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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 의림지

 

 

 

 

 

 

 

 

 

경주 옥산서원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있는 서원으로, 한국의 14번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경주 양동마을에 포함되어 있다.

사적 제154호.

 

 

 

 

 

 

 

 

 

이언적(李彦迪)의 덕행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1572년(선조 5) 경주부윤 이제민(李齊閔)이 지방 유림의 뜻에 따라 창건, 1574년 사액 서원이 되었다.

1871년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 훼철되지 않고 존속된 47개 서원 중의 하나.

 

 

 

 

 

 

 

 

 

사적 제154호.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있는 독락당 (獨樂堂).

 

 

 

 

 

 

 

 

 

여주 이씨 구암공파(求菴公派) 파종택(派宗宅)으로

조선 중종 11년(1516년)에 건립되었다.

1964년 11월 14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413호로 지정되었으며,
2010년 양동마을의 일부 구성물로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독락당의 정자 계정 (溪亭).

 

 

 

 

 

 

 

 

 

경주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옥산리의 독락당(獨樂堂)에서 북쪽 700m쯤 되는 곳에 위치하며

13층이라는 층수와 더불어 기단부와 초층탑신의 양식, 탑신과 옥개석이 한 개의 돌로 조성되는 등
통일신라의 독특한 양식을 보이는 특수형 석탑이다.

1962년에 국보 제40호로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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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남평문씨 본리(인흥) 세거지(世居地).


고려말의 충신이며 원나라로 부터 목화씨를 가져와 우리나라 의복문화의 혁신을 가져온

충선공 문익점의 18세손인 인산재 문경호(文敬鎬)가 1840년을 전후하여 터를 잡은 곳이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에 소재.










낙동서원.


1708년(숙종 34)에 단양우씨의 현조인 우현보(禹玄寶)와 임진왜란 때 의병장 우배선(禹拜善)을

향사하기 위해 건립된 서원으로, 처음에는 덕동서원(德洞書院)이라 하였으며,

대원군 때에 철폐되었다가 1965년에 다시 건립하였다.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에 위치.










까치구멍집.


경북 북부지역 산간촌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형태의 집이다.

까치구멍집은 지붕 용마루의 양쪽에 공기의 유통을 위하여 구멍을 낸 모양이

까치 둥지와 비슷하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영양 남씨들이 모여 살았던 안동시 월곡면 도목동에서 1975년 영남대 민속촌으로 옮겨 왔다.










청도 석빙고.


경상북도 청도군에 위치한 1713년 (숙종39)에 축조된 얼음 저장 창고로,

남한지역에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석빙고이다.

보물 제323호.










영천지구 전적비


1950년 9월 4일 파죽지세로 남침한 북괴군 제2군단은 일거에 부산을 석권할 기도아래 

전력의 요충인 이곳 영천을 점령하고자 최후의 공세를 폈다. 

만약 영천이 떨어지면 유엔군은 울산-밀양을 잇는 이른바 데이비드손 방어선으로 

철수할 계획을 마련하고 있었다. 

이때 한국군 제2군단 장병들은 국가의 운명이 이 싸움에 승패에 달려 있음을 알자 분연히 일어섰다. 

그러나 병력과 장비의 열세로 인해 어찌할 바 없이 한때는 고읍 영천을 내어놓기도 하였었다. 

분노한 우리 군민들은 너도나도 총을 잡고 전장에 나섰다. 

이윽고 전열이 정비되자 유재흥 군단장은 이달 9일 총 반격을 감행하여 금호강변에서 

적을 포위 섬멸하고 백척간두에 섰던 조국을 위기에서 구하였다. 

그리고 북진의 기틀을 만들었다. 

1980년 10월 7일 준공.










영천지구 전승비


1950년 9월5일부터 12일간 치열하게 벌어졌던 국군 8사단과 

북한군 15사단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1958년 육군 제1205건설공병단이 건립했다.










울기등대 (구) 등탑.


울산광역시 소재 대왕암 공원에 위치한 등대로, 등록문화재 106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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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남대학교 내 민속촌으로 들어가는 진입로.

                               길 오른편으로는 구계서원이, 저 멀리로는 의인정사가 눈에 들어온다. 




                               ▶ 관련 / 2014/04/09 - [History] - 영남대학교 민속촌







까치구멍집.


