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사 입구의 표지석.
그런데 이미 알고 있던 매화산 혹은 남산제일봉이 아니라
천불산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생소한 이름이다.
곳곳에 기암괴석들이 서 있는 모습이 마치 불상을 이루는 듯하다 하여
그렇게 불리워졌다는데... 알고보니 이 산은 매화산, 남산제일봉
이외에도 천불산, 월류봉이라는 또 다른 이름도 가지고 있었다.
남산제일봉은 경남 합천군 가야면에 있는 매화산의 제1봉이다.
높이는 1,010m로 가야산국립공원에 속하며 가야산의 남쪽에 위치한다.
영남지역 산악인들에게는 매화산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사실 매화산(954m)은 남산제일봉에서 남동쪽으로 2km정도 떨어진 산이다.
다시 말해서 남산제일봉은 매화산 자락의 하나의 봉우리인 셈이다.
천불산을 등에 업고 있는 청량사.
열반의 꽃과 새를 바라보는 누각이라는 설영루(雪影樓)가 왼쪽에,
재가신자들의 숙소와 식당인 상락당(常樂堂)이 오른쪽에 각각 위치해 있으며.
그 사이로 재가신자들의 수행처인 적연당(寂然堂)이 보인다.
이곳 청량사는 해인사의 산내 암자로써 창건연대의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전해오는 말로는 해인사(서기 802년)보다 먼저 창건되었다고 한다.
'삼국사기' 최치원조에 이 절은 최치원(857~?)이 즐겨 찾던 곳으로
기록되어 있어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천년 옛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다포집이다.
왼쪽 건물은 병고로 시달리는 중생들을 구원해 주시는
약사여래 부처님을 모신 약광전(藥光殿)이다.
중요문화재로는 9세기초 부터 이 절을 지켜온 돌부처님(石造如來坐像, 보물 제266호)과,
신라 석탑의 대표적인 양식을 지닌 삼층석탑(보물 제266호),
그리고 9세기 끝무렵의 치레수법이 아름다운 석등(보물 253호) 등이 있다.
■ 청량사 삼층석탑
이 탑은 이중기단 위에 삼층의 탑신을 갖춘 전형적인 신라 석탑이다.
지붕돌의 낙수면은 완만하나 네 모서리에서 경쾌하게 반전되고 있으며
아래에는 각 층 다섯 단의 지붕돌 주름이 있다.
상륜부는 노반만이 남아 있으며, 탑 주위를 화강암의 석재로 넓게 구획하였다.
잘 처리된 탑의 각 부분은 아름다운 조화와 비례를 보이고 있고 조각수법도
경쾌해 보이는 9세기를 대표하는 석탑으로 전체 높이는 4.85m이다.
■ 청량사 석등
네모난 지대석 위의 하대석은 팔각으로 안상에 사자와 운상누각(雲上樓閣)이 교대로 새겨져 있다.
복련석에는 반전한 귀꽃이 있으며 간석(竿石)은 고동형(鼓胴形)으로 앙련과 복련으로 장식하였다.
화사석(火舍石)은 팔각으로 네면에는 화창(火窓)이 나머지에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비교적 얇은 편이며 상륜은 일부 부재가 올려져 있을 뿐 원형을 상실하였다.
전체적으로 균형을 잃지 않아 안정감을 보이고 있는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석등이다.
다만 고동형의 간주석, 비교적 평평한 지붕돌 그리고 조각이 얇은 점,
더욱이 장식적 경향이 강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제작시기는 9세기경으로 추측된다.
등반 개념도.
청량사 왼쪽 산길을 접어들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산을 오르면서 뒤를 돌아다 본 모습으로,
안부에 이르기까지는 이런 오르막길이 계속된다.
능선에 올라 전망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조금 올라가다 보니
이런 멋진 풍경과 만날 수 있었다.
가야할 길을 대충 눈으로 겨눠보니 온통 괴석들 투성이다.
그러나 가파른 암벽사이로는 철계단이 놓여 있는 걸로 보아
큰 어려움은 없을 것 같다.
다만 보기에는 그저 아찔하게 느껴질 뿐이다.
가는 길마다 호위하듯 서 있는 기암들...
한 구비, 한 구비를 돌아들 때 마다 또 다른 얼굴로 맞아준다.
눈 앞에 펼쳐지는 풍광에 이끌리어 열심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뒤를 되돌아 봤다.
