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역주행이라 괜히 일찍 핀 꽃들이 민망해하지나 않을런지...;;
다소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묘하게도 꽃은 피어나야 할 때를 잘 아는 것 같습니다.
물론 새로운 잎이 나거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꽃잎 스스로가
떨어져 내려야만 한다는 것도 알고 있을 테지요.
아마도 그것이 봄꽃 나들이를 서둘러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감사합니다. 싸늘한 바람 속에서도 꽃들의 온기를 느껴볼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여유를 늘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제가 사는 경기도 일대는 지금 벚꽃이 절정입니다...
말씀한신데로 .. 주말이면 아주 풍성한 벚꽃을 만날 수 있을 듯 합니다...
그 전에 저는 살짝 벚꽃 나들이를 다녀올 예정이긴 하지만요 ...
몇 해 전 진해 갔을 때는 밤이었습니다.. 군항제가 끝난 때 였지만 ..
벚꽃잎으로 반짝이는 여좌천의 모습은 환상이었지요 ..
봄날이면 벚꽃이고 .. 벚꽃이면 진해인듯 합니다.. ^^
벚꽃에 둘러쌓여 행복하시겠는데요.^^
물론 이번 기회에 화려한 조명과 함께하는 여좌천도 보고 싶었지만
이미 이전에 라오니스님을 통해서 충분히 경험한 바가 있었던터라...ㅎㅎ
바람은 아직 찬 느낌이 있지만 여기저기서 꽃망울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시기라서 이래저래 바쁘시겠는데요.
과연 주말 전 벚꽃나들이는 어느 곳으로 가실지...
뭐.. 곧 알게 될테니 굳이 여쭤보지는 않겠습니다.ㅎㅎ
직접 가서 보면 더 좋기는 하겠지만, 이렇게 사진으로만 보더라도
그 느낌만 공유된다면 감정상 그렇게 큰 차이는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사진담는 능력이 어느 정도 좌우는 하겠지만 말이죠.^^;;
그런면에서 본다면 느낌을 제대로 전달해 드렸는가에 대해
스스로 반성해보지 않을 수가 없네요.
부족하지만 열심히 살펴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 이유도 있다고 하네요.
실제 보기로도 다른 곳보다는 종류가 좀 더 다양했던 것 같습니다. ㅎㅎ
가을이 워낙 짧아서인지 단풍 절정시기를 맞추는 것도 쉽지는 않더군요.
단 한번이지만 이렇게 단풍구경이라도 해봤기에 가을에 대한 아쉬움은
크게 없는 것 같습니다.
이젠 완연해진 겨울날씨... 건강에 유념하시길 바랍니다.^^
때로는 느낌이나 마음보다 몸이 더 잘 아는 경우가 있지요.
일종의 지나친 행동에 대한 경고라고나 할까요.
살다보면 몸보다 의욕이 앞서기도 하는데, 자칫 그러다보면 몸을 혹사하게 되고
생체균형은 깨어지기 쉽상이지요.
제가 뵙는 ***님은 항상 의욕이 넘치시는 분이라서 그런지 그런 면에서는
조금 삐꺽거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항상 몸과 마음이 함께 조화로운, 그런 생활이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마지막 어느 동산위에 서 있는 나무 사진이 멋있습니다...
저도 나무를 좋아라 합니다.. 나무라는 제목의 노래도 좋고..
나무책도 좋아합니다... 나무가 많은 숲을 걷는 것도 좋구요..
나무에서 꽃망울이 터져나오고.. 푸른잎이 돋아나네요..
나무.. 그 자체로 좋네요... ㅎㅎ
이상하게도 그림으로 그려보면 모양이 자꾸 어색해지고 균형 또한 잡혀보이지가 않는데,
실제의 나무는 모두 다 그 나름대로 꼭 그 자리에 있어야만 할 것 같이
아주 자연스럽게 느껴지더라구요.
그래서인지 볼 때마다 너무나 멋스럽다는 생각을 먼저하게 됩니다.
아마도 그게 제가 나무를 좋아하는 이유일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미 우리에게는 너무나 친근해져버린 나무... 어떻게 미워할 수가 있겠습니까.ㅎㅎ
경상북도 군위군 고로면 화북리 화산에 위치한 인각사의 전경.