이 집은 영양 남씨들이 모여 살았던 경북 안동시 도목리에서

1975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왔다.

경북 북부지역 산간촌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모습을 한 집으로,

소 마굿간을 비롯한 모든 편의시설을 집안으로 끌어 들이고 있는 것이

이 집의 특징이다.

공간이 닫혀있음으로 해서 비롯되는 오염된 공기는 지붕 양쪽에

공기 배출구를 만들어 뽑아 내었는데, 이 공기 배출구 모양이

까치집처럼 생겼다고 하여 이 집을 까치구멍집이라고 부른다.







                               우거진 송림 속에 위치한 쌍송정.







이곳을 방문한 지난 2014년 11월, 때마침 제례를 올리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영남대 민속촌 내 화산서원에서 봉행된 인동(仁同) 출신  

만회당(晩悔堂) 장경우(張慶遇, 1581~1656)선생의 석채례(釋菜禮) 의식이었다.

석채례란 새로 나는 나물과 생 채소로 스승을 기리는 제사를 올리는 의식을 말한다.







                               화산서당은 만회당 장경우 선생이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효종 2년(1651)에 세운 건물이다.







예복을 갖춰입고 제례에 임하는 참석자들.







머리에 갓과 유건(儒巾)을 쓴 어르신들의 표정이 자못 진지하다.







화산서당은 원래 칠곡군 석적면에 위치했었으나 이곳으로 이건 ·

복원을 완료하고 2009년 11월 4일 준공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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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대학교 교내에는 민속촌이 자리해 있다.

1975년, 교내부지 2만여 평 위에 조성된 이 민속촌에는 안동수몰지역과

경주, 칠곡에서 옮겨온 옛집들, 그리고 경주 인왕동 고분군 복원지 등이 있다.

이곳에서는 조선시대 여러 계층의 주거문화를 골고루 접해볼 수 있다.







쌍송정(雙松亭).


원래 경북 봉화군 물야면 북지리에 위치해 있던 것을 봉화 금씨

금혜 선생 후손들의 소개로 1975년 7월 이곳으로 옮겼다.

쌍송정은 금혜(1399년~1484년) 선생이 북지리의 본가 옆에 서재로 지은 

별당이다.

선생은 호를 쌍송정이라 하고 이 건물 앞에 용트림하는 소나무 두 그루를

심어 즐겼는데, 쌍송정이라는 건물 이름 역시 이로부터 유래되었다.

현재의 이 건물은 약 300년 전에 다시 세운 것으로 순조(1821년) 때

허물어진 곳을 크게 한번 손질한 후 여러 차례 부분적으로 수리하였다.







일휴당(日休堂).


일휴당 금응협(琴應夾) 선생이 제자를 교육하기 위하여 지은 별당으로,

원래 경북 안동시 예안면 오천동에 위치하였으나 안동댐이 만들어지면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금응협 선생(1526년~1586년)은 쌍송정 금혜 선생의 후손이며 벼슬은

익찬(翊贊)을 지냈고, 퇴계 이황의 문인(文人)으로 오천(烏川) 7군자(君子) 중의 한 사람이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조 정조 11년(1787년)에 다시 고쳐 지은 것이다.

건물 앞면은 툇마루이며 그 뒷편에 대청을 중앙에 두고 양쪽으로 방을 두었으며

팔작지붕을 얹었다.







화산서당(花山書堂).


원래 경상북도 칠곡군 석적면 중리에 소재했으며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20호이다.

화산서당은 조선 효종 2년(1651)에 만회당(晩悔堂) 장경우(張慶遇) 선생이 후진을

양성하기 위하여 석적면 성곡리 화산(花山) 아래에 건립한 서당이다.

그 후 사림(士林)의 공의(公議)에 따라 헌종 6년(1840)에 석적면 중리로 이건되었으며,

철종 4년(1853)에는 묘우(廟宇) 낙성과 더불어 화산서원으로 승원(陞院)되어

만회당의 봉향지소(奉享之所)가 되었다.

그러나 고종 8년(1871)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묘우는 훼철(毁撤)되고

강당만 남게 되면서 화산서원은 다시 화산서당으로 되었다.

