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도대교는 부산 중구와 영도구를 연결하는 다리로 길이 214.6m, 너비 18m이다. 부산 최초의 연육교로서 1932년 3월에 착공되어 1934년 11월에 개통된 이 다리는 원래 중앙에서 양쪽으로 들어올려 배를 통과시키는 개폐교로 유명하였으나 1966년 중반 교통량이 늘고 도개교의 관리와 운영경비 등의 어려움으로 영원히 고정되는 불운을 맞았다.
이 곳에는 현인선생의 노래비가 있어 '굳세어라 금순아'노래를 들을 수 있으며, 우측으로는 1980년에 건설된 부산대교가 위치해 있다.
또한 좌측으로 보이는 부산타워의 등명기가 최근 국내에서 처음으로
관광용 등대로 지정되었다는 소식이다.
부산타워는 1973년 해발 69m의 용두산공원 정상에 세워졌으며,
등대의 등탑 높이는 120m로 국내 등대 가운데 가장 높다.
황령산쪽에서 바라 본 부산시청 주변.
■ 서울 코엑스(COEX) 인근........................................................................................................................................
2009년 4월, 서울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내려다 본 이제 막 봄이 시작된 삼릉공원. 도심에 이만한 자연공간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코엑스에서 코엑스사거리 방향으로...
인터컨티넨탈 호텔 남서방향.
뿌옇고 혼탁해 보이는 서울의 하늘과 땅...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는 사람들이 살아간다.
2012년 4월, 삼릉공원 방향.
2011년 3월, 역시 코엑스에서 현대아이파크타워와 마주했다.
2011년 3월, 한국종합무역센터와 코엑스아티움.
■ 서울 광화문광장...........................................................................................................................
선릉, 선정릉, 선릉공원 등으로도 불리우는이곳에는 조선 제9대 성종(成宗)과
계비(繼妃)인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尹氏)를 모신 선릉(宣陵)과
제11대 중종(中宗)을 모신 정릉(靖陵)이 있다.
선릉은 조선 성종의 능과 선릉 뒤편에 위치한 정현왕후 윤씨의 능을 합친 이름이다.
조선왕릉인 선릉, 정릉은 사적 제199호이면서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세계유산 조선왕릉은 왕과 왕비의 능 40기에 이른다.
선릉과 조금 비켜서 있는 정자각 앞으로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홍살문이 세워져 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丁字閣)까지 이어지는 길을 참도(參道)라 하는데,
길 한쪽은 다른쪽보다 조금 낮다.
왼편 높은 길은 신도(神道)라 해서 혼령이 다니는 신성한 길이고,
다른 길은 어도(御道)라 하여 왕이 다니는 길이라 한다.
중앙의 정자각 오른편으로 비각과 수복방(守僕房)이 보인다.
수복방은 제사 그릇을 보관하고 능을 지키는 관리인 수릉관(守陵官)
또는 청소일을 하던 관노비인 수복(守僕)이 지내던 집이다.
정자각 오른편에 위치해 있는 비각으로
능 주인의 업적을 기록한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져 있다.
비각 안의 선릉비 전면에는'朝鮮國 成宗大王 宣陵
貞顯王后 祔左岡 [조선국 성종대왕 선릉
정현왕후 부좌강(좌측 언덕에 모심)]이라 적혀있다
선릉. 봄을 맞아 잔디를 손질하고 있다.
조선 9대 왕인 성종은 세조(世祖)의 손자이자 덕종(德宗, 추존)의 둘째아들로,
세조 2년(1457)에 태어나 13세(1469)에 왕위에 올랐다.
재위 25년간 학문을 장려하고 제도를 정비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으며,
16남, 12녀를 두고 1494년 창덕궁에서 38세(1494)로 돌아가셨다.
성종은 경국대전을 반포하여 조선의 법전체제를 완성하였으며,
조세제도로는 관수 관급제(官收 官給制)를 실시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줄였다.
홍문관을 설치하고 동국여지승람, 삼국사절요, 동국통감, 악학궤범,
동문선 등 많은 서적을 편찬하기도 했다.
또한 국조오례의를 만들어 유교예법을 확립하였고
창경궁을 창건하였으며 만주족을 정벌하기도 했다.
선릉에서 내려다본 모습이다.
빌딩 숲 속, 도심과 격리된 또 다른 세상을 확인할 수 있다.
병풍석과 상석이 없고 난간석만 있는 정현왕후릉.
봉분 좌우에 세우는 기둥인 망주석(望柱石) 뒤쪽으로 석양(石羊)과 석호(石虎)가 서 있다.
석양은 죽은 이의 명복을 빌며 땅 속의 사악한 것을 물리친다는 뜻으로,
석호는 석양과 함께 능의 주인이 쉬는 곳인 능침(陵寢)을 수호하는 수호신의 역할을 한다.
정현왕후는 우의정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 윤호(尹壕)의 딸로
성종 11년(1480)에 왕비가 되었고, 중종 25년(1530)에 69세로 돌아가셨다.
정현왕후가 낳은 진성대군은 조선 제11대 왕인 중종이다.