신라시대 지방 사찰로는 유래없이 큰 규모였다고 하나, 지금은 퇴락해
두어 채 절집만 남아있는 초라한 모습이다.
극락전은 지금 복원중이다.
인각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말사로서
신라 선덕여왕 11년(서기642)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지금은 도로변에 인접한 평지 사찰이지만 주변 지세는 심산오지로 남쪽에
화산(華山), 북서쪽으로는 옥녀봉의 가파른 지맥이 드리워져 있다.
절 앞으로 위천이 흐르고 그 북쪽에는 학소대가 병풍처럼 둘러져 있다.
화산의 화려하면서도 기품있는 모습이 상상의 동물인 기린을 닮은데다,
절이 앉은 자리가 기린의 뿔에 해당하는 지점이라 하여 절 이름을
인각사(麟角寺)라 하였다.
복원중인 극락전과 그 오른편의 명부전.
명부전은 인각사에 남아 있는 유일한 조선시대 건물로, 지장보살과
염라대왕을 비롯한 지옥시왕(地獄十王)이 모셔져 있다.
조선 숙종 연간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지며 정확한 건축연대는 밝혀지지 않았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장방형 건물이다.
인각사가 유명해진 것은 삼국유사를 쓰신 일연스님의 하산소로서 만년에
스님이 이곳에 머물면서 삼국유사를 완성했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일연스님의 비와 부도가 남아 있다.
고려 충렬왕 때 일연이 연로한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이곳에 거처하면서
전국 최대 규모이자 불교 9계 산문의 모임인 구산문도회(九山門都會)를
두 번이나 개최하였고, 생애 마지막 5년(79~84세) 동안 이곳에서
삼국유사를 집필했다고 한다.
삼국유사는 활자본으로 5권 2책으로 구성되었다.
편찬 연대는 미상이나 1281~1283(충렬왕7~9) 사이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현재까지 고려시대의 각본(刻本)은 발견되지 않았고, 완본으로는 1512년(조선 중종7)
경주부사(慶州府使) 이계복(李繼福)에 의하여 중간(重刊)된 정덕본(正德本)이
최고본(最古本)이며, 그 이전에 판각된 듯한 영본(零本)이 전한다.
본서는 김부식(金富軾)이 편찬한 '삼국사기'와 더불어 현존하는 한국 고대
사적(史籍)의 쌍벽으로서, '삼국사기'가 여러 사관(史官)에 의하여 이루어진
정사(正史)이므로 그 체재나 문장이 정제(整薺)된 데 비하여 '삼국유사'는
일연선사 혼자의 손으로 씌어진 이른바 야사(野史)이므로 체재나 문사(文斜)가
'삼국사기'에 못 미침은 사실이나, 거기서 볼 수 없는 많은 고대 사료들을
수록하고 있어 둘도 없는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문헌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고조선에 관한 서술은 한민족의 반만년 역사를 내세울 수 있게 하고
단군신화는 단군을 국조(國朝)로 받드는 근거를 제시하여 주는 기록이기도 하다.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을 모신 국사전(國師殿).
극락전 발굴로 인해 해체된 후 2001년 건립되었으며,
현재 중심 법당이 되고 있다.
절의 북동쪽에 자리한 소박한 모습의 산령각(山靈閣).
1963년에 건립되었으며 안에는 호랑이를 옆에 둔 산신탱이 있다.
인각사 경내는 현재 복원중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명부전, 강설루,
요사채 2동, 산령각, 비각, 신축 국사전 등이 전부이다.
그 외에 고려시대의 삼층석탑과 석불 등이 있으며, 절 동쪽 미륵당에는
훼손은 심하지만 솜씨가 뛰어난 불상이 모셔져 있다.
1991년부터 행해지고 있는 발굴을 통해 고려시대 뿐 아니라 통일신라시대의
유구가 확인되었고, 금동병향로를 비롯한 중요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인각사지는 사적 제374호로 지정되었다.
인각사 보각국사비각(普覺國師碑閣).
보각국사비는 보각국사탑과 함께 보물428호로 지정되었다.
고려 충렬왕 21년(1295년), 국사의 불제자인 법진스님에 의해 세워졌다.