암석들이 하나같이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선 모습이다.
"청량산 육육봉(六六峰)을 아는 이 나와 백구(白鷗) 백구야 훤사(喧辭)하랴 못 믿을 손 도화(桃花)로다.
도화야 뜨지 마라 어주자(魚舟子)알까 하노라"
☞ 훤사하랴: 야단스러우랴, 떠들어 소문내랴. ☞ 어주자: 배타고 고기잡는 사람, 어부.
말년에 '청량산인'이라는 호를 짓고, 아예 이 곳 산중턱 오산당(吾山堂)에서 지내면서
글을 읽으며 후학을 가르치기도 했던 퇴계 이황.
무릉도원같은 청량산을 아끼는 마음을 그는 그렇게 노래했다.
또한, 청량산을 일러 '입을 벌리고 들어갔다가 입을 다물고 나오는 산'이라고도 한다는데,
수려한 경관에 놀라 입을 벌리고 들어갔다가, 나올 때에는 그 비경이 세상에 알려질까 두려워서
입을 꾹 다물어 버린다고 해서 생긴 말이라고 한다.
청량산은 경북 봉화군 명호면과 재산면, 안동시 도산면과 예안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기암괴석이 장관을 이루어 예로부터 소금강으로 불려진 명산이다.
기록에 따르면 청량산은 고대이래로 '수산(水山)'으로 불려지다가, 조선시대에 와서
금탑봉에 자리 잡은 상청량암(上淸凉庵)과 하청량암(下淸凉庵)이 널리 알려지면서
산 이름이 청량산으로 바뀌었다고 하는데, 그 구체적인 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청량산은 주세붕(周世鵬)이 명명한 12봉우리(일명 6.6봉)가 주축을 이루며, 태백산에서 시원하는
낙동강이 산의 웅장한 절벽을 끼고 유유히 흘러가며, 뫼뿌리마다 많은 신화와 전설을 담고 있다.
청량산에는 청량사 유리보전(琉璃寶殿)과 응진전(應眞殿)을 비롯한 20여개의 절터와
퇴계 이황이 공부한 장소에 후학들이 세운 청량정사 (淸凉精舍),
서성(書聖) 김생이 글씨 공부를 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 김생굴, 대문장가 최치원이 수도한 풍혈대(風穴臺),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와서 쌓았다는 산성 등 많은 유적과 선현들의 자취가 남아 있으며,
자연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1982년 8월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도립공원이라 해봤자 면적이 고작 48.76㎢로서 북한산 국립공원의 절반크기에 지나지 않는다.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에 위치한 청량산의 가파른 길을
잠시 오르다 보면 만나게 되는 청량사(淸凉寺).
중앙에 보이는 건물은 강원으로 이용되고 있는 심검당(尋劍堂)으로,
일반인들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은 수행공간이다.
이 곳 좌측으로는 유리보전과 5층석탑이 위치해 있다.
청량사는 신라 문무왕 3년(663)때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창건당시에는 승당 등 33개의 부속건물을 갖추었던 대사찰로, 봉우리마다 자리잡은
암자에서 흘러 나오는 스님들의 독경소리가 청량산을 가득 메웠다고 한다.
또한 한 때는 신라의 고찰인 연대사(蓮臺寺)와 망선암(望仙庵) 등 크고 작은 26개의
암자가 있어서 당시 신라불교의 요람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시대 불교를 억압하는 주자학자들에 의해 절은 피폐하게 되어,
현재는 청량사와 부속건물인 응진전만이 남아있다.
청량사의 대웅전으로, 약사여래불을 모시고 있는 유리보전(琉璃寶殿),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7호이며, 현판글씨는 공민왕의 친필이다.
이 곳에 모셔진 약사여래불은 특이하게도 종이를 녹여서 만든 지불이라고 한다.
유리보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八作)지붕을 한 다포계(多包系)의 집이다.
공포는 외1출목(外一出目) 내2출목의 형식으로 첨차의 짜임이 고졸(古拙)하고
쇠서의 내부 끝은 연화형(蓮花形) 조각을 새기고 있으며, 전면 중간기둥 위에는 용두(龍頭)와
용미(龍尾)를 주두(柱枓) 밑에 내외로 뻗게 하고 있어 조선 후기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유리보전의 바로 앞쪽에 위치한 5층석탑.