1989년 화산서당의 강당과 대문채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20호로 지정되면서 

1990년 한차례 보수하였으나 주변의 개발로 인하여 건물이 점차 쇠락되어 가는 것을 보고

영남대학교가 2009년에 민속촌으로 이 건물들을 이건 복원하여 보존하고 있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서당으로서는 비교적 규모가 큰 건물인데,

평면은 6칸 우물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꾸민 형태이다.

5량가(五樑架)의 팔작 기와집이며, 전체적으로 조선시대 후기 건축양식의 특징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경주 맞배집.


원래 경주시 구황동 황룡사지에 있던 집으로 황룡사지 발굴과 함께

1976년에 현재 위치로 옮겨왔다.

이 집은 一자형 모양을 하고 있는데 왼쪽으로부터 부엌, 안방, 대청, 건너방 순으로 되어 있다.

맞배집의 특징 중 하나는 형식적인 공간나눔을 철저히 줄이고, 작은 공간에서도

여러 가지 기능을 수월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데 있다.

평민들의 가옥이라 할 수 있는 3칸 초가와 그 기본 모양과 기능이 같다고 할 수 있다.







                               놀이마당에는 기다란 그네가 설치되어 방문객들을 즐겁게 한다.







의인정사 담장 밖으로는 벚꽃이 만개해 있고...







의인정사(宜仁精舍).


조선조 성리학의 큰 스승인 퇴계 이황 선생의 후손으로 진보현감을 지낸 

이중철(李中喆)이 1887년에 지은 집으로, 원래 경북 안동시 도산면 의인마을에 위치했었다.

이 집의 택호(宅號)는 진보댁(眞寶宅)이었으나 1976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지면서

이 집에 있었던 의인마을의 이름을 따서 의인정사라 하였다.

이 집은 모두 56칸으로 전형적인 안동 양반집의 하나이다.

안채, 사랑채, 아래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사랑채는 바깥에 개방하여 남성공간의

중심으로 삼고, 안채는 중문으로 막아 여성공간의 중심으로 삼았다.

집 입구 대문 옆에는 행랑채를 세우고, 안채 부엌 뒷편 외진 곳에는

찬모방(饌母房)과 디딜방아간을 두었다.







구계서원(龜溪書院).


원래 경북 안동시 월곡면 미질동에 위치해 있었으나 안동댐이 들어서면서 

1975년에 현재 위치로 옮겨왔다.

구계서원은 고려말 유학의 큰 스승인 역동(易東) 우탁(禹倬) 선생을 모시고 있는 서원이다.

숙종 22년(1696) 도동서원(道東書院)이라는 이름으로 세워졌으며, 숙종 39년(1713)에 

이건하여 구계서원이라 개칭하였다.

고종 8년에 훼철되어 건양 1년(1896)에 복원되었다.







구계서원의 부속 건물인 모현사(慕賢祠).


서원을 옮겨올 당시에는 독역재(讀易齋) 건물밖에 없었으나 2000년 11월 27일 묘우(廟宇)인

모현사(慕賢祠), 모현사의 삼문(三門)인 내삼문(內三門), 동, 서재인 일신재(日新齋)와

시습재(時習齋), 그리고 서원의 대문인 진덕문(進德門)을 지으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참고 / 현장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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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으로 보이는 무변루(無邊樓)와 양쪽의 동·서재.

옥산서원(玉山書院)의 가장 핵심적인 공간인 구인당(求仁堂)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다. 


조선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였던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을 

배향(配享)하고 있는 옥산서원은 경주시 안강읍에 위치하고 있다.







옥산서원 현판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글씨이며 바로 그 뒤에는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가 쓴 또 다른 현판도 걸려 있다.

그리고 안쪽의 구인당(求仁堂) 현판과 무변루의 현판은 한호(韓濩), 

즉 한석봉(韓石峯)의 글씨라고 한다.



▶ 관련/ 옥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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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락당(獨樂堂)의 대표적 공간인 계정(溪亭). 

계곡을 따라 지어진 정자가 시원하다.

옥산서원 인근에 위치한 독락당은 회재 이언적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지은 집이다.



▶ 관련/ 독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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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442호인 관가정(觀稼亭).

'농사짓는 모습을 내려다보는 정자'라는 뜻으로, 실제로 

이곳에서는 양동마을 입구 반대편의 넓은 평야가 한 눈에 조망된다.

관가정은 조선 전기의 관리로서 중종 때 청백리로 널리 알려진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이 분가하여 지은 집이다.