능묘를 수호하는 능묘조각의 하나인 문석인(文石人)과 무석인(武石人)
각 한쌍이 마주보고 있는 가운데 그 뒤로 석마(石馬)가 지키고 서 있다.
그 외에 혼유석, 상석, 향로석 등 기타 석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봄날, 이곳 공원 안에는 싱그러움으로 가득하다.
수목이 울창해 시민들의 산책 및 휴식코스로
사랑받고 있기도 하다.
산책길을 걷다보면 만나게 되는 정릉(靖陵).
능 앞으로는 왕과 왕비의 신좌(神坐)를 모시고 각종 제사를 지내는
정자각(丁字閣)과 홍살문이 호위하듯 서 있다.
중종은 성종의 둘째 아들로 성종 19년(1488)에 태어나 1506년에
왕위에 올랐고, 재위 39년(1544) 57세로 돌아가셨다.
재위기간 중에는 현량과를 설치하였고 향약을 실시하여 향촌자치를
시도하였으며, 서원이 설립되기 시작하여 사림의 기틀이 되었다.
또한 주자도감을 두어 신증동국여지승람, 소학, 삼강행실, 이륜행실,
속동문선을 편찬하는 등 활자를 개량하여 많은 책을 펴냈으며
비변사를 설치하여 국방체제를 정비하기도 했다.
높이 위치해 있는 관계로 가까이에서는 잘 보이지 않아
멀리서 당겨본 정릉의 모습.
중종에게는 세 명의 정식 부인이 있었다.
첫번째 부인인 단경왕후 신씨는 고모가 연산군의 비 신씨라는 이유로
중종반정 이후에 반정세력에 의해 축출되었다.
두 번째 부인인 장경왕후 윤씨는 세자(훗날 인종)를 낳고 산후병으로
생을 마감하였으며, 세 번째 부인이 된 문정왕후 윤씨는 자신의 아들이
인종의 뒤를 이어 명종이 되었을 때 8년 동안이나 수렴청정을 행사하며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기도 했다.
원래 중종의 능도 지금의 고양시에 있는 희릉(禧陵)에 있었다.
희릉은 두 번째 부인인 장경왕후의 능으로 중종이 돌아가시면서 같이
장사 지내어 정릉으로 바뀌어 불리었지만, 문정왕후가 자신이 죽은 뒤
같이 묻히기를 희망하여 정릉은 지금의 선릉 옆으로 이장하게 되었고,
장경왕후의 능도 희릉으로 다시 고쳐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정릉은 장마철이 되면 정자각까지 물이 차는 바람에 명당자리가
아니라는 이유로 정작 문정왕후 자신은 지금의 태릉에 자신의 아들
명종과 함께 묻히게 되었다.
제관들이 제사를 준비하고 왕의 휴식을 위해 마련된 재실(齋室).
능을 관리하는 능참봉(陵參奉)의 집무실로 사용하였다.
원래는 성종대왕능과 중종대왕능에 각각의 재실이 있었으나
대한제국 시절에 2개소의 재실이 현재의 재실로 합쳐 지어졌다.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앞두고 대구스타디움은 마무리에 분주하다.
매표소 기둥에는 각 종목의 캐릭터가 나붙었고, 그 전면에는 한때
우승 세레모니를 펼치는 모습의 우사인 볼트의 대형
사진판이 세워지기도 했다.
국제육상경기연맹(IAAF)의 공식발표에 따르면, 이번 대구선수권대회는
202개국에서 1945명의 선수들이 참가하여 역대 최대 규모로 치뤄진다고 한다.
2011년 8월, 덕원고 뒷산에서의 조망이다.
흐린 날씨 속에서도 대구스타디움의 하얀 지붕만은
유난히도 눈부시게 다가온다.
2011년 4월, 대구스타디움의 북동쪽에서 내려다 봤다.
아래는 시지지역.
2011년 2월, 안심 초례봉에서 내려다 본 비슷한 각도의 대구스타디움.
거리가 먼데다가 시계도 좋지않아 뿌옇게 보인다.
산 아래 신서혁신도시지구와 대구스타디움 사이에는
금호강이 흐르고 있다.
2011년 5월, 스타디움 뒷편에서의 모습으로 이탈리아 몬도사에서
만든 푸른색 트랙이 시원해 보인다.
이 트랙은 아스팔트 위에 천연탄성고무를 이중으로 얹어
마치 용수철이 튕겨 나가듯 반발력이 좋아 특히 단거리 종목
선수들에게 유리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1976년 이후 지금까지 230개가 넘는 세계기록이
이 몬도트랙에서 작성되어 신기록 제조기로도 알려져 있다.
특히 이곳 대구스타디움의 몬도트랙은 그 중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제품이라고 한다.
2011년 5월, 대구스타디움의 남서쪽 방향이다.
저 멀리 안심지역과 시지 지역의 아파트를 배경으로
주경기장과 보조 경기장, 그리고 헬기장,
자동차 전용극장 등이 나란히 내려다 보인다.
2009년 11월, 이번에는 대구시내 쪽에서의 조망이다.
