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문(大漢門). 덕수궁미술관을 중심으로 보면 남문이나,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을 중심으로 보면 동문이다.
대한문은 대한제국 출범직후 환구단이 건설되고 궁궐의 동측이
새로운 중심이 되면서 원활한 기능 수행을 위해서 정문이 되었다고 한다.
창경궁도 정문이 동문이며 덕수궁의 원래 정문은 '인화문'이었다.
덕수궁 터에는 월산대군(1454~1488)의 후손을 비롯한
왕족들과 고관들의 저택이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서울의 모든 궁궐이 불타 없어지자 선조는 이 집들을 수용하여
임시로 거처하는 행궁으로 사용하였다가, 광해군이 1611년에 재건한 창덕궁으로
어가를 옮기면서 별궁인 경운궁(慶運宮)이 되었다.
이후 19세기 중엽까지는 궁궐로서 큰 역할이 없다가 1897년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경운궁을 대한제국의 으뜸 궁궐로 삼았고, 많은 전각들을 새로 세워
궁궐의 격식을 갖추어 나갔다.
또한 근대화를 향한 고종의 의지에 따라 궁 안에 여러 서양식 건물들을 세웠다.
그러나 1880년대 정릉동 일대는 각국 외교사절의 공관과 선교사들의 주택이
밀집해 있어서 경운궁의 궁역을 확장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기존의 미국, 영국, 러시아 영사관 사이로 궁역을 확장하다 보니
대지의 모양이 불규칙하게 되었다.
1907년에 고종이 퇴위하면서 선황제의 거처가 되어 궁의 이름을 덕수궁으로
바꾸었으며, 태평로를 확장하면서 궁역이 축소되었다.
고종이 승하한 후에는 북쪽 선원전과 서쪽 중명전 일대도 매각되어
원래 넓이의 1/3만 남게 되었다.
1933년에는 중심 부분과 몇 개의 양관(洋館)만 남기고 대부분의 전각들이
철거된 후에 공원으로 조성되어 일반에 개방되었다.
현재는 중심부인 중화전 일원과 정관헌 및 석조전과 같은 양관들이 남아있다.
덕수궁은 임진왜란과 구한말이라는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으뜸 궁궐로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던 상징적인 공간이었다.
또한 전통 규범 속에 서양식 건축을 수용한 근대적 궁궐이며, 주변 상황의
공간적 맥락에 맞추어 조성한 도시적 궁궐이었다.
함녕전(咸寧殿)은 고종이 거처하던 침전이자 승하하신 곳이기도 하다.
1904년 이곳에서 시작된 불로 경운궁의 거의 모든 전각이 불에 타고 말았다.
덕홍전(德弘殿)은 경운궁의 편전으로 고위관료와 외교사절들을 접견하던 곳이다.
전통양식의 건축물이지만 천장에 샹들리에를 설치하여 서양풍으로 장식했다.
현존 건물은 1911년에 건립되었다.
궁궐 후원의 언덕 위에 세워진 휴식용 건물인 정관헌(靜觀軒).
조용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공관이라는 뜻으로 후원의 정자기능을 했다.
한국과 서양의 건축 양식이 혼합된 건축물로 1900년경 러시아 건축가
사바찐(A. I. Sabatin)이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인조석 기둥을 줄지어서 내부 공간을 감쌌고,
동남서 세 방향에 베란다를 마련했다.
베란다의 기둥은 목조이며 기둥 상부에 청룡, 황룡, 박쥐, 꽃병 등
한국의 전통문양을 새겼다.
고종황제가 이곳에서 커피를 마시며 외교사절들과 연회를 즐겼다고 한다.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으로 들어가는 정문인 중화문(中和門).
1904년 화재 때 소실되었다가 1906년 중화문과 함께 중건되었다.
덕수궁의 정전이자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사신들의 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이 치뤄지던 중화전(中和殿).
1902년에 임시 정전으로 쓰던 즉조당(卽阼堂) 남쪽에 행각을 두르고
중화전을 건축해 궁궐의 중심 영역으로 삼았다.
천장의 용 문양이나 기단부 계단 중앙의 답도에 새긴 용 문양,
그리고 황색으로 칠한 창호 등에서 대한제국의 위상을 느낄 수 있다.