1990년에 세워졌으며, 부처님의 진신사리 5과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보지는 못했지만, 영화 '워낭소리'에서 노부부가 죽은 소의 극락왕생을 비는 장면이
이 곳에서 촬영되었다고 한다.
앞에 보이는 2층의 누각은 범종각으로, 법고, 운판, 목어 등이 모셔져 있다.
그 위쪽으로 5층석탑과 유리보전이 보인다.
전통차를 무료로 제공하며, 여행자의 쉼터 역할을 하는 산꾼의 집.
청량사 동쪽 바로 아래쪽에 자리잡고 있다.
산꾼의 집 옆길을 따라 오르면 나오는 어풍대,
그 위에서 바라 본 청량사의 전경이다.
맨 아래 건물은 사찰내의 전통 다원(茶園)이자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이라 불리워지는 안심당이다.
어풍대(御風臺)에서 바라 본 청량사의 수려한 모습.
연화봉이 좌측으로 높이 솟아있는 가운데, 청량산이 포근히 품고있는 형상이다.
금탑봉(金塔峰)의 중층(中層)에 위치하고 있는 어풍대는
내청량과 외청량을 연결하는 요충지 역할을 하고 있으며,
'청량지(淸凉誌)'의 기록에 따르면, 열어구(列御寇, 고대 중국의 인물)가 바람을 타고
보름동안 놀다가 돌아갔다고 하여 어풍대로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 곳 금탑봉 중층에는 어풍대와 함께 치원대(致遠臺), 풍혈대(風穴臺), 요초대(瑤草臺),
경유대(景遊臺) 등이 나열되어 있으며, 이들 대에서는 기암절벽으로 장관을 이루고 있는
청량산의 연화봉 기슭 한가운데, 연꽃 같은 봉우리와 연꽃 꽃술 자리에 자리잡은 듯한
청량사의 모습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청량산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듯, 규모만으로는 여느 산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산행은 축융봉에서 청량산을 조망하고
청량사를 둘러 보는데서 만족하기로 했다.
언젠가 머지 않은 장래에 또 다시 찾게 될 것으로 믿으며...
■ 청량산의 등반 개념도
청량사만을 들리지 않을 경우, 일반적으로 입석에서 출발하여 오른다.
주세붕이 명명한 '육육봉'과 '12대(臺), 3굴(窟)', 그리고 4정(井)으로 표현되는 바위산인 청량산은
최고봉인 의상봉의 높이가 해발 870.2m이고, 맞은편의 축융봉이 845.2m로
높이가 그다지 높지 않고, 덩치도 크지 않기 때문에 산행코스 또한 단순한 편이라 할 수 있다.
지난 11월초, 지나가는 가을의 뒷 꽁무니라도 잡아 볼 양으로 서둘러 나섰던 봉화 청량산.
언젠가 꼭 한번은 가 보리라 생각하여 마음속에 담아 놓고만 있던 곳이다.
청량사를 찾기 전에 먼저 청량산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다는 축융봉(祝融峰)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산성 입구의 표지판이 정상까지가 2km로 1시간 10분여가 소요됨을 알린다.
언덕길로 처음 한 구비를 돌아들면 바로 최단거리 코스인 산성길이 나오는데,
그 성곽을 따라 오르면서 밟게되는 계단이다.
얼마간 오르다 보면 만나게 되는 밀성대(密城臺).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청량산으로 와서 산성을 쌓고 군사들을 훈련시킬 때,
명령을 어긴 죄인을 절벽 끝에서 밀어 처형했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그 자리에는 세워진지 얼마되지 않아보이는 전망대가 계단이 통제된 채로 서 있다.
산성 또는 계단... 오르는 길은 깨끗하게 정비된 상태라 그 어느 쪽이라도 좋다.
당시 정상부위에서는 산성의 복원작업이 한창이었다.
청량산성은 예로부터 군사적 요새였다.
이 지역은 삼국시대부터 고구려와 신라의 각축장이었고,
천연요새로서의 지형적 요건들을 충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곳의 지세는 산 앞으로는 낙동강이 휘감아 돌아 나가고, 험준한 천인절벽의
바위산으로 이루어져 외부의 침입을 방어하기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산성이 축조된 시기는 산성유지에서 삼국시대로 보이는 일부 유물이 수습된 바 있어
그 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 공민왕이 2차 홍건적의 난을 피해 몽진해 왔을 때
개축되었다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보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산성의 형태는 험준한 지세를 이용해 봉우리와 봉우리를 연결하는 포곡식(包谷式) 산성으로,
흙과 돌을 섞어 성벽을 연결시킨 토석혼축성(土石混築城)의 형태를 띤다.
