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자연의 풍경을 풍성하고 맛깔나게 만들어주는
양념같은 존재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꽃이 없으면 무엇보다도 나비가 사라질테고,
나비가 관여하는 많은 열매가 결실을 맺지 못하게 되겠지요.
그러면 자연히 인간도 많은 면에서 즐거움을 맛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꽃은 단순한 아름다움을 넘어서 이 세상에 없어서는 안될 아주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꼭 기억해야겠습니다.^^
사진적인 언어라는 표현이 마음에 드네요.ㅎㅎ
만약 사진이 말을 할 수만 있다면 그 말이 감상자에게 어떤 공감을 줄 수 있을지의 여부가
사진의 가치를 좌우하는 척도가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봤습니다.
억지 설득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공감을 불러 일으킬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사진으로서의 역할을 다한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죠.^^
감사합니다. 따끈한 커피 한 잔이 생각나는 시간이네요. 행복한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이번에는 시인이 되셨군요 ... 사진 하나하나도 멋있지만 ..
사이사이 한줄한줄의 코멘크가 .. 멋진 시 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모습들을
조금 더 깊게 .. 조금 더 다르게 바라보는 시선의 자유가 느껴집니다..
나뭇잎하고 창문의 물방울 보면서 말씀하신 부분이 좋아요 .. ^^
제가 사물에 대한 이런 고찰을 배워야하는데 말입니다.. ㅎㅎ
음... 시인이라... 저와 완전히 동떨어진 이미지이다보니 전혀 실감이 나지 않는데요.^^;;
하지만 그 말씀을 들으니 기분은 무지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흔한 소재들이지만 뭔가 다른 말로 포장을 하다보니 억지스러운 면도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이렇게 열린 마음으로 받아주시니 저로서는 그저 고마울 따름이지요.^^
어쩌면 매사에 사물들은 관심있게 바라봐 주는 것도 시인에 다가가는
하나의 방법일런지도 모르겠습니다.ㅎㅎ
행복한 오후시간 되시구요~~^^
문제는 세월이 흐를수록 시간의 조각들이 더 빨리 쌓여가는데에 있는 것 같습니다.
하루 하루가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
게다가 그 시간의 조각들이 손으로 잡을 수 있게 높이 쌓여가지 않고
그저 바람에 흩날리듯 조각나 사라져 버리는 듯한 느낌 뿐이니...
그저 인생무상이라고나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조금 남은 조각이라도 주워 위안이라도 삼자면 이제껏 담아온
사진 몇 장 정도라고나 할까요.;;
많이 부족하나마 항상 긍정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봐 주신데 대해
감사의 말씀을 전해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말씀대로 사진의 묘미를 즐기지 못하시는 분들을 보면 한편으로는 저 역시 안타깝더군요.
예술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저도 하는 사진인데 말입니다.ㅋㅋ
모르기는 해도 특히 호국불교를 표방한 그 시대에 있어서의 무예는
어쩌면 필연적이었는지도 모르겠네요.
물론 마음을 다스리는데에도 무예는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듣자하니 골굴사는 템플스테이에다 외국인까지 수련에 참가하고 있다고 하네요.
언젠가 TV에서도 봐 왔고 했기 때문에 지나는 길에 한바퀴 둘러봤지요.
만약 수련에 정진하는 모습이 사진에 담겨진다면 정말 근사할 것 같습니다.^^
그것도 유레카님의 시각에서 만들어진다면 더 더욱 말이죠.ㅎㅎ
뼈골(骨)자가 들어가서 더 특이한 것 같다는...ㅎㅎ
선무도의 기본동작으로 보이는 청동상들이 입구를 장식하고 있었지요.
그래서인지 절이라는 느낌보다도 어느 무술도장으로 들어서는 듯한 인상이
더 컸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사찰내 암벽 곳곳에 만들어진 굴들이 또 얼마나 강한 인상을 심어 주던지요.
이래저래 독특한 절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였습니다.ㅎㅎ
골굴사 .. 절의 모습은 떠오르지 않지만 .. 왠지모르게 이름이 낯익군요 ..
겸재선생도 그림으로 남길 정도이니 .. 그 유명세가 상당했던 듯 합니다.
사진으로 만나는 골굴사의 포스가 상당합니다...
거친듯하면서도 다정함이 느껴지는 골굴사 .. 가보고 싶은 곳으로 찜해둡니다..
