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떼의 큰기러기들이 날아 올랐다.
이들은 수시로 제방을 넘나들며
추수가 끝난 들판에서 먹이를 찾아낸다.
이 저수지 주위에는 꽤 넓은 벌판이 자리하고 있어
이들에게 아주 좋은 조건이 되고 있다.
이들이 이렇게 수시로 날아 오르는 이유를
수온이 차서 몸의 체온을 높이기 위한 것에도 있지 않을까 하고
잠시 생각해 본다.
물론, 이들 물새종류는 꽁무니의 기름샘에서 기름이 분비되어
몸이 물에 젖지 않으며 그 외에도
체온을 유지하는 두 가지의 다른 장치도 있다고는 하지만...
흰죽지 수컷이 열심히 헤엄치면서 뒤를 돌아보고 있다..
특히 불을 켠듯한 붉은 눈동자가 인상적이다.
이들의 몸 빛깔은 수컷의 경우 머리와 목은 붉은 갈색이고
가슴은 검정색, 날개와 몸통은 회색이며
암컷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갈색이고 날개와 몸은 회색이다.
또한 눈은 수컷은 루비색이고 암컷은 갈색이다.
흔한 겨울새 중 하나인 쇠기러기가
머리 위로 가까이 날아 올랐다.
지금은 먹이를 구하기 위해 들판으로 가는 중이다.
다시 자리를 옮겨 동판저수지로 가 봤다.
그 근처에 있는 조그만 연못에는 수초가 빽빽하다.
큰기러기 한 무리가 비교적 한산한 이 곳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낯선 침입자가 친한 척 살며시 다가가자
오히려 살금살금 자리를 피하기 시작한다.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앙증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그러다 어느정도 한계를 넘어섰는지
그만 저 멀리로 날갯짓을 하고야 만다.
인간들 하고는 절대 상종 않겠다는 듯...
드넓은 저수지 한 쪽에 서서 앙상한 몸을 곧추세우고 있는
외로워 보이는 나무 한 그루.
아마도 그의 친구는 바로 이들 동물이 유일하리라.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는지 서둘러 급하게 몸을 피하는...
야! 얼굴 좀 보자. 넌 뭐니?
기러기나 오리류는 처음부터 끝까지 무리를 지어 이동한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리더는 맨앞에 위치하지만,
장거리 비행시 리더가 지치면 경험많고 힘센순으로
서로 위치를 바꾸어 가며 비행을 한다고 한다.
중국에서 따오기 한 쌍이 지난 10월 17일,
이곳 우포 따오기복원센터로 입식하여 적응중이라는데,
머지않아 이곳을 터전으로 멋지게 비상하는 따오기의 모습도
볼 수 있을 테지...
마냥 물위에서 노는 것이 따분해져서일까.
두 무리가 날아올라 서로 교행하고 있다.
아마 보이진 않지만, 서로 다정한 눈인사 정도는 주고 받았으리라.
가끔씩 이 정도의 무리들이 그룹을 이루어
하늘을 한바퀴 빙 돌기만 할 뿐, 시간은 계속 흘러만 간다.
그러나 해가 뉘엿해져도 대규모의 비상은
기미조차 보이질 않는다.
마음이 점점 초조해진다.
어느새 주위는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햇빛을 등진 그들의 몸짓이 아름답다.
서서히 해가 기울어져 긴 그림자를 드리우더니
급기야 수면위를 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물새들의 울음소리가 점점 더 커지는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의 역동적인 춤사위는 끝내 볼 수 없었다.
빛이 서서히 자취를 감추기 시작해도 이에 아랑곳 않고
무자맥질이 계속되는 이곳 우포는 끝내 잠들지 않았다.
우리가 떠나고 난 후, 그 언제까지라도
그들의 일상은 이렇게 계속 반복될 것이다.
- 큰 맘먹고 네 개의 늪을 다 돌아 보았다.
초기에 쪽지벌에서 길을 헤메는 바람에 제법 시간을 허비해버렸다.
(쪽지벌의 토평천에는 곧바로 맞은 편으로 건너가는 길이 없다는 것,
그래서 결국은 왔던 길로 다시 되돌아 나와야 했다는 것.)
