나 바위가 기울어졌다고는 하지만 부처님을 바로 세워서 봐도
서 있는 모습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조성연대는 통일신라의 양식을 이어받은 고려초기로 짐작된다.
경북 포항시 남구 장기면사무소 내에 위치한 근민당(近民堂).
관아(官衙), 즉 옛 장기현의 현감이 공사(公事)를 처리하던
동헌(東軒)건물로서, 영일 장기읍성 내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내부구조는 약간 변형되었다.
역시 같은 장소에 위치한 장기척화비(長鬐斥和碑).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24호로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겪은 후
서양사람들을 배척하고 그들의 침략을 경고하기 위해 고종 8년(1871) 4월에
대원군의 명에 의해 전국에 세운 것 중의 하나이다.
원래의 위치는 장기읍성 내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분실되었다가 1951년 4월초,
장기면 지서 입구에서 찾아 장기면사무소 정문 좌측 도로변에 세워 두었다가
1990년 정원으로 옮겨 보호책을 설치하였다.
이 척화비는 사암으로 되어 있으며, 폭은 45cm, 높이 120cm, 두께 21cm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