선무도 시연시간은 꼭 챙기고요 .. 골굴사로 향하는 시간이 어여 오면 좋겠습니다.. ㅎㅎ
이미 알게 모르게 TV 등 매체를 통해 접해보셨을지도 모르겠는데요.
템플스테이와 선무도로 인해 저도 몇 번이나 본 기억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함월산 불교 유적지 중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되었다니
나름 유명세가 있었다고 봐야겠지요.^^
아무튼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절의 모양새와는 뭔가 다른,
이색적인 절인 것만은 틀림이 없어 보였습니다.^^
우리의 전통은 언제봐도 멋있습니다...
덕수궁의 수문장 교대의식에도 눈길이 더욱 가고..
외국인들도 많이 찾아와 .. 우리의 전통을 보고 감동하는 것 같습니다..
교대의식은 저도 보고 싶은대.. 이게 또 쉽지가 않네요 .. ㅋㅋ
솟대와 장승은 종종 만나지만 .. 그 속에 담긴 의미는 찾지 못했습니다..
솟대가 더욱 인상적이군요 ..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고 하듯
외국인의 눈에는 이색적으로 비춰졌던 모양입니다.^^
라오니스님처럼 우리의 전통 문화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으면 하구요,
교대의식은 특정한 시간에 맞춰서 하기 때문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보기가 어려울지도 모르겠네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59호인 삼릉계곡 선각여래좌상(線刻如來坐像).
삼릉계석불좌상을 지나 조금만 올라가면 만날 수 있다.
이 불상은 높이 10m 가량 되는 바위면에 새겨져 있다.
바위면의 중간쯤에 가로로 갈라진 홈이 파여 있는데, 위쪽에 불상을
조각하였으며, 연꽃대좌의 아랫단은 홈 아래에 걸쳐 있다.
얼굴 부분은 돋을새김을 하고 몸은 얕은 돋을새김인데, 나머지는
선으로 표현한 독특한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다.
얼굴은 큼지막하고 넓적하게 표현하고 민머리 위에 상투 모양을
크게 새겼는데 머리와 구분이 없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쳤으며 양손의 손목까지 덮고 있다.
왼손은 엄지와 셋째 손가락을 붙여 무릎 위에 얹고 오른손은 가슴 앞에 들어
엄지와 셋째 손가락을 붙이고 손바닥이 아래로 향하도록 하여
왼손과 오른손이 마주하게 하였다.
바위 속에서 얼굴만 내민 듯한 점이 특이하며,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상선암 바로 위쪽에 위치한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磨崖釋迦如來坐像).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58호이다.
이 불상은 남산의 북쪽 금오봉(金鰲峰)에서 북서쪽으로 뻗어 내리다가
작은 봉우리를 형성한 바둑바위의 남쪽 중턱에 위치해 있다.
자연 암반을 파내어 광배(光背)로 삼았는데 깎아내다가 그만둔 듯 거칠다.
높이 7m로 냉골(三陵溪)에서는 가장 큰 불상이고 남산의 북봉인
금오봉을 향하여 앉아 있다.
이 불상의 머리는 거의 입체불에 가깝고, 그 아래는 선으로만 조각되어 있다.
풍만한 얼굴에 눈썹은 둥글고, 눈은 반쯤 뜨고 입은 굳게 다물었다.
민머리에 턱은 주름이 지고 귀는 어깨까지 큼직하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져 있으며, 가슴 부분의 벌어진 옷 사이로 속옷의 매듭이 보인다.
오른손은 엄지와 둘째, 셋째 손가락을 굽혀 가슴에 올렸고 왼손은 무릎에 얹었다.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양 다리의 발 표현과 연꽃대좌가 아주 특이하다.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능선 안부에서 왼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신들이
바둑을 두었다는 바둑바위가 나온다.
그곳은 전망이 좋아 경주시내가 한눈에 조망된다.
포석정, 첨성대, 황룡사지, 천마총, 대릉원, 분황사 등...
갔던 길을 되돌아와 안부의 오른쪽으로 발걸음을 계속한다.
산행의 출발점인 삼릉과 주차장이 보이고...
이미 지나온 조그마한 암자인 상선암도 내려다보인다.
물론, 마애석가여래좌상도 예외는 아니다.
