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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남평문씨 본리(인흥) 세거지(世居地).


고려말의 충신이며 원나라로 부터 목화씨를 가져와 우리나라 의복문화의 혁신을 가져온

충선공 문익점의 18세손인 인산재 문경호(文敬鎬)가 1840년을 전후하여 터를 잡은 곳이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에 소재.










낙동서원.


1708년(숙종 34)에 단양우씨의 현조인 우현보(禹玄寶)와 임진왜란 때 의병장 우배선(禹拜善)을

향사하기 위해 건립된 서원으로, 처음에는 덕동서원(德洞書院)이라 하였으며,

대원군 때에 철폐되었다가 1965년에 다시 건립하였다.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에 위치.










까치구멍집.


경북 북부지역 산간촌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형태의 집이다.

까치구멍집은 지붕 용마루의 양쪽에 공기의 유통을 위하여 구멍을 낸 모양이

까치 둥지와 비슷하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영양 남씨들이 모여 살았던 안동시 월곡면 도목동에서 1975년 영남대 민속촌으로 옮겨 왔다.










청도 석빙고.


경상북도 청도군에 위치한 1713년 (숙종39)에 축조된 얼음 저장 창고로,

남한지역에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석빙고이다.

보물 제323호.










영천지구 전적비


1950년 9월 4일 파죽지세로 남침한 북괴군 제2군단은 일거에 부산을 석권할 기도아래 

전력의 요충인 이곳 영천을 점령하고자 최후의 공세를 폈다. 

만약 영천이 떨어지면 유엔군은 울산-밀양을 잇는 이른바 데이비드손 방어선으로 

철수할 계획을 마련하고 있었다. 

이때 한국군 제2군단 장병들은 국가의 운명이 이 싸움에 승패에 달려 있음을 알자 분연히 일어섰다. 

그러나 병력과 장비의 열세로 인해 어찌할 바 없이 한때는 고읍 영천을 내어놓기도 하였었다. 

분노한 우리 군민들은 너도나도 총을 잡고 전장에 나섰다. 

이윽고 전열이 정비되자 유재흥 군단장은 이달 9일 총 반격을 감행하여 금호강변에서 

적을 포위 섬멸하고 백척간두에 섰던 조국을 위기에서 구하였다. 

그리고 북진의 기틀을 만들었다. 

1980년 10월 7일 준공.










영천지구 전승비


1950년 9월5일부터 12일간 치열하게 벌어졌던 국군 8사단과 

북한군 15사단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1958년 육군 제1205건설공병단이 건립했다.










울기등대 (구) 등탑.


울산광역시 소재 대왕암 공원에 위치한 등대로, 등록문화재 106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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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역사박물관.







호안끼엠 호수 주변에 위치한 구시가지.

이 구시가는 36개의 거리로 이루어져 '하노이 36거리'로 불린다.







하노이 구시가지에 위치한 복건회관.







호안끼엠 호수 옆에 위치한 이태조(李太祖) 공원.

하노이를 다스렸던 리(Lý) 왕조의 초대 황제인

리 타이 토(Ly thai To, 974~1028) 황제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베트남 하노이의 호안끼엠 호수내 작은 섬에는

18세기에 세워진 덴 응옥썬(Den Ngoc Son, 玉山祠)이라는 사당이 있다.

13세기 몽골의 침략을 물리친 베트남의 전쟁 영웅 쩐 흥 다오를 비롯,

문, 무, 의의 세 성인을 모시고 있다.

사당으로 가는 길은 붉은색의 테훅교(棲旭橋)로 연결되어 있다.







거북을 위해 세운 탑, 터틀타워(Turtle tower).


전설에 따르면

대월국 후 레 왕조의 태조가 된 레러이(黎利)가 호수에서 용왕의 보검을 얻었고, 

그 검으로 명나라와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자신의 왕조를 세웠다.

그 뒤 태조 레러이는 호수 위에서 금빛 거북을 만났는데, 

태조에게 스스로를 용왕의 사자라 밝힌 거북은 평화가 찾아왔으니 

앞서 용왕께서 주셨던 보검을 돌려주도록 계시했고, 

태조는 호수 한복판에서 가까운 작은 섬에 그 보검을 묻었다.

이후 호수는 오늘날과 같은 호안끼엠(還劍)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고,

검을 묻은 섬에는 훗날 거북을 기리는 탑이 세워졌다.

이러한 호안끼엠 호수의 전설은 수상인형극으로 각색되기도 했다. (위키백과)


호안끼엠(還劍)은 반납한 검이란 의미로 '호금'이라는 아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1842년에 지어진 호아퐁 탑 (Tháp Hòa Phong).

프랑스 식민시절에 우체국을 건립하기 위해 사원을 없애는 바람에

지금은 탑만 남았다.







베트남 혁명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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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포항시 북구 기북면 오덕리 덕동마을에 위치한 용계정(龍溪亭).


                               이곳은 예로부터 덕(德)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산다고 해서 

                               덕동(德洞)마을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덕동마을은 양동마을에 살던 사의당(四宜堂) 이강(李壃, 1621~1688) 공이 

                               거처를 정하고 360여 년간 대를 이어 살면서 여강 이씨 집성촌을 이루었고 

                               자손 대대로 덕동을 문사(文士)의 마을로 만들었다.

