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문(石門).
바위와 절벽 사이로 자연적인 출입구가 형성되어 있어
석문이라 붙여졌다.
이곳을 통과하면 이 골짜기의 또 다른 세계, 곧 선경(仙境)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석문이라는 글씨가 바위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또 다른 바위에 남아있는 글씨, 이로 미루어보아 옛날 이곳에는
산수정(山水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아닌게 아니라 그 사실을 입증하기라도 하듯, 최근 그 곁에는
조그마한 정자가 하나 들어섰다.
그러나 원래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산수정은 1893년 각남면 진사인 소강(小岡) 최익주(崔翼周, 1851~?)가
창건한 정자로, 고을의 인사들이 산수계(山水契)를 만들어
사계절 이곳에서 시를 짓고 읊었다고 한다.
이곳을 시정(詩亭)골이라 부르는 것은 여기서 유래한다.
1962년, 남산계곡에 있던 퇴락한 산수정의 목재와 기와를
화강지 언덕으로 옮겨와 화악루(華岳樓)를 지었다.
화악루.
화악루의 유래는 본래 남산계곡에 있던 산수정(山水亭)이다.
산수정은 자연속에서 풍월을 읊던 시인묵객의 선유지(仙遊地)로
이름이 높았으나 쇄락하여 무너진 채 복원되지 못하였다.
해방 후 산수와 시를 즐기던 우리 고장 선조들의 풍류를 잇고자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모아 화양보승회(華陽保勝會)를 조직,
단기 4292년(1959년) 화양읍에서 가까운 이 터에 정자를 세웠다.
창건의 뜻은 산수정의 유지를 잇는 것이나, 창건시 목조부재는
현 청도군청사 인근에 있었던 정자의 부재를 사용하였다고 전한다.
초창 이후 한 차례 중수하였고 2006년 청도군에 기부하여
군민의 재산으로 남게 되었다.
유하담(流霞潭).
'유하(流霞)'는 '신선이 마시는 좋은 술'이라는 의미도 있고,
글자 그대로 '흐르는 노을'을 뜻하기도 한다.
이곳의 경치에 취해 술을 마시면 그 술이 바로 유하주일 것이요,
햇살에 금빛 노을처럼 일렁이는 물결을 품었으니 그 또한 유하담인 것이다.
계곡과 정자가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이 되었다.
아마도 녹음이 짙어지면 또 다른 풍경이 되어 있을 것이다.
또 다른 누각.
조그맣게 조성된 광장에는 이제껏 거쳐왔거나 앞으로 마주치게 될
명소들을 알리는 표지석이 놓여있다.
남산계곡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는 소(沼).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게 크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도 그럴것이 이곳의 지형은 대체로 완만하다.
따라서 웅장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아기자기하다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릴 것 같다.
'기러기가 내려앉은 형상의 봉우리'라는 뜻을 가진 낙안봉(落雁峯).
낙안봉 일대는 큰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가운데
기러기 형상의 바위에 글을 새겨 놓았다. 이는 중국 화산의 남쪽 봉우리가 낙안봉이라 부른 것에서 유래한다.
금사계(金沙界).
'더 이상 세속(世俗)의 유람객은 올라오지 말라'는 뜻을 품고 있다.
금사계는 불교 용어로 '금모래가 펼쳐진 세계'를 의미하며 관세음보살의 주거처지를 나타내는 말이다.
이 계곡 위쪽에는 신둔사가 위치해 있다.
금사계 맞은편 높은 바위에는 주자가 지은 '무이구곡가' 중
제8곡의 마지막 시구에서 빌려온 '막언차지무가경
자시유인불상래(莫言此地無佳景 自是遊人不上來,
이곳에 아름다운 경치가 없어 유람객이 올라오지 않을 것이라
말하지 마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취한 것으로 여기서 끝이 아니라 계속해서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져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이 금사계를 끝으로 위쪽으로는 신둔사로 향하는
포장도로와 연결된다.
이 외에도 연주단(聯珠湍), 일감당(一鑑塘), 옥정암(玉井巖), 용항 등의 볼거리와 글씨가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외형상 이곳 남산계곡은 다른 여느 계곡과
크게 다를 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속에서 지난날 우리 옛 조상들의 풍류와 정취를
발견하고 그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다소 의외였다.
