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의 정문으로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된 흥화문(興化門).
원래는 현재의 구세군빌딩 자리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일제가 1932년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사당인 박문사(博文寺)의 정문으로 사용하기 위해 옮겨갔다.
광복 이후, 박문사는 폐지되고 그 자리에는 영빈관에 이어 신라호텔이 들어서면서
그 정문으로 사용되었다.
1988년 경희궁 복원사업이 시작되면서 흥화문을 경희궁지로 옮겨오게 되었는데,
원래의 자리에는 이미 구세군빌딩이 세워져 있어 본래의 자리에서
100m 뒤로 물러난 현재의 위치에 이전, 복원하였다.
흥화문을 지난 왼쪽편에는 서울시립미술관 경희궁 분관이 서 있고,
바로 그 안쪽 넓은 공간 뒤로는 숭정전으로 들어가는 정문 격인 숭정문(崇政門)과 마주하게 된다.
사적 제271호인 경희궁지(慶熙宮地).
이곳은 조선시대의 5대 궁궐로 꼽히는 경희궁 터다.
경희궁은 광해군 때 창건되어 조선 후기 동안 중요한 궁궐로 자리매김해 왔다.
창건 당시에는 경덕궁이라 하였지만,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의 시호
'경덕(敬德)'과 같은 발음이라 하여 영조 때 경희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합쳐 동궐이라 부르는데 이와 짝을 이루어
경희궁을 서궐이라고도 하였다.
원래 경희궁에는 정전인 숭정전과 편전인 자정전 외에도 임금의 침전으로
융복전(隆福殿)과 회상전(會祥殿)이 있었으며, 흥정당(興政堂)과
장락전(長樂殿)을 비롯한 수 많은 전각들이 지형에 맞게 어우러져 있었다.
궁에는 정문인 흥화문이 있고 동쪽에는 흥원문(興元門), 서쪽에는 숭의문(崇義門),
남쪽에는 개양문(開陽門), 북쪽에는 무덕문(武德門)이 있었다.
그러나 한일병합과 함께 조선총독부에 소유가 넘어가면서 전각들이 철거되어
이전되었고 궁역이 축소되어 궁궐로서의 면모를 잃어버렸다.
1915년 경희궁터에 경성중학교 설치, 해방 후에는 서울고등학교..
1978년 서울고등학교, 경희궁지를 현대건설에 매각.
1980년 서울고등학교 강남으로 이전, 폐허화...
현대건설, 20층 규모의 사옥 신축에 나서지만 당시 염보현 시장이
사들이면서 경희궁터 명맥 간신히 유지.
1986년부터 공원으로 개방, 이후 1988년 경희궁 복원 시작,
1994년 서울 정도 600년을 맞아 서울시립미술관 경희궁 분관 설치.
2002년 서울시, 126억원을 투입하여 숭전전, 자정전, 태령전 복원.
2008년 서울시의회 복원비 164억 전액 삭감, 공사중단...
이렇듯 경희궁은 조선왕조 5대 궁궐 중에서 일제는 물론, 우리 스스로에
의해서도 가장 처절하게 외면당하고 유린당하는 비운의 역사를 가지게 되었다.
지금의 경희궁은 몇몇 전각들이 복원되었지만, 대부분의 전각들은 사라지고
궁궐터도 많이 축소되어 예전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숭정전(崇政殿). 경희궁의 정전(正殿)으로 1618년(광해군 10)경에 건립되었다.
이곳 숭정전은 국왕이 신하들과 조회를 하거나 궁중연회, 사신접대 등
국가적인 공식 의례가 행해진 곳으로 경희궁의 으뜸가는 건물이다.
특히 경종, 정조, 헌종 등 세 임금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던
유서깊은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제가 경희궁을 훼손하면서 이곳에 있던 숭정전 건물을
1926년 일본인 사찰인 조계사(曹溪寺)에 팔았다.
원래의 숭정전은 법당 건물로 개조되었고, 현재는 동국대학교
정각원(正覺院)으로 사용되고 있다.
숭정전은 경희궁지 발굴을 통하여 확인된 위치에,
발굴된 기단석 등을 이용하여 복원되었다.
숭정전의 내부.
천장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용으로 장식되어 있다.
숭정전 뒤쪽으로는 자정문(資政殿)이 있다.
자정전(資政殿).
이곳은 경희궁의 편전(便殿)으로서 1617~20년(광해군 9~12)에 건립되었다.
편전이란 국왕이 신하들과 정사를 의논하거나 경연을 여는 등
일상적인 업무를 수행하던 곳을 말한다.
경희궁에서는 자정전 외에 흥정당(興政堂)도 정사를 논하거나
경연을 여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자정전은 편전으로 지어졌지만 숙종이 승하하였을 때에는 빈전(殯殿)으로
사용되었으며, 선왕들의 어진(御眞, 초상화)이나 위패가 임시로 보관되기도 했다.
자정전은 일제에 의해 훼손되었지만 서울시의 경희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발굴을 통해 확인된 위치에 현재와 같이 복원되었다.
태령전 뒤에 위치한 서암(瑞巖).
바위샘이라는 뜻을 가진 암천(巖泉)으로 불렸으며 바위 속에 샘이 있다.
본래는 임금님의 바위라는 뜻의 왕암(王巖)으로 불렸는데 그 이름으로 인해
광해군이 이곳에 경희궁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숙종 때에 상서로운 바위라는 뜻의 서암으로 고치고,
숙종이 직접 사방석(四方石)에 서암이라 써서 새겨두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후원에 위치한 서암에서 바라본 경희궁.
태령전(泰寧殿).
본래는 특별한 용도가 없었던 건물인데, 영조의 어진이 그려지자
1744년(영조 20)에 이곳을 중수하여 어진을 봉안하였고,
영조가 승하한 후에는 혼전(魂殿)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태령전에는 영조의 어진이 모셔져 있다.
창건 당시의 경희궁은 창덕궁과 마찬가지로 유사시의 이궁(離宮)으로
지어졌으나, 규모가 1,500여칸에 달할 정도로 크고 여러 임금이
이곳에서 정사를 보았기 때문에 여러모로 중요시되었다.
그러나 민족항일기 이후 지금까지는 초라한 길을 걸어오고 있다.
그나마 흥화문과 출토된 전돌, 그리고 남아있는 서암을 제외한
모두는 근래에 복원된 것이다.
따라서 경희궁이라는 이름외에 경희궁지라고도 불릴 수 밖에
없는 현실이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더구나 무료입장에도 불구하고 다른 여느 궁과는 달리
너무나 한적하기만 해, 지난 소외된 역사와 함께 적막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