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 보이는 산 정상부의 구조물이 바로 영일 장기읍성(迎日 長鬐邑城)이다.
사적 제386호로 경북 포항시 남구 장기면 읍내리에 위치해 있다.
산성의 역할을 겸한 읍성으로 해발 252m인 동악산에서
해안쪽인 동쪽으로 뻗어내려오는 지맥 정상에 축성된 형태이다.
읍성이란 지방의 관아와 민가의 취락지를 함께 둘러서 쌓은 성으로,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 · 행정적인 기능을 함께하는 성을 말한다.
장기읍성은 산꼭대기에 있으면서 읍치로서의 기능을 갖추고 있어
읍성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문헌기록에 의하면 고려 현종 2년(1011)에
동으로는 왜적, 북으로는 여진족으로부터의 방어를 위해 토성으로 처음 쌓았고
조선시대 세종 21년(1439)에 석성으로 다시 쌓았다고 한다.
당시 읍성의 둘레는 2,980척(약 1,392m)에, 높이 10척으로
4개소의 우물과 음마지(飮馬池)로 사용되는 2개소의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성의 형태는 타원형으로 3개의 성문과 옹성, 그리고 치성을 갖추고 있다.
현재 읍성의 둘레는 1440m, 성벽높이 약 3.7~4.2m,
성벽 두께는 하부가 약 7~8m, 상부가 약 5m라고 한다.
옹성(甕城)은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 밖으로 또 한 겹의
성벽을 둘러 쌓아 이중의 성벽을 만드는 성곽 구조물로
월성(月城)이라고도 한다.
성내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옹성을 통과해야 하며,
성문에서 밖으로 돌출되어 있어 접근하는 적을 삼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장기향교.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성내에는 교육기관인 장기향교와 동헌터가 남아 있는데,
동헌은 면사무소 안으로 이전하여 보호하고 있다.
장기향교(長鬐鄕校)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27호이다.
이 향교는 1405년(태종 5)에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00년(선조 33)에 중건하였으며, 1785년(정조 9) 지방의 학문을
부흥시키기 위해 마현행단(馬峴杏壇)으로 이건하였다.
1931년에 읍성에 있던 구객관을 수리하여 명륜당과 대성전을
건립하여 위패를 옮겨 안치하였다.
향교의 제향공간은 대성전과 신문으로 구성되어 있고,
강학공간으로는 명륜당과 동재 및 장경각과 외삼문이 있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집으로,
앞으로 나올 수 없는 폐쇄형의 모습을 보여준다.
살미의 형식은 조선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고,
제향공간으로서의 엄숙함과 절제된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전체적으로 명륜당과 대성전이 병렬로 배치되고, 우측으로
대성전을 배치한 우묘좌학의 배치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읍성은 대부분 복원된 상태이나 한쪽 능선으로는
성곽이 새로이 복원, 축성되고 있다.
보기보다는 능선이 꽤나 가파르다.
또한 이곳 장기읍 일원은 조선시대 유교의 대가 우암(尤庵) 송시열(宋詩烈)과
실학파의 태두(太斗)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유배지이기도 하다.
가산산성의 진남문.
가산산성은 사적 제216호로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가산리에 위치해 있다.
이 산성은 해발 901m에서 600m에 이르는 계곡을 이용하여 쌓은 포곡식과
테뫼식이 혼합된 전체길이 약 7.6km의 방어 성곽이다.
이 산성은 내성, 중성,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내성은 조선 인조 18년(1640)에
경상도 관찰사 이명웅(李命雄)이 가산의 지리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축성을
조정에 건의하여 축조되기 시작하였는데 지형이 험준해 축조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 공사에 10만여 명 이상의 엄청난 인력과 막대한 자금이 동원되고
특히 감사의 가혹한 독려와 공사중 많은 사람의 희생으로 인하여 민심이 동요되자
이명웅은 여러차례의 탄핵끝에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부임지를 옮기기도 했다.
중성은 영조 17년(1741)에 관찰사 정익하(鄭益河)의 장계에 의해 왕명으로 완성되었고,
외성은 숙종 26년(1700)에 관찰사 이세재(李世裁)가 왕명을 받아 축조하였다.
성내에 별장(別將)을 두어 성을 수호케 하고 인근의 경산, 하양, 신령, 의흥, 의성,
군위 지역의 군영 및 군량이 이 성에 속하도록 했으며 칠곡도호부를 산성 내에 두었다.
내성은 그 길이가 4,710보(약4km)이며, 동서북의 문지 및 8개의 암문이 있다.