경주시 강동면에 위치한 양동마을은 경주 손씨와 여주 이씨를 

중심으로 형성된 씨족마을이자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던 회재 이언적 선생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이전에 다녀올 때와는 달리 이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되어서인지 주차장도 넓게 만들어져 있고 문화관도 

반듯하게 지어져 있었다.







여강 이씨의 대종가인 무첨당(無忝堂).

조선 중기에 세워졌으며 보물 제411호이다.

무첨당이란 '조상에게 욕됨이 없게 한다'라는 뜻이다.


이 건물은 조선시대 상류층의 건물로 종가집 본채의 

사랑채와는 별개로 손님을 접대하거나 독서 등을 

할 수 있는 정자와 비슷한 성격의 사랑채이다.







무첨당 편액 오른편에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집권 전 이곳에 

들러 죽필(竹筆)로 썼다는 좌해금서(左海琴書)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영남(左海)의 풍류(琴)와 학문(書)'이라는 뜻이다.







중요민속문화재 제23호인 서백당(書百堂).


조선 전기에 지어진 가장 오래된 경주 손씨의 큰 종가로 

회재 이언적(1491~1553) 선생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서백당은 '참을 인(忍) 자를 1백번 쓰며 인내를 기른다'는 뜻이다.







사랑채 안마당에는 500여년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향나무가 서 있고, 그 뒤로는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위쪽의 기왓집은 보물 제412호로 지정된 향단(香壇)이다.

회재 이언적 선생이 모친 병환을 위하여 돌아왔을 때 중종이 지어준 

건물로 원래는 99칸이었는데 지금은 56칸이 보존되고 있다고 한다.



▶ 관련/ 양동마을



독락당은 물론, 양동마을 대부분의 집들은 실제로 주민들이 

생활하고 있는 공간이라 접근이 쉽지 않았다.

아예 문을 걸어 잠그고 접근을 원천 봉쇄한 집도 적지 않았다.

수 많은 관광객들에 의해 사생활이 침해를 받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풀이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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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충사의 입구에는 영사각이라는 다른 절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건물이 하나 서 있다.
                               이는 가람수호를 기원하는 외가람각으로써 가람각은 죽은 자의 
                               혼을 실은 영가가 경내로 들어가기 전에 잠깐 모셔지는 곳이다. 
                               이곳에서 영가는 속세의 때를 벗는 목욕을 하게 된다. 
                               전남 순천 송광사의 세월각, 척주각이 이와 같은 용도라 한다.








                               경남 기념물 제17호로,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재약산 자락에 
                               위치한 표충사, 그 절의 정문인 수충루의 모습이다.
                               다른 사찰에서는 보기드문 서원 정문 형태의 누각인데, 이는 사명대사의 
                               위패를 모시고 서산대사와 기허대사의 위패를 같이 모신 표충서원이 
                               표충사(表忠寺) 경내에 있기 때문이다.

                               표충사는 임진왜란때 공을 세운 사명대사(四溟大師)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국가에서 명명한 절이다.
                               654년(태종무열왕1)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죽림사(竹林寺)라 하였으며, 
                               829년(흥덕왕 4) 인도의 승려 황면선사(黃面禪師)가 현재의 자리에 중창하여 
                               영정사(靈井寺)라 이름을 고치고 3층석탑을 세워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것으로 전한다.
                               절 이름을 표충사로 바꾸어 부르게 된 것은 표충사(表忠祠)를 밀양시 
                               무안면에서 옮겨오면서 부터 라고 한다. 








왼쪽으로 부터 표충서원, 표충사(表忠祠), 유물관.
표충서원은 영조 20년(1744년) 왕명으로 조정에서 임진왜란때 구국구민하신
3대 성사를 모시고 매년 춘추로 제향을 올리게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종 8년(1871년)에는 대원군에 의해 서원철폐령이 내렸으나 이곳 표충서원은
훼철을 면했다고 한다.
또한 표충사는 임진왜란때 승병장으로 큰 활약을 펼쳤던 사명대사의 충정과
깊은 관련이 있어 이 유물관에는 사명대사와 관련된 16건 79점의 유물들이
소장되어 있다.








사천왕문에서 바라본 수충루.