그만큼 에너지도 소비되고 한 바퀴 다 돌아 볼 때 쯤엔
거의 탈진직전 까지 이르렀다는 것...
허긴, 애당초 사전정보도 없었고,
그렇다고 차로 이동할 생각은 더더욱 없었으니까...
■ 2코스 (왕복 3시간 소요) / 세진주차장 - 대대둑 - 배수장 - 토평천 - 사지포늪. 우포늪 사이 둑길.
억새밭과 겨울철새, 버들군락을 감상할 수 있다.
■ 3코스 (왕복 2시간 소요) / 창녕읍에서 이방. 대지 방면 마을버스를 타고 장재마을에 하차해
늪을 따라 들어온다.
초입에서 길의 오른쪽에 우거진 왕버들 군락과 가시연 군락(7~10월),
소목마을의 나루터도 볼 수 있는데, 주민들의 삶을 가장 가까이서 호흡할 수 있는 곳이다.
■ 4코스 (왕복 2시간 소요) / 창녕읍에서 이방, 대지방면 마을버스를 타고
우만마을에서 하차해 들길을 따라 가다 가마골마을 앞에서 수로를 따라 들어간다.
늪의 역사와 형성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코스이다.
■ 일주코스 (왕복 4시간 소요) / 우포늪의 전체를 볼 수 있으며
세진주차장에서 우포늪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이동하면서 쪽지벌, 목포늪, 우만마을,
장재마을, 소목마을, 주매마을, 대대둑을 돌아 오는 마스터 생태감상이다.
이들의 또 다른 대형(隊形)이다.
하늘을 나를때의 모습과 같다.
희안하게도 자기위치를 미리 정해놓은듯
그렇게 잘도 맞춰간다.
어찌보면 맨 위의 모습은 여유롭게,
그리고 바로 위의 모습은 다소 공격적으로 보인다.
아닌게 아니라, 여러새들이 V자 대형으로 다니는 이유는
매나 독수리같은 새들의 공격에 대비해
몸집이 커보이는 효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라고 하며,
앞에 있는 새로부터 양력(위로 뜨는 힘)을
받아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단다.
이미 과학이란걸 궤뚫고 있는
그들의 생태는 경이롭기까지 하다.
결코 만만하게만 볼 놈들이 아닌것 같다. 절대로...
백로는 새하얀 색깔때문인지
아니면 아주 많은 개체가 아니어서인지
어느곳에 있더라도 눈에 쏙 들어온다.
중대백로.
한동안 그렇게 움직임이 없기에 접근을 시도했으나
이내 눈치채고 황급히 자리를 피해버리는 중대백로.
그 발밑으로 보이는 외따로 떨어진 미운기러기새끼는
마냥 유유자적이다.
어찌보면 그를 향해 달려드는 모양새가 되어 버렸는 데도 말이다.
길을 걷다보면
구석구석에서 갑자기 무언가가 푸드덕하고 날아오른다.
당연하게도 새들이 먼저 놀라 달아나는 것인데
오히려 불청객이 더 놀라고 만다.
돌발상황에 놀라 멈칫거리다 보면 그들은 어느새
저 멀리 시야에서 멀어져 있고...
구석마다 이놈들은 빠지지 않는다.
어딜봐도 이넘들이다.
큰기러기.
우포의 동쪽에 위치한 사지포(모래벌).
다른 곳과는 달리 늪 가장자리에
말라버린 연(蓮)줄기가 보인다.
이곳 네 개의 늪 중에서 가장 색다른 풍경이다.
마치 추수를 앞둔 가을의 들판같다.
네 개의 늪 모두가 모래나 뻘이 있지만
사지포늪은 모래가 많이 있어서
'모래벌'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얼핏보면 백로만 있는 한적한 곳 같지만 클릭해서 보면
이 곳도 결코 아주 조용한 곳만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우포의 동쪽 늪지대.
늪의 바닥에는 죽은 식물들이 쌓여있어,
흔히 생각하는 늪처럼 발이 빠지지는 않는다고 한다.
마침내 종착지에 근접했다.
대대제방에 올라서자 큰기러기로 보이는 새들의 무리가
한 눈에 들어왔다.
이 중,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의 비석(클릭하셔서 크게 보세요.)은
광해군 4년(1612)에 세운 사명대사의 일대기를 기록한 석장비로써,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이 비문을 지었다.