중성은 602보(약460m)이며, 성문루, 위려각이 설치되었다.
외성은 3,754보(약3km)이며, 남문 및 암문 3곳이 설치되었다.
이 성의 주 출입구는 외성의 남문이다. 현재 성내의 건물들은 남아 있지 않고
건물터만 남아 있으나 대부분의 성벽 및 암문은 원형을 남기고 있다.
안개가 밀려온다.
비가 내린 뒤여서인지 나뭇잎이 흔들릴 때마다 후두둑 물방울이 굴러 떨어진다.
치키봉에 올라 능선을 타고 가산의 정상을 향한다.
좁은 산길의 좌우측으로는 나무가 우거져 있기는 하지만
내려다 보니 생각보다 경사가 심하다. 그런길이 계속 이어진다.
한참을 걷다보니 주위를 조망할 수 없는 가산의 정상 표지석이 갑자기 나타났다.
가산은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과 동명면에 걸쳐 있는 산이다.
높이는 901.6m로 정상은 좁고 평탄한 분지이나 산 아래쪽으로의 형세는
깎아지른 절벽이거나 급경사로 되어 있다.
가산 정상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내려간 자리에 있는 암석으로 이루어진 봉우리이다.
저 아래로는 그대로 아뜩한 절벽이다.
유선대인지 용바위인지...
누군가가 안내판 하나 없다고 투덜대며 지나간다.
허긴, 이름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겠는가.
그저 와서 보고 느끼면 그만인 것을...
산성의 중문, 근래에 복원된 탓인지 옛맛은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 느낄 수가 없다.
가산바위로 향하는 길의 일부는 신작로 같이 훤히 뚫려 있다.
이곳 가산은 팔공산도립공원에 속해 있으며, 유적답사를 겸한
하이킹코스로도 이름이 나 있다.
시종일관 나무가 하늘을 가리고 있어 시원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가산바위. 가산산성(架山山城) 서북쪽 성벽 사이에 위치한 바위로서
가암(架岩)이라고도 부른다.
이 바위의 상면은 80평 규모의 넓은 평면으로 되어 있으며 사방을 훤히 조망할 수 있다.
바위 상면 동단에는 큰 구멍이 나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신라시대 고승이었던
도선(道詵, 827~898)이 산천을 편력하면서 지기를 잡기위해
이 구멍에다 쇠로 만든 소와 말의 형상을 묻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 관찰사 이명웅이 성을 쌓으면서 없애버렸다는 전설이 있다.
넓다란 바위가 녹음이 우거진 숲 사이로 삐죽히 고개를 내밀고 있다.
가산바위, 물론 이곳 아래로도 낭떠러지이다.
비록 안개가 끼여있어 시계는 흐리지만,
가산바위에서의 조망은 시원하다.
저 아랫쪽은 동명면 학명리이다.
지난 11월초, 지나가는 가을의 뒷 꽁무니라도 잡아 볼 양으로 서둘러 나섰던 봉화 청량산.
언젠가 꼭 한번은 가 보리라 생각하여 마음속에 담아 놓고만 있던 곳이다.
청량사를 찾기 전에 먼저 청량산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다는 축융봉(祝融峰)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산성 입구의 표지판이 정상까지가 2km로 1시간 10분여가 소요됨을 알린다.
언덕길로 처음 한 구비를 돌아들면 바로 최단거리 코스인 산성길이 나오는데,
그 성곽을 따라 오르면서 밟게되는 계단이다.
얼마간 오르다 보면 만나게 되는 밀성대(密城臺).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청량산으로 와서 산성을 쌓고 군사들을 훈련시킬 때,
명령을 어긴 죄인을 절벽 끝에서 밀어 처형했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그 자리에는 세워진지 얼마되지 않아보이는 전망대가 계단이 통제된 채로 서 있다.
산성 또는 계단... 오르는 길은 깨끗하게 정비된 상태라 그 어느 쪽이라도 좋다.
당시 정상부위에서는 산성의 복원작업이 한창이었다.
청량산성은 예로부터 군사적 요새였다.
이 지역은 삼국시대부터 고구려와 신라의 각축장이었고,
천연요새로서의 지형적 요건들을 충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곳의 지세는 산 앞으로는 낙동강이 휘감아 돌아 나가고, 험준한 천인절벽의
바위산으로 이루어져 외부의 침입을 방어하기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산성이 축조된 시기는 산성유지에서 삼국시대로 보이는 일부 유물이 수습된 바 있어
그 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 공민왕이 2차 홍건적의 난을 피해 몽진해 왔을 때
개축되었다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보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산성의 형태는 험준한 지세를 이용해 봉우리와 봉우리를 연결하는 포곡식(包谷式) 산성으로,
흙과 돌을 섞어 성벽을 연결시킨 토석혼축성(土石混築城)의 형태를 띤다.