보각국사비(普覺國師碑)의 앞면.
비문은 당시의 문장가인 민지가 왕명을 받들어 지었으며, 글씨는
명필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그 까닭에 무절제한 탁본이 계속되었고, 비석을 갈아 마시면 일연스님의
신통력으로 과거에 급제한다는 소문까지 나돌아 크게 훼손되었다고 한다.
현재 앞면에는 약 150여 자 , 뒷면에는 약 100여 자 만이 남아 있으며
비각을 세워서 보호하고 있다.
보각국사정조지탑(普覺國師靜照之塔).
일연스님의 부도로 보물 제428호이다.
일제시대 떄 도굴되어 절에서 약 2km 떨어진 둥딩마을 뒷산 부도골에
흩어져 있던 것을 1962년에 인각사로 옮겨 복원했다.
1978년에는 인각사 명부전 앞으로 이전 되었다가 지금은 복원공사로 인해
극락전 뒤에 자리하게 되었다.
재질은 화강암이며 형태는 팔각원당형(八角圓堂型)이다.
거의 자연석에 가깝게 슬쩍 다듬은 듯한 네모난 지대석 위에 팔각형의
하대석이 놓여 있다.
하대석에는 모두 16개의 연판이 희미한 선각으로 새겨졌고, 8각형의
중대석에는 우주(隅柱)로 구분된 각 면마다 동물이 새겨져 있다.
둔탁한 느낌의 상대석에는 각 면마다 복판연화문을 두고, 그 사이에
다시 홑겹의 연잎을 새겼다.
몸돌 정면에는 두 줄로 '普覺國師靜照之塔'이라 쓰고, 뒷면에는 문비를 조각했다.
나머지 여섯 면에는 사천왕과 보살입상을 돋을새김하였다.
지붕돌은 별다른 장식이 없이 추녀마다 귀꽃을 두었는데 마멸이 심한 편이다.
상륜부에는 앙화와 보륜, 그리고 타오르는 불꽃 모양의 무늬 속에 보주를 표현하였다.
전체적으로 형태가 둔하고 비례도 엉성한 편이며 조각 솜씨도 평면적이어서
국난에 시달려 피폐해진 당시의 어려운 정세와 시기적으로
양식적인 퇴화를 짐작할 수 있다.
일연스님의 부도 옆에 있는 인각사 석불좌상(石佛坐像).
원래 인각사 인근 괴산1리에서 옮겨온 것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39호이다.
재질은 사암이며, 한 매의 돌에 두터운 돋을새김으로 좌상과 광배를 조각했다.
전체 높이는 1.5m이며, 불상의 머리는 육계와 나발(螺髮)의 표현이 뚜렷하고
귀는 어깨까지 내려왔다.
넓은 안상(眼狀)에 입술은 두툼한 편이며 목에는 굵은 삼도가 있다.
불상의 수인(手印)은 석가모니가 성도하던 순간을 나타내는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양쪽 어깨를 감싸고 내려오는 통견(通肩)의 의습선(衣褶線)도 두껍게 표현되었다.
복부에 매듭이 있고 군의(裙衣)는 U자형의 주름을 이루며 흘러내리는데,
군의의 주름으로 인해 다리의 표현은 생략되었다.
광배는 훼손이 심해 문양은 알아볼 수 없고 형태로 보아 보주형(寶珠形)으로 짐작된다.
상호나 의습의 표현 등으로 미루어 고려시대의 불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가서지 마라
눈과 코는 벌써 돌아가고
마지막 흔적만 남은 석불 한 분
지금 막 완성을 꾀하고 있다
부처를 버리고
다시 돌이 되고 있다
어느 인연의 시간이
눈과 코를 새긴 후
여기는 천 년 인각사 뜨락
부처의 감옥은 깊고 성스러웠다
다시 한 송이 돌로 돌아가는
자연 앞에
시간은 아무 데도 없다
부질없이 두 손 모으지 마라
완성이라는 말도
다만 저 멀리 비켜서거라
- 문정희 시집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민음사)
'일연선사 생애관'에 모셔진 일연스님의 모습.
절 입구에는 깎아지른 듯한 바위가 있는데
옛날 학이 살았다고 하여 학소대(鶴巢臺)라 부른다.