일제때 일본인 경찰서장이 이 비문의 내용이
민족혼을 불러 일으킬 우려가 있다 하여 네 조각으로 깨뜨린 이후,
1958년에 다시 접합하였다고 한다.
사명대사의 부도와 석장비는 본래 하나의 짝을 이루고 있던 것으로
보물 제1301호이다.
- 해인사의 부속암자로서는 원당암을 비롯하여
홍제암, 용탑선원, 백련암, 지족암, 희랑대, 삼선암, 금선암, 약수암,
국일암, 보현암, 금강굴, 길상암, 고운암, 간월암, 청량사 등이 있다.
홍제암(弘濟庵)은
홍제암(弘濟庵)은 해인사의 서편으로
일주문에서 한 이백미터 남짓 떨어진 곳에 있는 암자이며,
특히 사명대사가 입적한 곳으로 유명하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 이곳에 은거하던 사명대사는
광해군 2년에 속세 나이 예순일곱으로 입적하였는데,
광해군은 스님의 열반을 애도하여
자통홍제존자(慈統弘濟尊者)라는 익호를 내리고
이곳에 스님의 비를 세웠다.
그 뒤로부터 스님의 익호를 따라 이 암자를 홍제암이라 하였다.
사명대사의 비문은
홍길동전으로 더 잘 알려진 석학 허균이 지은 것으로서,
문장도 아주 빼어날 뿐더러 대사의 행장이 비교적 소상하게
적혀 있어 사적으로서의 값어치가 높다.
지금의 홍제암 건물은 최근에 신축한 것이며,
암자 안에는 청허, 사명, 기허대사를 비롯한
뭇 큰스님들의 영정을 모신 영자전이 있다.
그리고 뒷동산에는 평범한 석종의 모습으로 만든
사명대사의 부도가 모셔져 있다.
마침 해인사와는 달리
이곳 홍제암은 찾는 이가 적어 적막감마저 감돌았다.
모양새가 사찰의 이미지라기 보다 마치 고궁에
들어온 것으로 착각할 만큼 깔끔하고 아담하게 느껴진다.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넓은 배추밭이 나왔다.
아마도 이곳 스님들의 겨울을 책임질
중요한 것들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배추밭을 지나니 또 다른 암자가 나온다.
마당에 큰 바윗돌이 박혀 그대로 노출된 것이 인상적이다.
빙산의 일각이랄까.
너무 깊이 박혀있다 보니 미처 제거할 수 없었음에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옛 산수화의
한 부분 같아보여 운치가 느껴진다.
인근에 위치한 또 다른 암자인 용탑선원.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이었던 용성스님을 위하여
창건된 이 암자는 스님의 사리탑을 수호, 관리하기 위하여
1945년에 창건되었으며 용탑전(龍塔殿)이라 불리기도 한다.
사실, 이곳 해인사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다.
이미 모두가 익히 알고있는 곳이다 보니...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256호인 대적광전
대적광전은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모시는 화엄종 사찰의 중심 법당이다.
부처가 설법한 진리가 태양처럼 우주에 가득 비추는 것을 형상화한 비로자나불은
불교의 진리자체를 상징하는 불상이다.
비로자나불을 모신 전각은 대적광전 이외에도 화엄전과 비로전이 있다.
대적광전은 802년(애장왕 3)에 순응,이정 두 스님이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의 명칭은 비로전이었으나, 1488년(성종 19)에 왕실의 지원에 의해
학조대사가 중창하면서 대적광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현재의 건물은 1817년(순조17)에 불타버려 이듬해 중건한 것을 1971년에
지관스님이 다시 중수한 것이다.
큰 절의 중심 불전에 걸맞게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을 한 우람한 모습이다.
정선이 그린 해인사 그림에는 대적광전이 2층으로 그려졌는데,
1817년의 화재 이전에는 지금보다 더 큰 건물이었을 것이다.
지금의 모습은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다포계 팔작집으로서
중수과정에서 많이 변형되었음을 알 수 있다.