원래 중층 건물이었으나 1904년의 대화재로 이 일대가 모두 불타 버린 후
1906년에 단층으로 규모를 줄여 재건하였다.
중화문과 행각도 함께 다시 세웠는데 현재 행각은 동남쪽 모퉁이 일부만 남아 있다.
경복궁의 광화문, 창덕궁의 돈화문, 경희궁의 홍화문처럼 모든 궁궐은
정문이 남쪽에, 그리고 백성을 교화한다는 의미로 '화'자를 이름에 넣었다.
궁궐 정전의 어계(御階) 답도 가운데 용이 새겨진 곳은 이곳 중화전 뿐이라고 한다.
다른 곳은 봉황이 새겨져 있다.
어좌 위에는 닫집이라고 부르는 보개(寶蓋)를 달았으며, 용상 뒤에는
일월오악병(日月五嶽屛)을 세웠다.
천장 중앙에는 감입(嵌入)으로 보개천장을 만들어 황룡 두 마리를 새겨 놓았다.
창덕궁의 인정전과 창경궁의 명정전이 봉황인데 비해 이곳 중화전은 용인 것이다.
또한 경복궁 근정전의 용은 칠조룡(七爪龍)인데 비해 중화전은 오조룡이다.
석어당(昔御堂) 한쪽에는 살구나무가...
석어당(昔御堂)은 중화전의 동북쪽에 있는 건물로, 몽진에서 돌아온 선조가
16년간 거처하다 승하한 유서깊은 건물로 인목대비를 유폐시킨 건물이기도 하다.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쫒겨나면서 석어당 앞에 무릎을 꿇고있는 가운데
인목대비가 광해군의 잘못을 36가지나 열거하면서 폐위시키고
인조에게 옥새를 전했다고 한다.
이 건물도 1904년 불에 탄 것을 다시 지은 것이다.
덕수궁 내에 현존하는 유일한 2층 목조 건물로 1층은 방과 대청,
2층은 마루를 깐 공간으로 되어 있다.
단청을 하지 않았으며 취두, 용두, 잡상은 없다.
준명당(浚明堂)은 경운궁의 편전 성격을 띤 내전으로 고종이 정사를 살피던 곳이다.
1904년 화재 이후 다시 지어졌으며 함녕전으로 침소를 옮기기 전까지
고종의 침소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오른쪽은 즉조당으로 준명당과 복도각으로 연결되어 있다.
마침 공사중인지 가림막이 쳐져 있어 돌아볼 수가 없었다.
즉조당 일대는 임진왜란 때 선조가 거처했던 전각들을 보존한 곳으로
광해군과 인조가 왕위에 오른 곳이기도 하다.
1623년에 대부분의 전각과 땅을 원 주인에게 돌려 주었으나, 석어당과
함께 이 두 건물만은 보존하여 경운궁의 상징으로 삼았다.
현재의 석어당, 준명단, 즉조당 건물은 1904년에 불에 탄 것을
같은 해에 다시 지은 것이다.
원래 함녕전의 남쪽 대문이었던 광명문(光明門).
1938년에 석조전 서관을 증축하여 미술관으로 개관하면서 이곳으로 옮겨 왔다.
내부에는 자동 시보장치가 있는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 국보 제229호)와
1462년에 제작된 흥천사의 동종(興天寺銅鐘, 보물 제1460호), 그리고
화약을 이용하여 100발의 화살을 동시에 발사할 수 있는 위력적인 무기인
신기전기화차(神機箭機火車) 등을 전시하고 있다.
다소 어색하고도 뜬금없는 장면이기도 하다.
석조전(石造殿)은 고종이 침전 겸 편전으로 사용하기 위해 세운 서양식 석조건물로
영국인 건축가 하딩(G, R. Harding)이 설계하여 1910년에 완공하였다.
기단 위에 이오니아식 기둥을 줄지어 세우고 중앙에 삼각형의 박공지붕을
얹은 19세기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었다.
건물의 전면과 동서 양면에 베란다를 설치한 것이 특징이다.
후에 미술관으로 사용했고, 1938년에 서관(西館)을 증축하면서
그 앞에 서양식 분수정원도 조성했다.
서관은 의석조(疑石造)로 지은 몸체 중앙에 코린트식 기둥의 현관을 덧붙인 모습이다.
덕수궁 돌담길.