아랫쪽에서 바라본 것과는 달리 주위의 풍경과
어울리니 더 장엄한 느낌이다.
남산에는 고위봉(高位峰, 494m)과 금오봉(金鰲峰, 468m)의
두 봉우리가 솟아 있는데, 이 봉우리에서 흘러내리는 40여 계곡과
산, 밭들을 모두 합쳐서 남산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곳 금오산 정상은 주위가 나무로 가려져 있어 특별한 조망은 없다.
▶ 남산(南山)과 또 다른 산 망산(望山, 망성산)의 유래
옛날 경주의 이름은 '서라벌(徐羅伐)' 또는 '새벌'이라 했으며 새벌은 동이 터서
솟아오른 햇님이 가장 먼저 비춰주는 광명에 찬 땅이라는 뜻으로 아침 햇님이
새벌을 비추고 따스한 햇살에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변화가 아름답고
온갖 곡식과 열매가 풍성하여 언제나 복된 웃음으로 가득 찬 평화로운 땅이었다.
이 평화로운 땅에 어느날 두 신이 찾아왔다.
한 신은 검붉은 얼굴에 강한 근육이 울퉁불퉁한 남신(男神)이었고, 또 한 사람은
갸름한 얼굴에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 예쁜 웃음이 아름다운 여신(女神)이었다.
두 신은 아름다운 새벌을 둘러보고 "야! 우리가 살 땅은 바로 이곳이구나!"하고 외쳤고,
이 소리는 너무나 우렁차 새벌의 들판을 진동하였다.
이때 개울가에서 빨래하던 처녀가 놀라 소리나는 곳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산 같이 큰 두 남녀가 자기 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아닌가?
처녀는 겁에 질려 "산 봐라!"하고 소리 지르고는 정신을 잃었다.
"산 같이 큰 사람 봐라!"라고 해야 할 말을 급한 나머지 "산 봐라!"라고 외쳤던 것이다.
갑자기 발 아래에서 들려오는 외마디 소리에 두 신도 깜짝 놀라 그 자리에
발을 멈췄는데 그만 웬일인지 다시는 발을 옮길 수 없었다.
두 신은 그 자리에 굳어 움직일 수 없는 산이 되었는데 소원대로 이곳 아름답고
기름진 새벌에서 영원히 살게 된 것이다.
남신은 기암괴석이 울퉁불퉁하고 강하게 생긴 남산(南山)이 되었고, 여신은 서쪽에
솟아있는 부드럽고 포근한 망산(望山)이 되었다고 전해져 온다. (참고문헌/ 경주시지)
금오산 정상을 내려서니 제법 넓은 신작로길이 나타난다.
그 길을 따라 잠시 내려오다가 용장사지 방향인 오른쪽으로 접어들고,
얼마못가 보물 제186호인 경주 남산 용장사곡 삼층석탑과 마주치게 된다.
경사면 위에 세워져 있어 조망이 시원하다.
용장사(茸長寺)의 법당터보다 높은 곳에 세워진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자연 암반을 다듬어 아랫기단으로 삼고, 그 위에
면마다 기둥새김 셋이 있는 윗기단을 설치하여 산 전체를
기단으로 여기도록 고안되었다.
층마다 몸체돌 하나에 지붕돌 하나씩 3층으로 쌓았는데, 지붕돌과 몸돌을
별도의 석재로 조성하였다.
혹.. 오늘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실 때 몸이 피곤하지는 않으셨는지요?
간밤에 남산에 다녀오시느라...ㅋㅋㅋ
***님은 자연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신통력을 가지셨으니, 남산의 석불과도
깊은 대화를 나누시어 삶의 좋은 지혜를 많이 얻어오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웃님들에게도 함께 공유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며칠 남기는 했습니다만... 저 역시 미리크리스마스입니다.ㅎㅎ
이번 포스팅을 보니.. 남산을 꼭 가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간절해집니다..
자연의 모습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자연의 한 부분으로 남게되는..
그런 부처님들의 모습이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좋게 합니다...
저는 용장사곡삼층석탑이 인상적이더라구요.. 남산전체를 기단삼은.. ^^
가보시지 않으시고도 어쩌면 그렇게 가보신듯이 제대로 잘 알고 계시는지요.ㅎㅎ
말씀대로 오랜 세월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인지 이제는 자연의 일부분이 되어 있더라구요.