법당 안에는 용기사에서 옮겨온 중앙의 큰 비로자나불을 비롯해
법단의 좌에서 우측으로 법기보살, 보현보살, 지장보살, 비로자나불(대),
비로자나불(소), 문수보살, 관세음보살 순으로 일곱분의 불보살님이 봉안되어 있는데
비로자나불과 지장보살이 함께 모셔진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이는 주변지역의 불타버린 법당에 있던 지장보살을 옮겨 놓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4호인 해인사 3층석탑
해인사의 대적광전 아래 서 있는 석탑으로, 넓은 뜰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어
일명 ‘정중탑(庭中塔)’이라고도 불린다.
이 탑은 2중 기단과 3층의 탑신 및 지붕돌로 이루어진 통일신라 후기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이다.
원래 이 탑의 받침은 신라 석탑 양식인 2중이었으나, 1926년에 탑을 수리하면서
받침을 확장하고 한 층을 더 올려, 본래 지니고 있던 조화미를 상당 부분 상실하고 말았다.
4면의 각 모서리에 기중을 새긴 것 외에는 별다른 조각이 없다.
지붕돌받침은 신라 석탑의 전형인 5층으로 되어 있고,
지붕돌 추녀 끝은 살짝 들어올려져 완만하게 처리되었다.
지붕돌의 각 모서리에는 작은 종이 달려있는데, 본래의 것은 없어지고
나중에 다시 매단 것이다.
탑의 꼭대기 역시 일부가 소실되어 꼭대기를 떠받치는 받침대와
위로 핀 연꽃, 바퀴만 남아있다.
1926년 6월에 이 탑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상층 받침의 돌 함 속에서 9개의
작은 불상이 발견되었는데, 석탑을 수리하고 나서 이들 불상을 다시 탑 안에 봉안하였다.
또 이 석탑 앞에는 코끼리의 눈모양을 형상화했다는 안상과 연꽃무늬가 조각된
배례석이 있었으나 수리하는 과정에서 석등 앞으로 옮겨졌다.
[조선불교통사] 에는 태조가 즉위하여 이 탑을 수리할 때, 대장경을 탑 안에 봉안하면서
나라의 번영과 백성의 평안을 빌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그러나 1926년에 탑을 수리할때 대장경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태조가 수리한 탑이
이 탑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더욱이 근래의 사찰 보수 때 경학원 근처에서 신라 석탑의 재료가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또 다른 석탑이 있었을 가능성도 크다고 하겠다.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5호인 해인사 석등
석등은 부처님이 계신 사찰에 어둠을 밝히기 위해 만든 것이다.
부처님에 대한 등 공양과 관계된 것이므로 부처님을 상징하는 탑과 함께 법당 앞에 설치된다.
이 석등 역시 원래 석탑 앞에 있었지만 현재 위치로 옮겨놓았다.
옮겨진 이유와 시기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없다.
석등은 받침돌과 기둥돌, 등불을 놓는 화사석, 지붕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둥돌이 원래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전체의 크기는 알 수 없다.
맨아래 네모난 받침대에는 코끼리 눈 모양의 무늬를 새겨 넣었으며,
8각형의 아래 위 받침대에는 8장의 연꽃잎을 각각 따고 하늘을 향하도록 새겨넣었다.
화사석에는 4개의 창을 두었는데, 창 사이의 모서리 4면에 각각 사천왕상을
돋을새김한 것이 이채롭다.
지붕돌은 역시 8각으로 처리하여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었으며 맨 위에는 둥근 구슬을 올렸다.
새겨진 눈 모양과 연꽃무늬의 우아한 조각수법, 그리고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볼 수 있다.
한편 1398년 조선 태조 7년에 강화 선원사에 있던 팔만대장경을 지천사로 옮겼다가
이듬해 이곳으로 옮겨왔다.
팔만대장경판전은 1995년 12월에 세계문화 유산으로 공식지정되었다.
경내에는 일주문, 대적광전,구광루 등 문화재 및 암자들이 즐비하여
찾는 이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다.
붉게 물든 덩굴은 담장을 휘감고,
하늘은 마냥 높기만 하다.
대적광전의 화려한 단청.
섬세한 인간의 손길이 이루어 놓은,
획 하나마다에 가득 담긴 불심...
고려팔만대장경판이 보존되어 있는
대장경판전의 입구.