이 밖에도 이곳 인근에서는 보조국사가 손수 심었다는 수령
800여 년의 은행나무가 있는 적천사를 비롯, 죽림사 등
신라 고찰과도 만날 수 있다.
특히 남산계곡 초입에 있는 석빙고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청도읍성, 향교, 도주관 등
선조의 얼이 담긴 문화유적들을 함께 탐방할 수 있다.
남산계곡은 청도 화양읍 남쪽에 솟아 있는 남산(해발 870m)에서 발원해 화양읍내로 흘러드는 1.5km에 이르는 계곡이다. 군데군데 아담한 소(沼)들이 자리잡고 있는데다가 울창한 숲이 더해져 예로부터 이 고장 선비들이 즐겨 찾아왔으며, 자연을 벗삼아 한시를 읊으며 마음을 달래던 흔적들이 도처에 흩어져 있다. 남산 13곡이라 하여 13곳의 볼만한 곳이 있었다고 전해지기도 하는데 지금은 정확하지 않다.
작은 폭포인 '청수대'를 지나자 계곡의 암반 위에 올려진
음용지(飮龍池)라고 쓰여진 커다란 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물을 마시는 용의 모습을 닮은 웅덩이라는 뜻으로,
조선시대 때 극심한 가뭄시 군수가 직접 기우제를
지냈던 곳이라 하며 일명 기우단(祈雨壇)이라고도 하는데
주민들은 이곳을 용지골이라 부르고 있다.
계곡을 끼고 오르는 길은 대체로 완만한 편이어서 큰 어려움은 없다.
큰 바위에서 떨어져 나와 비스듬히 넘어져 있는,
백석뢰(白石瀨)라고 쓰여진 바위이다.
'흰 돌이 아름답게 펼쳐진 여울'이라는 의미이나
주위에 흰 돌이 남아있지 않아 예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봉화취암(奉和醉巖). 위쪽에 취암(醉巖)이라고 새겨진 바위가 또 하나 있다.
아들 도우엽(都宇燁)이 아버지 도필락[都必洛, 아호는 일취(一醉)]의
시에 운을 받들어 시를 읊었다고 해서 봉화취암이라 한다.
우엽은 자(子)이며 이름은 석만(錫晩)이다.
'취암아래 흐르는 천백 구비 물결 숲의 새소리 빗소리와 어우러졌네
온종일 더디게 앉아 있노라니 높은 바위에 사무치는 그리움이여'
이 바위에는 도우엽을 비롯하여 하두은(河斗銀)과 김극철(金克喆),
손종진(孫鐘震)의 시가 함께 새겨져 있다.
또 다른 바위에 새겨진 시 한 수.
길게 펼쳐진 반석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구름이 흐르듯
비단을 깔아 놓은 듯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 운금천(雲錦川).
운금천은 너럭바위 위에 흐르는 물과 큰 바위들로 이루어진
구역으로 선인들이 시를 읊으며 놀던 흔적들이 남아있다.
김학연(金學鍊)의 시 1수와 사람들의 이름이 보인다.
청도의 문사(文士)들이 시회(詩會)를 열고 풍류를 즐기던 취암(醉巖).
이곳을 중심으로 위 아래 4개의 바위에 우엽의 봉화취암 시 1수와
그 외 3수, 김윤하(金允河)의 시 1수, 운금천 바위에 김학연의 시 1수 등
총 11수의 한시가 새겨져 있다.
내용은 인생사의 부침(浮沈)을 노래하였으며, 모두 오언절구(五言絶句)에
성(聲)과 정(情)을 운자(韻字)로 해서 지은 시들이다.
또한 취암에는 도광(道光)18년 무술(戊戌)이라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1838년(조선 헌종4년)에 해당된다.
송나라의 대문호인 취옹(醉翁) 구양수(歐陽脩)의 풍모를 본받는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질양석(叱羊石).
길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데다가 잡풀에 가려 글씨가 잘 보이지 않는다.
'양을 부르는 바위'라는 뜻으로 질석성양(叱石成羊)이라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중국 위진시대 목동 황초평(黃初平)이 도사를 만나 금화산(金華山)의
석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의 형이 수년 동안 찾아다니다 겨우 만나 양은 어떻게 되었는지를
묻자, 산의 동쪽에 있다고 했다.
가서 보니 모두 흰 돌 뿐이었는데, 초평이 그 돌을 꾸짖으며
'일어나라'고 외치자 수 만마리의 양으로 변했다고 한다.