쾌적한 자연의 품속으로 안겨든 모습이다.
2011년 8월, 대구스타디움 서편에서의 모습.
바로 왼편으로는 대구스타디움몰이 들어서 있다.
그곳에는 MPC(메인프레스센터)와 IBC(국제방송센터)가 입주해 있어
지난 8월 19일 공식개관식을 가진 바 있다.
그러나 대형마트와 전문매장은 공사도중 잦은 설계변경과 시행사의
자금문제, 노동자들의 파업 등으로 대회 개막전 개장이 무산되면서
입점상인들이 반발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대구스타디움의 개괄적인 안내도이다.
현재 1주차장 (13번)에는 대구스타디움몰이 들어 서 있다.
서울의 중심, 서울의 상징이자 서울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는 곳.
서울 땅을 밟을 때마다 항상 먼발치에서 올려다 보기만 했던
바로 그 'N서울타워'.
드디어 그 곳에 가장 가까이 다가서는 순간이다.
이 케이블카에서 내리면 남산, 즉 서울의 랜드마크인 'N서울타워'와
바로 눈 앞에서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남산케이블카의 선로길이는 605m, 고도차는 138m이며
초속 3.2m의 속도로 정상까지 오르는데 3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그러나 1962년 부터 운행되어 온 이 남산케이블카가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는 기사가 눈에 띈다. (이곳 참고)
남산에 오르니 봉수대가 먼저 맞아준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1394년 도읍을 한양으로 옮긴 후 남산에 봉수대를 설치하였다.
1894년 까지 약 500여 년 동안이나 사용되었으며, 봉수대의 명칭은 남산의 옛 이름을
따서 목멱산(木覓山)봉수라고 하기도 하고 서울에 있다고 하여 경봉수라고도 하였다.
전국의 모든 봉수가 최종적으로 이곳으로 전달되도록 하였기에, 남산 봉수대는
중앙 봉수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남산봉수대는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5개소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고 한다.
'N서울타워'는 한국 최초의 종합 전파탑으로 1969년 TV와 라디오 방송을
수도권에 송출하기 위해 동양방송 · 동아방송 · 문화방송 등 3개의
민영방송국이 공동으로 투자하여 1975년에 완공되었다.
이곳에는 'KBS, 'MBC' 'SBS' TV와 FM송신 안테나를 비롯하여
'PBC', 'TBS', 'CBS', 'BBS', FM 송신 안테나 등이 설치되어 있으며,
전국 가청 인구의 48%가 이곳을 통하여 방송을 시청하고 있다.
2000년 YTN에서 인수하여 전면 개설공사를 시행하였으며,
2005년 'N서울타워'라는 이름으로 개장하였다.
'N서울타워'의 영문'N'은 'NEW', 'NAMSAN'을 상징한다.
이 타워는 총 높이가 해발 479.7m(남산: 243.0m, N서울타워: 236.7m)로
초속 56m의 강풍에도 안전하도록 설계되었다.
타워 곳곳에는 사랑의 자물쇠로 장식되어 있어 이곳의 명물이 되고 있다.
연인들끼리 혹은 가족, 친구들끼리 자신들의 사랑과 우정이 변치않고
영원하길 바라는 마음을 자물쇠에 적어 메달아 놓은 것이다.
그 소망처럼 이 자물쇠 나무에서는 형형색색, 영원불변의 꽃으로 피어나는 듯하다.
공간마다 빼곡히 채워진...
그 하나 하나에 담긴 정성과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 오는 듯,
웬지 따끈한 분위기다.
남산 전망대에서 내려다 보는 조망은 일단 시원하다.
그러나 시야는 무척이나 흐리다.
모르긴 해도, 저 멀리 흐르는 한강 바로 그 너머로 높이 솟은 건물은
또 하나의 랜드마크인 63빌딩인 것 만큼은 확실한 것 같다.
눈부신 태양이 뿌연 안개 속으로 침몰하기 직전...
이 도시에는 불빛이 하나 둘씩 나타나기 시작한다.
1초에 4m를 이동한다는 초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N서울타워 전망대에 오르는 사이 불빛은 더 많아졌다.
이제 도로에는 길게 불빛이 흐르기 시작한다.
신라호텔 방향...
맑은 날 이곳에 올라서면 서울 전역은 물론,
송악산과 인천항까지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상태로는 전혀 감조차 잡을 수가 없다.
이제 주위는 색을 완전히 잃어버렸고,
짙은 어둠만이 세상을 지배한다.
다만 점점이 흩뿌려 놓은 듯한 불빛들 만이
인간이 사는 세상임을 알려 주고 있다.
비록 아주 맑고 투명하지는 않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화려하다고 해야 할 서울의 밤풍경인 것이다.
그런만큼 멋지게 담아보려 했으나 삼각대도 없고... 역부족이다.
그저 그 감흥만 오롯이 두 눈에 담아 올 수 밖에...
N서울타워의 낮과 밤.
이곳을 빠져 나올 때에는 최신 LED조명으로 단장하여
낮에 보던 것과는 또 다른 모습으로 변신해 있는
N서울타워를 만나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