                               근래에 조성된 사천왕문의 목조사천왕상.
                               표충사의 사당영역과 사원영역을 구분하고 있는 이 사천왕문은 
                               원래는 대광전 맞은편 우화루 앞쪽에 있었으나, 최근 사당영역을 
                               새롭게 조성하고 절의 진입로를 옮기면서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표충사 삼층석탑 석등









표충사 대광전(大光殿)과 팔상전(八相殿).









왼쪽부터 관음전과 명부전.









이곳 표충사에는 예전에 TV에 출연했던 경력이 있는,
그래서 이제는 유명인사가 다 되어버린 토끼스님이 살고 있다.
사람을 무서워 하지 않고 예불시간이 되면 스스로 알아서
법당으로 들어가 절을 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표충사에 터를 잡은지 오래, 그래서 이제는 사찰의 식구가 다 되어버렸다는 그 토끼...
더운 날씨 때문일까. 건물의 구멍 안으로 들어가 잠깐동안 바깥의 동정을 살피더니
이내 어둠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참고/ 표충사 홈페이지 및 현장 안내판, 네이버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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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도심에서 동남쪽으로 약 25km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산간마을인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그 곳에는 사성(賜姓) 김해김씨 일가를 비롯한 250여 가구가 상주하고 있다.
임금이 성(姓)을 내렸다 하여 '사성(賜姓)'이라 하는데 그 중 50여호가 이 가문이다.

우록리는 원래 우미산(牛尾山)아래에 위치한 소(牛)굴레 모양의 마을이란 뜻으로
우륵동(牛勒洞)으로 표기해 왔으나 임진란 때 귀화한 김충선 장군이
1600년에 '사슴과 벗하는 마을'이란 뜻으로 우록동으로 고친 후 정착하면서
지금까지 4백여년 동안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에 자리한 녹동서원의 관문인 향양문(向陽門)으로, 
                              사야가의 고향(해가 뜨는 곳)을 그리워한다는 뜻을 가졌다.
                              이 곳은 이름난 선현을 모신 다른 여느 서원과는 달리, 
                              전쟁에 참여했다가 적국에 귀순한 특이한 이력을 가진 
                              김충선이라는 장군을 모시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해 보인다.

                              모하(慕夏) 김충선(金忠善) 선생(호號:모하당慕夏堂 자字:선지善之)은 
                              사성(賜姓)김해김씨(金海金氏)의 시조(始祖)이시다.
                              본래 일본인으로 본 성명은 사야가(沙也可)이다. 
                              그는 1592년(선조25)임진란(壬辰亂) 때 21세의 나이로 가등청정(加藤淸正)의 
                              우선봉(右先鋒) 장(將)이 되어 우리나라 침공시 4월 13일 부산 동래에 상륙했다.

 








녹동서원.
조선조 임진, 정유, 병자년의 난에 큰 공을 세운 모하당 김충선 장군을 모신 서원으로
특히 일본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녹동서원 경내에 위치한 유적비(遺蹟碑).
                              모하당 김충선의 공적을 추모하여 1965년에 후손들이 건립하였다.
                              중국문명을 그리워한다는 뜻을 가진 모하당이라는 호를 지을 정도로 
                              그는 유교 문물과 예의를 따른 철저한 조선인이었다.









녹동사(鹿洞祠).








이곳에서는 모하당의 위패와 영정을 모시고 춘추로 제향하고 있다.








                              모하당의 영정.








모하당 묘소.
녹동서원 뒷산, 약500m 지점에 위치해 있다.









                              신도비(神道碑).
                              녹동서원 경내에 있으며 임진란 400주년을 기념하여 1992년 5월에 세웠다.
                              '그는 문과 예를 공경했고, 그것과 여생을 같이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는 불의 앞에서는 
                              그토록 경멸하던 칼을 들고 맞서 싸웠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우록마을이 일본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계기는 지난 92년 임진왜란 4백주년을 맞아
                              일본 오사카와 나고야에서 '왜 지금 사야가인가'라는 주제로 열린 심포지움이었다고 한다.
                              이후 '출병에 대의없다-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등 돌린 사나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비롯 
                              각 언론도 앞다투어 사야가를 재조명하고, 평화주의자로서 그의 학술적 관심이 널리 퍼지면서 
                              다양한 계층의 일본인들이 이 우록마을을 찾고 있다고 한다.
                              어찌됐든 한일우호의 가교로서 이 녹동서원은 톡톡히 그 역할을 다하고 있는 셈이다.