흰 돌이 많은 것을 두고 이렇게 부른 것이다.
만옥대(萬玉臺).
글씨가 쓰인 바위에 흘러내리는 물줄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 아니라,
맞은 편 벼랑 아래 층층의 폭포에서 시원스럽게 쏟아져 내리는
포말이 수만 개의 구슬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59호인 삼릉계곡 선각여래좌상(線刻如來坐像).
삼릉계석불좌상을 지나 조금만 올라가면 만날 수 있다.
이 불상은 높이 10m 가량 되는 바위면에 새겨져 있다.
바위면의 중간쯤에 가로로 갈라진 홈이 파여 있는데, 위쪽에 불상을
조각하였으며, 연꽃대좌의 아랫단은 홈 아래에 걸쳐 있다.
얼굴 부분은 돋을새김을 하고 몸은 얕은 돋을새김인데, 나머지는
선으로 표현한 독특한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다.
얼굴은 큼지막하고 넓적하게 표현하고 민머리 위에 상투 모양을
크게 새겼는데 머리와 구분이 없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쳤으며 양손의 손목까지 덮고 있다.
왼손은 엄지와 셋째 손가락을 붙여 무릎 위에 얹고 오른손은 가슴 앞에 들어
엄지와 셋째 손가락을 붙이고 손바닥이 아래로 향하도록 하여
왼손과 오른손이 마주하게 하였다.
바위 속에서 얼굴만 내민 듯한 점이 특이하며,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상선암 바로 위쪽에 위치한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磨崖釋迦如來坐像).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58호이다.
이 불상은 남산의 북쪽 금오봉(金鰲峰)에서 북서쪽으로 뻗어 내리다가
작은 봉우리를 형성한 바둑바위의 남쪽 중턱에 위치해 있다.
자연 암반을 파내어 광배(光背)로 삼았는데 깎아내다가 그만둔 듯 거칠다.
높이 7m로 냉골(三陵溪)에서는 가장 큰 불상이고 남산의 북봉인
금오봉을 향하여 앉아 있다.
이 불상의 머리는 거의 입체불에 가깝고, 그 아래는 선으로만 조각되어 있다.
풍만한 얼굴에 눈썹은 둥글고, 눈은 반쯤 뜨고 입은 굳게 다물었다.
민머리에 턱은 주름이 지고 귀는 어깨까지 큼직하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져 있으며, 가슴 부분의 벌어진 옷 사이로 속옷의 매듭이 보인다.
오른손은 엄지와 둘째, 셋째 손가락을 굽혀 가슴에 올렸고 왼손은 무릎에 얹었다.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양 다리의 발 표현과 연꽃대좌가 아주 특이하다.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능선 안부에서 왼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신들이
바둑을 두었다는 바둑바위가 나온다.
그곳은 전망이 좋아 경주시내가 한눈에 조망된다.
포석정, 첨성대, 황룡사지, 천마총, 대릉원, 분황사 등...
갔던 길을 되돌아와 안부의 오른쪽으로 발걸음을 계속한다.
산행의 출발점인 삼릉과 주차장이 보이고...
이미 지나온 조그마한 암자인 상선암도 내려다보인다.
물론, 마애석가여래좌상도 예외는 아니다.
아랫쪽에서 바라본 것과는 달리 주위의 풍경과
어울리니 더 장엄한 느낌이다.
남산에는 고위봉(高位峰, 494m)과 금오봉(金鰲峰, 468m)의
두 봉우리가 솟아 있는데, 이 봉우리에서 흘러내리는 40여 계곡과
산, 밭들을 모두 합쳐서 남산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곳 금오산 정상은 주위가 나무로 가려져 있어 특별한 조망은 없다.
▶ 남산(南山)과 또 다른 산 망산(望山, 망성산)의 유래
옛날 경주의 이름은 '서라벌(徐羅伐)' 또는 '새벌'이라 했으며 새벌은 동이 터서
솟아오른 햇님이 가장 먼저 비춰주는 광명에 찬 땅이라는 뜻으로 아침 햇님이
새벌을 비추고 따스한 햇살에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변화가 아름답고
온갖 곡식과 열매가 풍성하여 언제나 복된 웃음으로 가득 찬 평화로운 땅이었다.
이 평화로운 땅에 어느날 두 신이 찾아왔다.