                               이 마을은 제4호 기록마을로 조선 후기 문중 사당을 이해하는데 

                               사료적 가치가 있는 여주 이씨 가문의 세덕사 관련자료를 

                               비롯하여 마을의 사회 · 경제적 이면상을 이해할 수 있는 18세기 

                               고문서 등을 소장하고 있다.







                               용계정의 후원이라 할 수 있는 좌측 출입문.


                               용계정은 세덕사의 부속건물인 강당으로 사용되었으며 1868년(고종 5년)의

                               서원철폐령으로 사라질 뻔 하였으나, 마을 주민들이 용계정을 세덕사(터)에서 

                               분리하기 위해 밤새도록 담을 쌓아 철폐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용계천 바위 벼랑에 세워진 용계정.

건너편 정계(亭契)숲이 있는 연어대(鳶魚臺)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경상북도지정 유형문화재 제243호로 수백 년된 은행나무와 

향나무, 백일홍 등이 용계정을 둘러싸고 있다.


돈독한 효심과 심박(深博)한 학문으로 사헌부 대사헌 겸 성균관 

좨주(祭酒)로 추증(追贈)되었으며 운천서원(雲泉書院) 및 

덕연세덕사(德淵世德祠)에 제향(祭享)되셨던 농재 이언괄(聾齋 

李彦适, 1494~1553)선생의 사대손인 사의당 이강 공이 1687년에 

착공한 것을 손자인 진사(進士) 시중(時中, 1667~1738)이 완성하였고, 

그후 시중의 손자인 정응(鼎凝, 1743~1796)이 1778년에 중수한 것이 

지금에 이른다.

용계정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누정(樓亭)으로 익공계(翼工系)의 

팔작(八作)집이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06호, 오덕동(吾德洞) 이원돌(李源乭) 가옥.


이 건물은 조선 선조 때 길주목사를 역임한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 

1556~1625)가 임진왜란 후 손녀 사위인 이강에게 양도한 가옥이다.

이강은 다시 차남 덕령(德齡)에게 물려주어 후손들이 거주하게 했다.

가옥의 명칭은 이강의 9대손인 이원돌의 이름을 딴 것이다.

정면 4칸, 측면 6칸의 목조와가인 이 가옥은 '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안채와 사랑채가 'ㄷ'자형으로 대문을 들어서면 부속채와 더불어 

'ㅁ'자형의 안마당을 구성한다.

안채는 자연석 기단 위에 1칸 대청과 왼쪽으로 부엌과 안방, 오른쪽으로 

건넌방이 있는 맞배지붕으로 된 납도리집이다.

조선 중기 주택으로 당시의 시대상 및 생활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81호, 오덕동(吾德洞) 사우정(四友亭) 고택.


이 건물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의 조부인 

정언각(鄭彦慤, 1498~1556)이 청송부사로 재직할 당시 풍수지리에

밝은 청지기가 일러주는 길지(吉地)에 건립한 것으로 전한다.

사각형의 담장으로 둘러싸인 바깥마당을 들어서면 '一'자형의 

사랑채가 있으며 사랑채는 정면 7칸, 측면 1칸 반으로 앞쪽으로 

4개의 방이 붙어 있다.

그 왼쪽으로 대문간, 오른쪽으로 2칸의 누마루가 배치되어 있다.

사랑채는 1m 가량의 자연석을 쌓아 기단을 세운 간결한 수법의 

납도리집이다.







포항 오덕리 근대한옥.

1947년에 건립되었으며 등록문화재 제373호이다. 


이 가옥은 '一'자 모양의 안채와 'ㄱ'자 모양의 사랑채,

'一'자 모양의 아래채로 구성된 근대기 튼 'ㅁ'자형 한옥이다.

안마당을 중심으로 건물이 집약 배치된 배치 형식과 기능적인 

평면 구성, 규격화된 재목을 사용한 합리적인 구조 수법, 

머름이 없는 키 큰 창호, 서양 창호에 영향을 받은 판문, 

수장 공간의 발달 등 근대기 한옥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1930년경 덕동 사설학당 건립, 1950년 폐교...

이 생태연못은 지난 20년간 학교 운동장으로 사용되었다. 

왼편의 바위는 전교생 조회시 구령을 하던 장소로 운동장이 

있었음을 알리는 유일한 흔적이다.


2006년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한 덕동마을의 숲은

마을 들머리의 송계(松契)숲과 마을 앞 용계천 건너편의 

정계(亭契)숲, 그리고 그 너머 너른 연못(호산지당)가에 

있는 섬솔밭으로 나뉜다.







덕동마을은 천혜의 자연조건과 독특한 문화를 높이 평가받아 

지난 1992년 문화부 지정 제15호 '문화마을'로, 2001년에는 

'환경친화마을'로 지정되었으며, 이 마을의 숲은 2006년 

산림청과 생명의 숲이 실시한 제7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대상의 영광을 안았다.

그리고 2011년에는 제4호 '국가기록사랑마을'로 지정 되었다.


이 작은 마을에는 민속전시관도 들어서 있다.

200년이 넘는 사주단자, 마을의 내력을 담은 고문서 등 

2천여점의 각종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참고/ 현장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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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시각으로 바라본 일상속의 사진 나부랭이 / 작품성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저 '시간을 기록한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셔터를 눌러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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