장경판전은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경이나 그것을 인쇄하기 위한 목판을 보존하고 있는 전각으로
사찰에 따라 대장전 혹은 판전, 법보전 등으로 불리운다.
합천 해인사의 장경판전에는 세계의 문화유산인 고려 팔만대장경이 모셔져 있다.
해인사는 신라 창건 이래 조선 말기까지 여러차례에 걸쳐 화재를 입고 중건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천만다행히도 고려의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던 대장경판전(국보 제52호)은
조선 초기 개수를 한 그대로 보존이 되어있어 국보 가운데의 국보인
고려팔만대장경판(국보 제32호)이 함께 온전하게 보존,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
▶ 합천 학사대(學士臺) 전나무, 경상남도 기념물 제 215호이다.
이 전나무는 높이 약30m, 둘레 5.1m 쯤 되는 수령이 1,000년 이상 된 고목이다.
나무의 줄기가 지상 10m 높이에서 두 개로 벌어져 있으며, 나뭇가지가 아래로 향해 뻗어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곳은 고운 최치원 선생이 만년에 벼슬을 버리고
가야산에 은거할 때 찾았던 곳이다.
학사대라는 이름은 고운 선생이 헌강왕때 29세의 나이로 한림학사 벼슬을 하였는데
그 벼슬 이름을 따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고운 최치원 선생은 말년에 제자들 앞에서 이 곳에 지팡이를 꽂으며
"내가 살아 있다면 이 지팡이도 또한 살아 있을 것이니 학문에 열중하라" 는 유언을 남기고
지금의 홍제암 뒤 진대밭골로 유유히 홀로 들어가신 전설로 유명하다.
그래서 이 전나무를 일러 고운 선생의 "지팡이 나무"라고 불리운다.
가을이 찾아온 산사.
지난달, 청도군 화양읍 송금리의 동학산 기슭,
청도의 와인터널에 들렀다가 바로 그 위쪽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대적사를 찾았었다.
감의 고장답게 이곳에도 주위가 온통 감나무 일색이다.
나뭇잎은 감과 함께 서로 같은 색깔로 익어가고...
단출한 극락전.
절 전체가 아주 아담하다.
안내문에 적힌 이곳 대적사에 관한 내용을 옮겨본다.
대적사는 신라 헌강왕 2년(876년) 보조선사(804~880)가
토굴로 창건하였으며 고려초기 보양(寶壤)이 중창하였다.
임진왜란때 폐허가 된 사찰을
1635년경 초옥3칸 암사를 짓고 대적사(大寂寺)라 하였으며,
1689년(숙종15년) 성해대사(成海大師)가 중수하여
삼존불을 모시고 다시 사찰의 면모를 갖추었다.
경내 건축물중 18세기경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공포를 갖춘 맞배지붕의 5량 가구로
고주(高柱)없이 대량과 종량을 걸고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앞뒤는 대량에 가운데는 종량에 대어 층이진
특이한 구성을 하고 있으며
1984년 부터 보물 제836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기단의 조각은 용, 거북, 게 등과 전면 기둥의 용머리 조각 등
연화문(蓮華紋)과 거북무늬가 양각되어 있고
H자 형의 선각(線刻)과 기단 측면에
용비어천도(龍飛御天圖)가 새겨져 있는
장식 등은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으로
건축 의장 연구에 중요한 자료들이다.
주요 전각으로는 극락전 외에 삼성각(三聖閣)과 산신각이 있다.
기단에 양각으로 새겨진 거북과 게의 모습.
자그마한 것이 앙증스럽게 보인다.
불전의 천장과 문살 또는 기둥과 벽에 장식되어 있는 물고기,
그리고 풍경의 물고기 장식과 목어 등...
물고기는 흔히들 사찰에서 볼 수 있다.
혹자는 이 물고기가 항상 눈을 뜨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해,
항상 깨어서 부지런히 도를 닦으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게의 등장은 조금 생뚱맞은 느낌이다.
게는 옆으로 기어가는... 그러면 혹시
샛길로 빠지는 것을 스스로 경계하라는 의미?
계단쪽에는 귀여운(?) 용의 모습도 보인다.
구름문양이 함께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하늘을 날고 있는 모습일 듯.