한 신은 검붉은 얼굴에 강한 근육이 울퉁불퉁한 남신(男神)이었고, 또 한 사람은
갸름한 얼굴에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 예쁜 웃음이 아름다운 여신(女神)이었다.
두 신은 아름다운 새벌을 둘러보고 "야! 우리가 살 땅은 바로 이곳이구나!"하고 외쳤고,
이 소리는 너무나 우렁차 새벌의 들판을 진동하였다.
이때 개울가에서 빨래하던 처녀가 놀라 소리나는 곳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산 같이 큰 두 남녀가 자기 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아닌가?
처녀는 겁에 질려 "산 봐라!"하고 소리 지르고는 정신을 잃었다.
"산 같이 큰 사람 봐라!"라고 해야 할 말을 급한 나머지 "산 봐라!"라고 외쳤던 것이다.
갑자기 발 아래에서 들려오는 외마디 소리에 두 신도 깜짝 놀라 그 자리에
발을 멈췄는데 그만 웬일인지 다시는 발을 옮길 수 없었다.
두 신은 그 자리에 굳어 움직일 수 없는 산이 되었는데 소원대로 이곳 아름답고
기름진 새벌에서 영원히 살게 된 것이다.
남신은 기암괴석이 울퉁불퉁하고 강하게 생긴 남산(南山)이 되었고, 여신은 서쪽에
솟아있는 부드럽고 포근한 망산(望山)이 되었다고 전해져 온다. (참고문헌/ 경주시지)
금오산 정상을 내려서니 제법 넓은 신작로길이 나타난다.
그 길을 따라 잠시 내려오다가 용장사지 방향인 오른쪽으로 접어들고,
얼마못가 보물 제186호인 경주 남산 용장사곡 삼층석탑과 마주치게 된다.
경사면 위에 세워져 있어 조망이 시원하다.
용장사(茸長寺)의 법당터보다 높은 곳에 세워진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자연 암반을 다듬어 아랫기단으로 삼고, 그 위에
면마다 기둥새김 셋이 있는 윗기단을 설치하여 산 전체를
기단으로 여기도록 고안되었다.
층마다 몸체돌 하나에 지붕돌 하나씩 3층으로 쌓았는데, 지붕돌과 몸돌을
별도의 석재로 조성하였다.
사창골에서 주방천(周房川)길로 내려서면서
가을의 흔적을 눈에 담는다.
제3폭포는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되지만
시간의 여유가 많지 않아 그대로 지나친다.
대체적으로 한산한 분위기다.
단풍은 곳곳에서 밝은 표정으로 반겨주고,
발걸음도 덩달아 가벼워진다.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깃든 주방천계곡의 제2폭포(용폭포).
이곳 계곡 곳곳에는 물과 바위가 만나서 형성된 폭포,
또는 소(沼)가 산재해 있어 눈을 즐겁게 해준다.
주왕산의 매력은 산 입구에서부터 제3폭포에 이르는 약 4km의 계곡길이다.
특히 상의매표소 - 대전사 - 주왕암 - 급수대 - 제1폭포 - 제2폭포 - 제3폭포 -
내원동 회귀코스는 아주 완만한 길이어서 누구나 쉽게 다녀올 수 있다.
그래서인지 계곡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더 많은 인파로 번잡해진다.
또 다시 개울을 따라 내려가니 바위를 두 개로 쪼갠듯한
거대한 단애가 나타난다.
하늘을 찌를듯이 우뚝 선 그 두 개의 바위 틈 사이로는 길이 나 있다.
과연 자연이 만들어 놓은 비경이라 아니할 수 없다.
주왕산의 절경을 이루는 암석들은 화산의 분화구에서 폭발한
뜨거운 화산재가 지면을 따라 흐르다가 쌓여 굳어진
회류 응회암으로 이루어졌다.
이런 회류 응회암들은 침식에 약하기 때문에 풍화의 차이에 따라
수직절벽이나 계단모양의 지형, 폭포 등을 만들어 내게 된다.
주왕산을 형성한 화산 활동은 지금으로부터 약 7천만년전으로
추정되는데, 이 때는 지질학적으로 중생대 백악기 후기로
공룡들이 떼지어 살던 시기에 해당된다.
선녀폭포라고도 불리우는 주왕산 제1폭포.
생각보다는 낙차가 그리 크지 않다.