지금도 산 곳곳에는 산성의 흔적이 역력하며, 장군의 지휘소였던 장대와 건물터,
성문터 등의 유구가 남아 있다.
해발 845.2m의 축융봉 정상에 다다르자, 구름 많은 날씨인데다가
바람길이 트였는지 갑자기 차가운 바람까지 불어와 몸이 저절로 움츠려든다.
우측에 보이는 망원경으로 반대편을 바라보면,
불쑥블쑥 솟아오른 청량산의 여러 암봉과 하늘다리가 잡힐 듯 다가온다.
청량산은 주왕산, 월출산과 함께 한국의 3대 기악으로 불리우며, 12개의 암봉을 가지고 있다.
축융봉도 청량산의 여러 봉우리 중의 하나이기에,
이 곳에서는 맞은편의 나머지 11개의 봉우리가 한 눈에 들어온다.
단풍은 이미 잔해만 남아있는 상태여서 영락없는 초겨울의 풍경 그대로이다.
청량산의 최고봉인 장인봉을 비롯하여 외장인봉, 선학봉, 자란봉, 자소봉,
탁필봉, 연적봉, 연화봉, 향로봉, 경일봉, 금탑봉, 그리고 이 곳 축융봉 등
12봉우리(육육봉)가 연꽃잎처럼 청량사를 둘러싸고 있으며,
봉우리마다 어풍대, 밀성대, 풍형대, 학소대, 금가대, 원효대, 반야대, 만월대, 자비대,
청풍대, 송풍대,의상대 등의 대(臺)가 있다.
산 속에는 신선이 내려와서 바둑을 두었다는 신선대, 선녀가 유희를 즐겼다는 선녀봉,
최치원이 마시고 정신이 맑아졌다는 총명수와 감로수 등의 약수가 있으며,
27개의 사찰과 암자 터가 있다.
원효대사가 창건한 유리보전(내청량사:경북유형문화재 47),
신라시대에 창건한 외청량사(응진전), 최치원의 유적지인 고운대와 독서당,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은신한 오마대(五馬臺)와 공민왕당(恭愍王堂),
공민왕이 쌓았다는 청량산성, 김생이 글씨를 공부하던 김생굴,
퇴계 이황이 수도하며 성리학을 집대성한 오산당(청량정사) 등 역사적 유적지도 많다.
아침의 따뜻한 햇빛을 그대로 받고 있는 응진전,
그리고 아직 채 걷히지 않은 짙은 그림자 속으로 숨죽이듯 몸을 숨기고 있는 청량사가
그 안쪽으로 살며시 들여다 보인다.
각각의 이름을 가진, 편마암으로 이루어진 여러 봉우리가 서로 몸을 기대고 있는 가운데,
좌측으로는 두 개의 봉우리 사이를 이어주는 하늘다리가 길게 걸쳐져 있다.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사람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 쪽도 마찬가지이다.
청량산의 하늘다리는 해발 800m지점의 왼쪽의 선학봉과 오른쪽의 자란봉을 연결하는
길이 90m, 바닥폭 1.2m의 현수교로, 2008년 5월에 완공 되었다. 이는 국내에서
산악지대에 설치된 다리로서는 가장 길고 가장 높아 청량산의 또 다른 명물이 되고 있다.
340kg/㎡의 통과 하중에 최대 100여명이 동시에 지나갈 수 있는 규모로,
올해에는 다리난간 중앙부분의 바닥재를 강화유리판으로 교체하여,
계곡아래를 훤히 내려다 볼 수도 있다.
시간이 지나자 내청량사의 얼굴이 그대로 드러난다.
오른쪽으로는 외청량사인 응진전이 금탑봉의 난간에 아슬하게 걸려있는 형국이다.
암벽이 3개의 층을 이룬 금탑봉은 청량산을 대표하는 봉우리이기도 하지만,
유달리 노란색잎을 가진 생강나무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풍경과 이름에서 공통점이 느껴지기도 한다.
마치 바벨탑을 연상케 하는 모습의 금탑봉...
그 위에 얹혀진 응진전을 지나 왼쪽 절벽으로 굽이 돌게되면,
청량사의 모습이 한 눈에 조망되는 어풍대를 만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