경북 포항시 오천읍(烏川邑) 운제산(雲梯山) 동쪽 기슭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인 오어사(吾魚寺).
신라 진평왕(眞平王)때 창건하였고 혜공(惠空) ·원효(元曉) ·자장(慈藏) ·
의상(義湘) 등의 승려가 기거했던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
사찰로서는 그리 큰 규모는 아니지만 바로 옆에 오어지라는
호수를 끼고 있어서 인지다른 곳과는 달리 독특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또한 뒤쪽으로는 운제산이 버티고 서 있어 풍광이 수려하다.
경내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대웅전.
본래의 이름은 항사사(恒沙寺)인 이 절이 오어사로 바뀌어진 데는
혜공과 원효스님에 대한 설화로 전해진다.
Ⅰ. 옛날 오어사에서 원효대사와 혜공대사가 수도하고 있었다.
하루는 둘이서 계곡 상류에서 놀다가 문득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서로 법력을
시험하여 보고자 하여, 고기를 낚아 다시 살리는 재주를 겨루었다.
그런데 둘의 실력이 막상막하여서 좀체 승부가 나지 않다가 마지막
한 마리를 놓고 서로 자기가 살린 고기라고 주장하였다고 한 데서
나 오(吾)와 고기 어(魚)자를 써서 오어사(吾魚寺)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고기를 놓아준 곳이 지금 오어사 앞에 있는 오어지(吾魚池)라고 한다.
이 이야기는 일연 스님이 지은 『삼국유사』에 나와 있다.
큰 바위는 '아버지바위'이고 작은 바위는 '아들바위'라 하며
둘 다 머리에 삿갓을 쓴 형태이다.
목포는 1897년에야 일본인들이 한국침략의 서남거점으로 개항해
오늘날처럼 도시로 발전했다. 그 전에는 영산강하구를 지키는
보잘 것 없는 나루로 조그만 마을이 있었을 뿐이다.
이 갯마을에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병든 아버지를 모신
가난한 소금장수 청년이 살고 있었다.
그는 포구에 실려 오는 소금을 받아 인접마을에 팔아서 끼니를 이어갔다.
가난하여 약 한 첩 제대로 쓸 수 없었던 청년의 아버지는
날로 병환이 악화되어 갔다. 청년은 안타깝기만 했다.
그는 스스로 큰 결심을 했다.
이번에는 아버지 약값을 충분히 벌어야 집에 돌아온다고 다짐했다.
힘에 겹도록 소금 짐을 짊어지고 떠났다.
그러나 딱하게도 소금을 사려는 사람이 없었다.
빈손으로 집에 돌아갈 수 없었던 청년은 날품이라도 팔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부유해 보이는 길갓집을 찾아 들었다.
그 집주인은 소문난 구두쇠로 한 달 동안을 일하고 품삯을 달라는 청년에게,
'그동안 먹여준 밥값도 못한 주제에 품삯은 무슨 놈의 품삯이냐' 며 쫓아버렸다.
아버지 약값을 구하지 못하면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한터라
길거리에 주저앉아 신세한탄만 하고 있었다.
그 마을을 지난 던 도승이 청년을 보고 무슨 걱정거리가 있기에
그리 한숨을 쉬느냐고 물었다. 청년은 자초지종 그의 처지를 말했다.
얘기를 들은 도승은 크게 낯 색이 변하며 청년을 꾸짖었다.
'청년은 한가지만 생각했지 깊은 생각이 부족했네,
자네가 약값을 마련하겠다고 타향을 전전하고 있는 동안 병든 아버지는
누가 돌보았겠으며 그동안에 죽었다면
애써 약값을 마련했다 한들 무슨 소용 있겠나'
그때서야 병든 아버지를 생각한 청년은 부랴부랴 집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돌보는 이 없이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었다.
청년은 그의 어리석음이 한없이 후회스러웠다.
이승에서 편히 지내지 못한 아버지이지만 저승에서나 편히 쉬게 하는 것이
그의 도리라 생각하고 관을 메고 명당을 찾아 나섰다.