그러나 주위로 버티고 선 높은 암벽 때문인지
왜소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태백산맥의 끝단에 위치한 주왕산은 기암절벽이 너무도 유명하여
한 때는 석병산(石屛山)으로도 불리웠다.
곳곳에 주왕의 전설이 있는 특이한 바위와 굴이 있으며
유난히 색이 짙은 철쭉과 아름다운 단풍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올해의 단풍은 생각보다 그리 곱지가 않다.
생김새가 떡을 찌는 시루와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 시루봉.
측면에서 바라보면 마치 사람의 옆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시루봉에는 옛날 어느 겨울, 한 도사가 이 바위에서 도를 닦고 있을 때
신선이 와서 불을 지펴 주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으며 바위 밑에서
불을 피우면 그 연기가 바위 전체를 감싸면서 봉우리 위로 치솟는다고 한다.
이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서 아들바위, 학소대, 급수대,
망월대 등의 기암들과 만나게 된다.
주왕산 입구쪽인 대전사(大典寺)로 들어섰다.
사찰 뒤 왼쪽으로는 장군봉, 오른쪽으로는 기암(旗岩)이 버티고 서 있다.
특히 기암은 주왕산의 상징과도 같으며 주왕이 대장기를 세웠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한가운데에는 두 조각으로 갈라 놓은 듯 금이 가 있는데 고려시대 장군
마일성이 쏜 화살에 맞아서 생긴 것이라 전해진다.
갈색으로 물들어가는 숲 위로는 장군봉이 높이 솟아 있다.
주왕산 상의매표소를 통과하면 바로 만나게 되는 대전사는
신라 문무왕 때 창건되었으며 최치원, 나옹화상, 도선국사, 보조국사,
무학대사, 서거정, 김종직 등이 수도했고, 임진왜란 때에는
사명대사 유정(惟政)이 승군(僧軍)을 훈련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진입로 옆 먹거리 상가에는 사과와 대추를 넣은
동동주가 익어가고 있다.
여기에 더덕, 인삼, 당귀 등 한약재를 넣어 만들기도 한다.
경북 포항시 북구 청하면에 위치한 천령산(天嶺山)의 우척봉(牛脊峯, 775m),
그곳에 올랐다. 초입부터 하늘을 뒤덮은 숲길이 정상까지 그대로 이어지면서
그 시원한 공기를 맘껏 들이키다보니 어느새 몸 속은 청정함으로 가득 들어찬 느낌이다.
그러나 정상에 도착해 보니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주위가 탁 트여진 그런 곳이 아니다.
그저 등반로의 쉼터 같은 곳에 표지석이 서 있어 그곳이 정상임을 알게 해줄 뿐이다.
잠시 앉아 쉬면서 조금은 답답해지는 마음에 왼쪽길로 조금 내려가 보니
그제서야 쫙 펼쳐진 산의 능선이 드러난다.
저쪽 중앙부 산꼭대기에 어렴풋이 돌출되어 보이는 곳은 경상북도 수목원의 전망대로
이 길을 계속해서 가면 그곳에 도달하게 된다.
좀 더 왼쪽으로 눈을 돌리니 저 멀리 청하면과 흥해읍은 물론,
포항의 북부지역 까지도 한 눈에 들어온다.
내려올 때는 청하골이라고도 불리우는 보경사 계곡 쪽을 택했다.
보경사가 있는 내연산(710m)은 포항이기는 하지만 포항에서
가장 북쪽이라 청송군의 주왕산과 접해 있다.
주 능선은 밋밋하지만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져 계곡미가 빼어난데다
무려 12개의 폭포가 이어져 절경을 뽐낸다.
보이지는 않지만 깎아지른 듯한 절벽 저 아래로는 12폭포 중 가장 높은
연산폭포(20m)가 세찬 물줄기를 땅바닥으로 떨어뜨리고 있는 중이다.
위에서 내려다 보니 다리가 후들거린다.
연산폭포 바로 아래에 위치한 관음폭포.
왼쪽의 그늘진 절벽은 '비하대', 그리고 그 오른쪽으로 햇볕을 받고 있는 곳은 '학소대'이며,
저 구름다리는 연산폭포와 연결된다.