이 길을 걷다보면 서울시립미술관, 정동극장, 정동교회를 비롯하여
아관파천의 현장인 러시아공사관, 이화학당, 배재학당 등
역사와 문화의 현장과 마주하게 된다.
지난 2004년부터 덕수궁 원형복원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덕수궁 내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도 자리를 옮겼으며,
그 자리에는 전각을 복원해 대한제국 시절 정궁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할 예정이라 한다.
나무를 숙주삼아 하얀 뭔가가 붙어있다.
보아하니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닌 듯 하다.
마치 어떤 생명체의 발현을 준비하듯, 긴장감마저 느껴진다.
아마도 어느 순간이 되면 이 속에서 뭔가가 꿈틀거리며 튀어나와
홀로 이 세상 밖으로 내던져지게 되겠지.
정체는 알 수 없어도... 분명 이 보호막 아래에는
또 하나의 생명이 태동하여 미래에 대한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 있을 것이다.
아직은 시간이 필요한 듯, 쉽게 정체를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물론, 이 모두가 모양이 다른만큼 각기 다른 모습으로
이 세상과 만나게 될 것이다.
아니,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에는 이 세상 어딘가에서 아주 우아한
몸짓으로 삶의 즐거움을 목놓아 노래하고 있을런지도 모른다.
겨우내... 생명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그런 줄기...
그러나 지난 봄날, 이곳에도 삶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치 인간들 간의 관계처럼 복잡하게 얽히고 설키며
가지를 뻗어 그 영역을 넓혀 나갔다.
어쩌면 그것은 바로 삶의 질적인 확장을 의미하기도 하겠기에...
하나의 줄기를 기점으로
초록의 물감이 번져나가듯 맹렬한 기세로 뻗어 나갔다.
어찌보면 아주 절박해 보이기까지 했다.
정복자 마냥 당당한 기세로...
이제는 누가 뭐라해도 그들의 세상인 것 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누가 감히 이 거부할 수 없는 자연의 힘을 막을 수가 있겠는가.
비록 말라 비틀어진 듯한 모습이지만,
머지않아 저 불끈 튀어나온 핏줄 속으로 힘찬 생명의 에너지가
펌프질을 하듯 콸콸 넘쳐 흐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힘찬 맥박소리로 펄펄 살아 있음을 만천하에 고하며,
거침없이 이 땅을 박차고 올라 하늘로 하늘로 키를 키워 나가게 될 것이다.
담이란, 일정한 공간을 막기위해 흙과 벽돌 등으로 쌓아올린 것을 말하며,
서로를 구분하여 재산과 소유를 결정하는 기준점이 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지극히 개인적이며 부정적인 의미로 쓰입니다.
서로간에 담을 쌓는다는 말도 있듯이
그저 보기에도 결코 유쾌한 모습은 아닙니다.
벽이란 것도 이와 유사한 느낌인데요,
사전적 의미로는 특정한 공간을 구분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구조물을 말하며,
일반적으로 소리, 열, 광선, 바람, 비 등의 차단을 목적으로 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극복하기 어려운 한계나 장애, 그리고 관계의 단절을 의미하기도 한답니다.
담이든 벽이든, 또 다른 어떤 의미를 가졌건 간에
둘 다 부정적인 느낌으로 다가 오는건 매 한가지인 것 같습니다.
시선을 가로막은 만큼, 답답하기만 한...
차가운 담 만큼이나 그 안에 살고 있을 누군가의 마음도 꼭 그러할 것 같습니다.
결국, 담이나 벽은 마음을 열고 바라봐야 할 대상이기도 하지만,
타도하고 허물어 버려야 할 대상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찌보면, 꼭 관계의 단절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것도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이웃을 향한 소통의 통로로서 길을 만들기도 하니까 말이죠.
결국, 소통과 단절의 양면성을 가진것이 바로 벽이요 담인 것 같습니다.
마음의 벽을 허물고 다가서면 모두가 하나로 됩니다.
너와 나를 구분할 필요조차 없는...
혹, 이제까지 살아 오면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고,
그 이유로 보이지 않는 마음의 벽이 되어 서로간에 남아 있다면,
이제는 기꺼이 허물어 버리고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리하여 2010년 올해에는 더 진한 사람의 향기로 가득 채워지는,
그런 살기좋은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