오히려 없어지면 더 어색할 것 같이 말이죠.^^
삼층석탑은 보기에는 저렇게 보이지만, 산 전체를 기단으로 삼았다고 하니까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규모의 탑일지도 모르겠네요.ㅎㅎ
저 역시 다른 곳도 마찬가지지만 이곳도 시원한 전망과 함께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답니다.^^
베이징 황성 내에는 네 개의 제단이 있는데, 남쪽의 천단(天坛) ·
북쪽의 지단(地坛) · 동쪽의 일단(日坛) · 서쪽의 월단(月坛)이 그것이다.
이름에서 보듯이 각각 그 대상이 달라 하늘 · 땅 · 해 · 달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 중 천단은 가장 중요시되던 제단으로, 환구단 · 황궁우 · 기년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년전은 명청시대 황제가 천신에게 제를 올리던 도교제단으로
매년 풍년을 기원했으며, 비가 오지않을 경우에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이곳의 넓이(273만㎡)는 무려 자금성의 네 배로, 현존하는
세계 최고 · 최대의 제전이기도 하다.
천단공원을 들어서면 기년전 입구까지 긴 회랑이 이어진다.
넓은 부지만큼이나 체육장과 잔디밭 · 광장등으로 잘 정리되어 있는 모습이다.
1406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명의 영락제 18년인 1420년에 완공된 이 천단은
건설 당시에는 천지단이라 불렸고, 1530년에 3개의 제단(일단 · 지단 · 월단)을
추가하면서 천단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1961년 최초의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중 하나로 선포되었고,
1998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으며, 천안문 ·
자금성 태화전과 함께 북경의 상징적인 건물이 되고 있다.
파란 지붕의 원형건물인 기년전이 눈에 들어온다.
단청은 황금빛과 청색으로 되어있다.
기년전은 3층 월대 위에 3층으로 지어진 건물로 유리기와를 올려 지붕을 만들었으며,
들보 · 마룻대 · 못 따위를 전혀 사용하지 않은 공법으로 지어졌다.
명나라 시대에는 위쪽에는 청색과 황녹색으로 되어 있었지만
건륭제가 1751년에 중건을 하면서 청색으로 바꾸었다.
1889년 낙뢰에 의해 소실된 후 1906년에 다시 재건되었으며,
높이 38m, 지름 32m의 규모라고 한다.
기년전의 앞에는 기곡단의 동배전, 서배전이 있다.
동배전에는 각종 제기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서배전은 제천예의관이라 하여 기년전의 역사를 전시해 두었는데
기년전 건물 내부의 모습을 함께 살펴 볼 수 있다.
황제가 이동하는 남북방향의 계단에는 가마가 지나가는
답도로 되어있고 나머지는 일반 계단이다.
1층 계단 답도에는 산과 구름, 2층에는 학, 그리고 3층에는 용이 새겨져 있다.
기년전의 내부는 황궁우와 마찬가지로 대들보를 쓰지 않은채
기둥만으로 천장을 지탱하고 있는 독특한 구조로 되어있다.
녹나무로 된 기둥은 모두 28개로, 아름다운 금빛무늬를 새긴 안쪽의 네개는
용정주라 하여 최상층의 처마를 지탱하고 있다.
용정주의 네 기둥은 사계절을 상징하고, 중간의 12기둥은 1년 12달을
바깥 12기둥은 1일의 12시각을 각각 상징하며, 둘을 합해
한 해의 24절기를 나타낸다고 한다.
보좌에는 황천상제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그 뒤로는 용과 봉황이
세밀하게 조각된 병풍이 세워져 있다.
기년전의 내부에서 위로 올려다 본 단면도.
황제가 된다는 것은 신과 교류하며 백성의 안위를 약속받는다는 뜻...
그러기에 제천(祭天) 의식은 예로부터 국가의 중요한 행사로서
역대 황제에 의해 행해졌다.
더불어...
그 옛날, 매년 이곳에서 백성들의 안녕을 위하여 하늘에 제를 올렸듯이
우리의 명절인 설날을 맞이하여 우리 이웃분들에게도
강녕(康寧)과 더불어 더 큰 행복이 내려지기를 기원해 본다.
구제역 때문에 어려움이 많네요.
그 때문에 설 명절인데도 시골에 내려가지 못하시는 분들이 적지 않은 것 같더라구요.