그늘에 가려져 잘 보이지는 않지만 폭포 주변으로는
관음굴이라 불리우는 작은 굴들이 여러개 뚫려 있는데,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어우러져 가히 절경이라
불리울만한 멋진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도 그럴것이 이미 이 계곡은 그 옛날, 진경산수라는
그림 양식이 완성된 곳으로서 진경산수의 고향으로
불려지고 있는데 그 창시자가 바로 겸재 정선이다.
왼쪽 그림은 겸재가 청하현감을 지낼 때에 그린
'내연삼용추도(內延三龍湫圖)라는 작품으로,
맨 윗부분의 폭포는 연산폭포이며 그 아래
두 가닥으로 갈라진 물줄기는 관음폭포, 그리고
맨아래 폭포는 잠룡폭포를 나타낸다.
다만 연산폭포가 비하대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데도 시원하게 드러나 보이는 것 말고는
실제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림이 아닌, 사진인데도 그 웅장한 풍경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것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아니, 사진으로 담기에는 그 분위기는 너무나 압도적일 뿐더러
오히려 그림이 더 실감나게 다가오는 것 같다.
초록의 산을 뚫고 불쑥 솟아오른 바윗덩어리...
'선일대'이다.
보경사(寶鏡寺)의 전경. 경북 포항시 송라면 내연산에 위치한다.
602년 진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신라 지명법사가 진평왕에게 '동해의 명산에서
명당을 찾아 자신이 진나라의 도인에게 받은 팔면보경을 묻고 그 위에 불당을 세우면
왜구의 침입을 막고 이웃나라의 침입도 받지 않으며 삼국을 통일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진평왕은 지명법사와 함께 동해안 북쪽 해안을 거슬러 올라 가다가
해아현 내연산 아래에 있는 큰 못 속에 팔면보경을 묻고 못을 메워 금당을 건립하면서
보경사라 불렀다고 전한다.
경내에는 중요문화재로 보물 제252호인 보경사 원진국사비와 보물 제430호인
보경사 부도가 있으며, 조선 숙종의 친필 각판(刻板) 및 5층 석탑 등이 있다.
고려 중기의 승려 원진국사의 탑비인 원진국사비.
13세에 승려가 된 원진국사(1171~1221)는 명산을 두루 다니며
수도를 하기도 하였는데, 왕의 부름으로 보경사의 주지가 되었다.
이후, 51세로 입적하자 고종은 그를 국사로 예우하고 '원진'이라는 시호를 내리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운 간결한 모습으로, 비의 몸체 윗부분의 양 끝을
접듯이 잘라 놓았는데 이러한 모습은 당시에 유행하던 양식이다.
이 비가 완성된 것은 고종 11년(1224)으로 원진이 입적한 지 3년 후의 일이며,
비문에는 원진국사의 생애와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회재 이언적의 제사를 받드는 옥산서원의
뒤편에 위치해 있는 독락당의 솟을대문.
보물 제413호인 독락당(獨樂堂)은 회재 이언적(1491~1553)이
1532년 벼슬에서 물러난 후 만든 서재로, 이곳에서 6년간 학문에 전념했다.
조선 중종27년에 세워졌으며, 일명 옥산정사(玉山精舍)라고도 불리운다.
경내에는 사묘(祠廟), 어서각(御書閣), 양진암(養眞菴) 등이 있으며
계정(溪亭)은 그가 기거하던 사저(私邸)이다.
독락당은 낮은 기단 위에 세워진 정면 4칸, 측면 2칸의 건물로,
옆면에서 볼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八作)지붕으로 되어 있다.
집을 향해 오른쪽 3칸은 넓은 마루인데 앞을 모두 터 놓았으며,
왼쪽 1칸만 칸을 막아 온돌방으로 만들어 놓았다.
기둥은 둥근기둥을 세우고, 대청 천장은 뼈대가 모두 노출된 연등천장이다.
행랑채인 경청재(敬淸齋).
이 고택은 1601년 (선조34년) 3월 12일, 회재 이언적 선생의 손자 휘(諱),
준(浚)과 순(淳) 두 형제가 옥산별업(玉山別業)을 봉수(奉守)하기 위해
화의문(和議文)을 작성하면서 세운 집이다.
선생은 1538년(중종33년) 3월에 청백리(淸白吏)에 가자(加資)되었다.
청백은 공경지심(恭敬之心)에서 나온다 하여, 후손들이 본 집을
경청재(敬淸齋)라 이름하였다.