지금도 산 곳곳에는 산성의 흔적이 역력하며, 장군의 지휘소였던 장대와 건물터,
성문터 등의 유구가 남아 있다.
해발 845.2m의 축융봉 정상에 다다르자, 구름 많은 날씨인데다가
바람길이 트였는지 갑자기 차가운 바람까지 불어와 몸이 저절로 움츠려든다.
우측에 보이는 망원경으로 반대편을 바라보면,
불쑥블쑥 솟아오른 청량산의 여러 암봉과 하늘다리가 잡힐 듯 다가온다.
청량산은 주왕산, 월출산과 함께 한국의 3대 기악으로 불리우며, 12개의 암봉을 가지고 있다.
축융봉도 청량산의 여러 봉우리 중의 하나이기에,
이 곳에서는 맞은편의 나머지 11개의 봉우리가 한 눈에 들어온다.
단풍은 이미 잔해만 남아있는 상태여서 영락없는 초겨울의 풍경 그대로이다.
청량산의 최고봉인 장인봉을 비롯하여 외장인봉, 선학봉, 자란봉, 자소봉,
탁필봉, 연적봉, 연화봉, 향로봉, 경일봉, 금탑봉, 그리고 이 곳 축융봉 등
12봉우리(육육봉)가 연꽃잎처럼 청량사를 둘러싸고 있으며,
봉우리마다 어풍대, 밀성대, 풍형대, 학소대, 금가대, 원효대, 반야대, 만월대, 자비대,
청풍대, 송풍대,의상대 등의 대(臺)가 있다.
산 속에는 신선이 내려와서 바둑을 두었다는 신선대, 선녀가 유희를 즐겼다는 선녀봉,
최치원이 마시고 정신이 맑아졌다는 총명수와 감로수 등의 약수가 있으며,
27개의 사찰과 암자 터가 있다.
원효대사가 창건한 유리보전(내청량사:경북유형문화재 47),
신라시대에 창건한 외청량사(응진전), 최치원의 유적지인 고운대와 독서당,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은신한 오마대(五馬臺)와 공민왕당(恭愍王堂),
공민왕이 쌓았다는 청량산성, 김생이 글씨를 공부하던 김생굴,
퇴계 이황이 수도하며 성리학을 집대성한 오산당(청량정사) 등 역사적 유적지도 많다.
아침의 따뜻한 햇빛을 그대로 받고 있는 응진전,
그리고 아직 채 걷히지 않은 짙은 그림자 속으로 숨죽이듯 몸을 숨기고 있는 청량사가
그 안쪽으로 살며시 들여다 보인다.
각각의 이름을 가진, 편마암으로 이루어진 여러 봉우리가 서로 몸을 기대고 있는 가운데,
좌측으로는 두 개의 봉우리 사이를 이어주는 하늘다리가 길게 걸쳐져 있다.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사람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 쪽도 마찬가지이다.
청량산의 하늘다리는 해발 800m지점의 왼쪽의 선학봉과 오른쪽의 자란봉을 연결하는
길이 90m, 바닥폭 1.2m의 현수교로, 2008년 5월에 완공 되었다. 이는 국내에서
산악지대에 설치된 다리로서는 가장 길고 가장 높아 청량산의 또 다른 명물이 되고 있다.
340kg/㎡의 통과 하중에 최대 100여명이 동시에 지나갈 수 있는 규모로,
올해에는 다리난간 중앙부분의 바닥재를 강화유리판으로 교체하여,
계곡아래를 훤히 내려다 볼 수도 있다.
시간이 지나자 내청량사의 얼굴이 그대로 드러난다.
오른쪽으로는 외청량사인 응진전이 금탑봉의 난간에 아슬하게 걸려있는 형국이다.
암벽이 3개의 층을 이룬 금탑봉은 청량산을 대표하는 봉우리이기도 하지만,
유달리 노란색잎을 가진 생강나무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풍경과 이름에서 공통점이 느껴지기도 한다.
마치 바벨탑을 연상케 하는 모습의 금탑봉...
그 위에 얹혀진 응진전을 지나 왼쪽 절벽으로 굽이 돌게되면,
청량사의 모습이 한 눈에 조망되는 어풍대를 만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