어서빨리 진정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날씨도 많이 풀린다 하니 산행하기에도 크게 어려움이 없을 것 같지요.
즐겁고 행복한 설 연휴가 되시길 바랍니다.^^
사람들이 하나도 없을때....광장에서 사진찍으로 파란하늘과 건물들이 너무 멎질듯 하다는 생각이
갑자기 스쳐 지나가네요...
물론 사람들의 분주한 모습들도 좋지만요...ㅎㅎ ^^
중국은 역시 어디가나..사람들의 모습이 정말 신기해요~~
놀이공원 규모보고서는 깜딱 놀랐습니다...^^
제주시에서 20여분 거리에 위치한 제주절물자연휴양림.
청정자연의 맑고 깨끗한 공기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이곳은,
휴양 숙박시설, 맨발지압 효과의 건강산책로, 교육시설인 강의동,
산림자료를 갖춘 전시관, 흥미와 체력을 겸한 도전 프로그램장,
오름 등산로, 쉼터, 약수터 등 여러가지 시설들을 갖추고 있다.
'절물'이란 지명은 옛날 절 옆에 물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 절은 없으나 약수암이 남아 있다.
특히 이곳 약수터에서 솟아나는 용천수는 신경통과 위장병에 큰 효과가
있다고 전해지며, 음용수로 제주시 먹는 물 제1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입구를 들어서자 마자 하늘을 찌를 듯 쭉쭉 뻗은
40여 년생의 삼나무 숲이 펼쳐진다.
은은한 숲향기 '피톤치드'가 전신을 감싸는 듯, 기분이 상쾌해지고
몸도 마음도 덩달아 맑아지는 느낌이다.
산책로를 따라 빽빽히 늘어선 나무들은 저마다 시원한 자태를 뽐내고...
또 다른 한켠에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익살스러운 표정의
장승들이 모여서서 환한 웃음을 터뜨리고 있다.
그래서 여행자는 혹시 몸에 무엇이라도 묻어서 그러나 하고 괜히 살펴보게 된다.
그것이 아니면 그저 따라서 크게 한번 웃어주면 될 것이고...
휴양림 내에 위치한 약수암에서...
단촐한 분위기의 사찰이다.
가볍게 산책을 하다가 변산바람꽃을 만났다.
2월에서 3월 사이에 꽃망울을 터뜨리기 때문에 보기 어렵다는 꽃이다.
쌍떡잎식물 이판화군 미나리아재비목 미나리아재비과의 여러해살이풀이다.
산지의 햇볕이 잘 드는 습윤한 지역에서 잘 자라며, 꽃받침이 꽃잎처럼 보이는데,
보통 우산처럼 생긴 꽃받침 5장이 꽃잎과 수술을 떠받들듯 받치고 있다.
처음에는 꽃받침 끝이 위로 향하다가 차츰 밑으로 처지면서
느슨하게 허리를 뒤로 젖히는 듯한 모습으로 바뀐다.
꽃받침은 6~7장이며 수술 수가 많고 열매는 4월에 익는다.
한국 특산종으로 학술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93년 부터인데,
학명도 발견지인 변산이 그대로 채택되었다.
변산반도, 마이산, 지리산, 한라산, 설악산 등지에 자생하며
관상용으로 심기도 하는데, 개체 수가 많지 않아 보존이 필요한 식물종이다.
미나리아재비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인 복수초도 이곳에서 만났다.
2~3월에 꽃이 피며, 5월에 다른 식물들이 막 신록을 뽐낼 때 이 복수초는 휴면에 들어간다.
꽃은 줄기 끝에 한 개씩 달리며 지름 3~4cm 정도이고 노란색이며 꽃잎은 20~30장 정도로 많다.
꽃이 황금색 잔처럼 생겼다고 하여 측금잔화(側金盞花)라고도 부르고,
설날에 핀다고 원일초(元日草), 눈 속에 피는 연꽃 같다고 설연화(雪蓮花),
쌓인 눈을 뚫고 나와 꽃이 피면 그 주위가 동그랗게 녹아 구멍이 난다고 하여
눈색이꽃, 얼음새꽃이라고도 부르는데, 강원도 횡성에서는 눈꽃송이라고도 부른다.