화의문약설(和議文略說)
계정과 독락당은 우리 선조고(先祖考) 문원공(文元公) 회재선생의 별서이고,
이 외 유택(遺澤)에는 우리 부모(휘:전인, 호:잠계)의 혈성이 가득하다.
당우와 담장을 수호하기 위해 우리 형제가 약간의 토지(土地)를 출헌하였다.
후손들 가운데 혹 궁벽하여 토지에 대해 다투는 일이 있으면 불효로써 논단할 것이다.
독락당을 둘러싸고 있는 돌담길, 계류로 연결되어 있다.
사방이 높은 담으로 가로막혀 있어 안쪽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인데,
외부와 담을 쌓았다는 표현 그대로, 폐쇄적이고 은둔적인 느낌이다.
독락당 옆쪽 담장에는 좁은 나무로 살을 대어 만든 창이 보인다.
이는 아주 특별한 공간구성으로,
이 곳을 통해 대청에서도 앞 계곡의 냇물을 바라볼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정작 담장 안쪽으로는 그의 후손이 생활하고 있는 공간이어서인지
이 곳의 핵심인 독락당은 개방이 되어있지 않았다..
좌측 담장안으로 보이는 집이 바로 그 독락당으로,
그저 밖에서 바라보는 것 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별당으로 지어진 계정(溪亭), 대문외에 유일하게 밖으로 난 공간이다.
세상에게는 폐쇄적이지만, 자연과는 융화하고
소통하고자 하는 의도가 그대로 드러나는 모습이다.
이언적 선생은 이곳 계곡 몇 군데에도 이름을 붙였는데,
계정을 받치고 있는 반석인 관어대(觀魚臺)를 비롯하여, 탁영대(濯纓臺, 갓끈을 풀고 땀을 식힌다는 의미), 영귀대(詠歸臺, 목욕하고 노래를 부른다는 의미), 징심대(澄心臺, 마음을 평정한다는 의미), 세심대(洗心臺, 잡념을 버린다는 의미)가 그것이다.
계류, 서원쪽으로 석축을 다시 쌓기 이전인 지난 어느날,
겨울의 끝자락에서 이제 막 오기 시작한 봄과의 갈림길에 서 있는 계정의 모습이다.
이언적의 생가는 양동이지만, 현재 그의 종가는 처가가 있던 옥산의 독락당에 있다.
그의 부친은 양동의 월성손씨에게 장가들면서 고향인 영일을 떠나 양동으로 거주지를 옮기고,
그의 아들 이언적이 장가를 들며 양동에서 다시 옥산으로 옮겨 온 것이다.
이 서재는 회재 선생의 나이 42세 때, 당시의 권세가인 '김안로'의 재등용을 반대하여
그 여파로 파직을 당하고 난 후 지어졌다는 것과, 독락당이라는 당호,
그리고 폐쇄적인 건축구조 등은 당시의 그의 심정이 드러나 보이는 단초가 되는 듯 하다.
경북 포항시 오천읍(烏川邑) 운제산(雲梯山) 동쪽 기슭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인 오어사(吾魚寺).
신라 진평왕(眞平王)때 창건하였고 혜공(惠空) ·원효(元曉) ·자장(慈藏) ·
의상(義湘) 등의 승려가 기거했던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
사찰로서는 그리 큰 규모는 아니지만 바로 옆에 오어지라는
호수를 끼고 있어서 인지다른 곳과는 달리 독특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또한 뒤쪽으로는 운제산이 버티고 서 있어 풍광이 수려하다.
경내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대웅전.
본래의 이름은 항사사(恒沙寺)인 이 절이 오어사로 바뀌어진 데는
혜공과 원효스님에 대한 설화로 전해진다.
Ⅰ. 옛날 오어사에서 원효대사와 혜공대사가 수도하고 있었다.
하루는 둘이서 계곡 상류에서 놀다가 문득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서로 법력을
시험하여 보고자 하여, 고기를 낚아 다시 살리는 재주를 겨루었다.
그런데 둘의 실력이 막상막하여서 좀체 승부가 나지 않다가 마지막
한 마리를 놓고 서로 자기가 살린 고기라고 주장하였다고 한 데서
나 오(吾)와 고기 어(魚)자를 써서 오어사(吾魚寺)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고기를 놓아준 곳이 지금 오어사 앞에 있는 오어지(吾魚池)라고 한다.
이 이야기는 일연 스님이 지은 『삼국유사』에 나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