                              참고/ 현장 안내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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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종택(聾巖宗宅).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에 위치한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의 종택이다.








긍구당(肯構堂),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2호로 지정되었다.








분강서원(汾江書院)








앞 쪽의 분강서원과 저 멀리로 보이는 농암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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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위치한 도산서원의 입구. 사적 제170호이다.
도산서원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1574년(선조 7)에 지어진 서원으로, 퇴계선생 사후 6년 뒤인 1576년에 완공되었다.
1570년 퇴계선생이 돌아가시자, 1572년에 선생의 위패를 상덕사에 모실 것을 결정,
2년 뒤 지방유림의 공의로 사당을 지어 위패를 봉안하였고, 전교당과 동, 서재를 지어 서원으로 완성했다.
1575년(선조 8)에 한석봉이 쓴 '도산서원'의 편액을 하사 받음으로써 사액(賜額)서원으로서
영남유학의 총본산이 되었다.








입구로 들어서면 매화나무가 심어져 있는
조그마한 매화원(梅花園)이 나온다.








                              서원으로 들어가는 문인 진도문(進道門)은 아래쪽의 서당영역과 서원영역을 구분하고 있다.
                              외부와 경계를 짓는 문으로, 편액을 걸어 상징적인 예교(禮敎)의 의미를 갖게 하였다.








전교당(典敎堂).
보물 제210호로 유생들의 자기 수양과 자제들을 교육하기 위한 강당이다.
1574년(선조 7년)에 지었고 1969년에 수리를 하였으며,
앞 마당 좌우에는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있다.
팔작지붕과 온돌방, 대청마루로 이루어져 있으며,
현판글씨는 명필 한석봉이 선조의 앞에서 쓴 글씨라고 전해진다.








                              서원의 맞은편, 강 건너 석축위에 세워진 시사단(試士壇).
                              1792년(정조 16년) 규장각 각신 이만수를 도산서원에 보내 과시를 보게 한 곳이다.


                              참고/ 네이버백과사전, 현장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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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례문(復禮門), 경북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에 위치한 병산서원의 정문이다. 
                              서원의 정문은 삼문(三門)이 일반적인데, 병산서원의 솟을삼문은 
                              가운데 칸만 판문(板門)이고, 좌우로는 담장과 구분되는 벽채를 한 칸씩 두고 있다.
                              '복례'라는 이름은 논어 '克己復禮爲仁'에서 유래한다.
                              이는 공자의 가르침을 함축한 경구(警句)로서, '자기를 낮추고 예(禮)로 돌아가는 것이 
                              곧 인(仁)이다'라는 유학의 자기절제의 정신을 표현해 놓은 것이다.
                              원래 서원 측면에 있었던 것을 1921년 이 곳으로 이전시켰다.








입교당(立敎堂).
서원의 가장 핵심적인 건물인 강당으로,
원래의 명칭은 숭교당(崇敎堂)이었고 명륜당이라고도 불렀다.
'가르침을 바로 세운다'는 의미이며, 서원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뒷마당에서 바라 본 입교당의 마루와 만대루, 그리고 입구인 복례문.








신문(神門). 서원의 내삼문에 해당하며 향사(享祀) 때에 제관(祭官)들이 출입하였다.









만대루(晩對樓)는 휴식과 강학의 복합공간이다.
200여명을 수용하고도 남음직한 장대한 이 누각에는 다른 서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하고 아름다운 면이 있다.
휘어진 모습 그대로 서 있는 아래층의 나무 기둥들과 자연 그대로의 주춧돌, 커다란 통나무를
깎아 만든 계단, 굽이도는 강물의 형상을 닮은 대들보의 모습은 건축물조차 자연의 일부로
생각했던 조상들의 의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하다.








만대루의 2층 누각에서 여유로움을 맛보다.

'만대'는 두보의 시 '백제성루(百濟城樓)' 중 '푸른 절벽은
저녁무렵 마주하기 좋으니(翠屛宜晩對)'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그 이름처럼 해질 무렵에 2층 누각에 올라서 바라보는 낙동강과 병산의 경치는
이곳의 경치 중 으뜸이다.








서원 앞쪽으로 펼쳐진 넓은 백사장과 우뚝 솟은 병산(屛山).
그리고 그 밑을 흐르는 낙동강의 모습은 무척이나 시원스럽게 보인다.