3월... 당시에는 황량해 보이기만 했던 이곳, 앞으로 초록이 무성해지면
말 그대로 순수한 자연을 마음껏 만끽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영광 법성포(法聖浦)는
인도 간다라 출신의 고승 마라난타 존자께서 실크로드와 중국 동진을 거쳐
옛 백제국에 불교를 전래하기 위해 백제 침류왕 원년(서기 384년)에
해로를 통해 입국할 때 최초로 당도하여 불법(佛法)을 전파하였던 곳입니다.
법성포의 백제시대 지명은 '아무포(阿無浦)'로써 '아미타불'의 의미를
함축한 명칭이며, 이는 마라난타 존자께서 대승불교 가운데
아미타불 정토신앙을 전래한데서 연유합니다.
그 후 '성인이 불법을 전래한 성스러운 포구'라는 뜻을 명확히 하여
법성포(法聖浦)라고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마라난타 존자는 법성포에 당도한 후 가까운 모악산(불갑산)에
최초로 불교사원을 창건하였으니 바로 '불법의 시원이요
으뜸이 되는 절'이라는 뜻을 간직한 불갑사(佛甲寺)입니다.
이처럼 영광 법성포는 불연(佛緣)이 깊은 곳이며 한국 불교문화사적 ,
정신문명사적으로 매우 뜻깊은 곳입니다.
기념성역을 향하는 길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굴비로 유명한 법성포가 있는 법성면의 전경이다.
사면대불.
아미타불을 주존불로 모시고 관음세지보살을
좌우보처로, 그리고 마라난타 존자가 부처님을
받들어 모시고 계신 모습을 다른 한 면에 배치한 사면불이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보일만큼 이 곳의 상징처럼 우뚝 서 있다.
참배 및 서해 조망용 누각인 부용루.
1층 석벽에는 간다라 양식의 불전도
부조조각이 새겨져 있으며
서해바다가 내려다 보인다.
아래는 초입의 안내판에 적힌 성역조성에 관한 내용으로
그 취지를 밝힌 것이다.
이역만리 인도 간다라에서 백제국까지 험난한 여정을 마다하지 않고
뭇 생령(生靈)들의 마음을 밝혀 행복의 길을 열어 줄 불법(佛法)을 전해준
마라난타 존자의 숭고한 행적을 현창하기 위하여,
그리고 위와같이 중요한 의미를 간직한 법성포 좌우두 일원에
불교문화적 역사성을 구체화하여 후세에 길이 남겨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백제불교 최초도래지 기념성역을 조성하였습니다.
백제불교 최초도래지의 기념 조형물들은 마라난타 존자가 대승불교 문화의
발원지인 간다라 출신이므로 간다라 불교조각과 건축양식을 투영하여
조성하였으며, 불교문화의 원류를 보고 느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부용루 1층 석벽에 조각된 여러 조각물 중 하나로
고행상이다.
좌측부터 정문(상징문),
관리동(실제로는 기념품판매점인 듯),
간다라유물관이 나란히 보인다.
앙코르로 부터 25km떨어진 이 사원은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 세운 사원으로, 붉은색 사암으로 만들어진 조각이 아름다운 사원이다. 사원의 규모는 작지만 어느 한군데 빠지지 않고 복잡하고 하려하게 조각된 이 사원은 보는 이 마다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왕코르왓이 남성적인 웅장함을 자랑한다면 반티스레이는 여성적인 섬세함을 뽑을 수 있다.
부분, 부분마다 섬세하게 조각된 벽면.
부분에 따라 투조를 하기도 했다.
외관이 섬세한 조각들로 이루어져 다른곳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문쪽의 상단부.
붉은색의 단단한 사암을 이용해 나무에 조각하듯 정교하게 새긴 그 기술이 놀랍다.
철저한 장인정신이 없으면 도저히 이루어낼 수 없는 그 어느 경지...
반티스레이는 1914년 프랑스 탐험대에 의해 발견됐다.
핑크빛 사암으로 건축된 반티스레이가 석양에 물들면 장및빛으로 활활 타올라
앙코르 유적 중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꼽힌다.
조각이 정교하고 아름다워 ‘여자의 성채’로도 불리는 반티스레이의 중앙탑에 조각된
네바타 여신상은 서유럽에서 ‘동양의 모나리자’로 극찬 받았던 작품.
프랑스 문화부장관을 지내기도 했던 소설가 앙드레 말로가 1923년 앙코르 유적을 방문했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