인각사는 임진왜란 때 화약제조창이었다는 이유로 정유재란 때
왜군에 의해 파괴되었고 그 뒤 중창되었지만, 단 한 번도 옛 영광을
재현하지는 못했다.
이후 1990년대 말에는 댐 건설로 수몰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주민과 학자들이 나서서 겨우 지켜내기도 했다.
오라
華山기슭 麟角寺로 오라
하늘아래 두 갈래 세 갈래 찢어진 겨레 아니라
오직 한 겨레임을 옛 朝鮮 檀君으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한 나라였음을 우리 子孫 萬代에 消息 傳한 그이
普覺國尊 一然禪師를 만나뵈러 여기 인각사로 오라
아 여든 살 그이 촛불 밝혀 한 字 한 字 새겨간
그 燦爛한 魂 만나뵈러 여기 麟角寺로 오라
오라
渭川 냇물 인각사로 오라
痛哭의 때 이 나라 온통 짓밟혀 어디나 죽음이었을 때
다시 삶의 길 열어 푸르른 來日로 가는 길 열어
情든 땅 坊坊曲曲에 한 송이 蓮꽃 들어 올린 그이
보각국존 일연선사를 가슴에 품고 여기 麟角寺로 오라
아 여든 살 그이 촛불밝혀 한 자 한 자 새겨간
그 찬란한 혼 만나뵈러 여기 인각사로 오라
일연선사는 14세에 강원도 양양에서 출가하여 22세에 승과에 합격,
달성의 비슬산을 중심으로 수행하다가 44세에 경상도 남해의 주지로 부임,
나이 78세에 국사가 되었다지요.
그러나 그에게는 그를 떠나보낸 이후 70여년의 세월을 홀로 사신 어머니가 계셨기에..
마지막 효성을 다하고자 이듬해에 은퇴를 결심, 이곳 인각사로 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삼국유사는 그 때에 저술되었다고 하지요.
규모는 작지만 이나마 수몰 위기에서 지켜냈다는게 얼마나 큰 다행인지요.^^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 요행을 바라는 사람들은 탈이 나는게 당연하겠지요?ㅎㅎ
우리나라 대부분의 절은 산 속에 있지만, 인각사는 특이하게도 평지에 자리잡고 있지요.
그것도 908번 지방도로 바로 옆인데다가 규모도 작고, 거기에다 복원으로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라... 특히나 입구에 병풍처럼 둘러진 절벽에 시선을 빼앗기는 바람에
그냥 지나쳤다가 다시 되돌아 오기도 했다지요.^^;;;
사실, 이곳으로는 잘 가지 않게 되더군요.
그러나 현재 영천쪽에서 새로운 도로가 일부 개통이 되어 접근하기가
한층 더 수월해진 것 같습니다.
가보지는 않았지만, 조금 더 올라가면 다목적댐인 군위호가 있다는데
아마도 거닐기에는 더 없이 좋지 않을까.. 추측해 봅니다.ㅎㅎ
불사에 노고가 많으십니다.^^
아마도 일개 평범한 사찰이 아니라, 역사의 한 단편을 품고 있는
아주 중요한 사찰이기에 더 어려움이 크시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비각 하나 개축하는데 이렇게 과정이 복잡하고 어려워서야...
물론, 사적으로 지정된 이상 꼼꼼한 계획과 신중한 검토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겠지만,
오히려 그 계획과 절차 과정이 복원의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입니다.
어려움이 많으시겠지만, 추진중인 복원사업이 보다 효율적이고 신속하게 이루어져
하루빨리 역사 속의 온전한 모습 그대로 목격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모든 국민들로부터 사랑받는 사찰로 발전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감사합니다.^^
예전에 몇 번 그 초입을 지나면서 관심을 가져보기는 했었으나
정작 들어가보지는 못했지요.
그나마 이번에는 지인이 함께 동행하는 바람에 얼떨결에 갔더랬습니다.
그것도 원래 목적지가 아니라 지나치는 길이어서 자세히 들여다보지는 못했구요,
아마도 다시 한번 걸음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마침 제가 간 그날도 한 그룹의 탐방객이 모여들면서 해설사의 설명이 시작되었는데,
아이들 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큰 교육이 되겠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