달팽이 뒷간.
서원 밖 주소(廚所, 부엌) 앞에 있는 화장실로, 진흙 돌담의 시작 부분이
끝 부분에 가리도록 둥글게 감아 세워 놓았는데, 그 모양새에서 이름을 따왔다.
출입문을 달아 놓지 않아도 안의 사람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배려한 구조로,
지붕이 따로 없는 이 곳은 유생들의 뒷바라지를 하던 일꾼들이 사용하던 곳이다.








뒷간의 안쪽 모습이다.
400여년 전 서원건물과 함께 지어졌으며, 옛 기록에는 대나무로 벽을 둘렀다고도 전해진다.
병산서원의 부속건물에 포함되어 사적 제206호로 지정되었으며,
2003년 보수작업이 이루어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참고/ 병산서원 홈페이지 및 현장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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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의 외삼문으로서 정문 출입구인 역락문.
논어의 학이편에 나오는 '벗이 멀리서 찾아오니 즐겁지 아니한가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위치한 이 옥산서원은
1967년 3월 8일에 사적 제154호로 지정되었다.








이 서원은 조선시대의 성리학자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 선생을 제향하고
후진(後進)을 교육하기 위해 조선 선조(宣祖) 5년(1572)에 설립되었다.
당시 경주부윤이었던 이제민(李齊閔)은 안강 고을의 선비들과 더불어 선생의 뜻을 기리고자
독락당 아래에 이 사당을 세웠으며, 사액(賜額)을 요청하여 1574년(선조7)에
'옥산'이라는 편액과 서책을 하사받았다.








                              경내에는 사당인 체인묘, 강당인 구인당(求仁堂), 기숙사인 동재(東齋, 민구재 敏求齋)와 
                              서재(西齋, 암수재 闇修齋), 무변루(無邊樓), 역락문(亦樂門), 어서각(御書閣), 
                              장서각인 청분각(淸芬閣)과 회재 선생의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이 서원은 현존하는 서원 문고 가운데 많은 책들을 보관하고 있는 곳으로,
현재 두 곳에 나누어 관리하고 있다.
하나는 서원 경내에 있는 어서각(御書閣)소장본이고,
다른 하나는 이언적의 사저에 있는 독락당에 있는 소장본이다.
보관된 책 중에서 1513년에 간행된 '정덕계유사마방목(正德癸酉司馬傍目)'을 비롯, 
'삼국사기' 해동명적' 이언적수필고본일괄' 등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서원의 양식은 전면에 강학처(講學處)를 두고 후면에 사당을 배치한 전형적인
서원 건축구조로 되어 있는데, 중심축을 따라서 문루, 강당, 사당이 질서있게 배치되어
소박하면서도 간결한 모습을 보여준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서,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학문의 토론 장소로 사용된 강당이자 강학공간인 구인당(求仁堂)의 모습.
좌우로는 유생들이 수학하며 거처하는 재실로,
동재인 민구재(敏求齋)와 서재인 암수재(闇修齋)가 자리잡고 있다.
가운데 두 기둥 사이에 걸린 '옥산서원(玉山書院)'편액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이다.








                              문원공(文元公) 회재 이언적 신도비(神道碑).








서원 안으로 통하는 또 하나의 문인 세심문(洗心門).
서원 옆 계곡과 연결되어 있다.

16세기 영남사림파의 선구가 되는 이언적을 모신 만큼, 옥산서원은
조선 후기까지 영남사림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영향력을 발휘하였으며,
조선후기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렸을 때에도 제외된 47개의 서원 중 하나이다.
일제 말기에 화재로 옛 건물이 소실되었으나, 곧 복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남향으로 자리잡은 옥산서원이 끼고 있는 계곡에 위치한 세심대(洗心臺).
이 곳을 돌아 계류(溪流)가 흐르고 있다.
세심대는 너럭바위로서 용추(龍湫)에서 떨어지는 물로 마음을 씻고
자연을 벗삼아 학문을 구하는 곳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옥산서원내 곳곳에는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석봉(石峯), 한호(韓濩),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등의 명필이 쓴 현판들이 있으며,
이 곳에서 북쪽으로 약 700m 떨어진 곳에는 회재의 별장이자 서재(書齋)였던
독락당(獨樂堂)이 위치해 있다.


참고/ 네이버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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