갓바위는 예부터 말 형국으로 명당이 있고 안장터가 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산을 헤매던 청년은 지금의 갓바위 곁에서 앞을 바라보니 시원하기가 그지없고
양지바르므로 이 곳에 묘를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
관을 바닷가에 놓고 묘를 파던 청년은
그만 실수를 저질러 곁에 둔 관을 건드렸던지
관이 데굴데굴 굴러 바닷속으로 첨벙 빠지고 말았다.
넋을 잃은 청년은 행여 관이 떠오르지 않을까 기다렸으나 영영 떠오르지 않았다.
바다를 내려다보면서 엉엉 울던 청년은 하늘을 쳐다볼 수 없는 놈이라며
바다로 뛰어들어 자살하고 말았다.
이 일이 있은 뒤로 이 곳에 아버지바위와 아들바위가 솟아오르고,
아들은 죄진 몸이라 하늘을 대할 수 없어 삿갓을 쓰고 있었다.
이 삿갓은 넓이가 6 m가량이고 한쪽 깃이 2m가량이나 된다.
청년이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팠다는 바위의 윗부분은
바위가 널리 깔린 탓인지 풀이 자라지 않고 있지만 사람들은 청년이
파헤쳐 놓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부근에는 이 바위를 중바위라 부르는 이도 있다.
아라한과 부처님이 영산강을 건너 이곳을 지날 때
쉬던 자리에 쓰고 있던 삿갓을 놓고 간 것이 갓바위가 되었다고도 주장한다.
지금 이곳은 이씨 집안의 선산이 되어 여러 개의 묘가 들어서 있다.
전면에 우뚝솟은 산봉우리 하나를 마주하고 조성된 길 양편으로 여러 고추장 업소들이 밀집해 있다.
맛깔스런 이곳의 장맛처럼 주위도 깔끔하게 잘 정비되어 있다.
집집마다 늘어놓은 장독들로 인해 여행자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안쪽으로 이끌려 들어간다.
지나치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인가. 담장너머로 보이는 여러 볼거리들.
고추장의 대명사로 불리는 순창고추장의 맛의 비결은 이곳이 예로부터 물이 좋기로 소문이 나 있다는 데에서 찾는다고 한다.
순창지방의 물에는 다른 곳에 비해 철분이 많이 들어 있다는데 이 물로 담근 고추장은 특유의 단맛을 낸다고 한다.
또한 순창의 고추장은 고려말 이성계가 스승인 무학대사가 기거하고 있던 순창군 구림면 만일사를 찾아가는 도중, 어느 농가에 들러 고추장에 점심을 맛있게 먹었는데, 이후에도 그 맛을 잊지 못하고 있다가 조선을 창건, 등극한 후에 이를 진상토록 하여 천하일미의 전통식품으로 유명해졌다고 한다.
이 길은
무엇을 타고 가든,
아니면 그냥 걸어서 지나가든
그 어떤 방법으로 오가더라도
그냥 좋다.
이유는 없다.
사실, 혹자에게는 이 길이
별것 아닌 것일 수 도 있지만...
이곳에 서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서는
색다른 경험에서 오는 들뜬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뒤늦게 찾은 어제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또 다시 찾아 온 이 길이다.
이 길은
담양군에서 1970년대 초반
전국적인 가로수조성 사업 당시
내무부의 시범가로로 지정되면서
3~4년짜리 묘목을 심은 것이
지금처럼 하늘을 덮고 있는
울창한 가로수로 자라나게 되었다.
메타세쿼이아(Metasequoia)는
원래 중국이 그 산지이나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개량이 되었다고 한다.
이곳을 그냥 지나치는 자동차는
거의 없다.
누구나 꼭 한번쯤은 멈추어 서서
가로수와 짧고도 긴 눈맞춤을 나누고 나서야
지나가곤 한다.
공부를 마친 후 뒤늦은 귀가?
엄마의 심부름?
아니면 또 다른 친구들과 즐겁게 뛰어놀기?
목적은 어찌됐던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늘상 보아오는 길일지라도
이 길을 걷는 순간만큼은
이들도 여행자들의 마음과
별반 다르지 않을것 같다.
어떤가?
손을 꽉 다잡고 걸어가는 이들의 뒷모습에서
금방이라도 들려올 것 같은
정겨운 대화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히고 있지는 않는가?
얼굴 가득 미소를 담고 있을 것만 같은
그들의 표정을 상상해 볼 수는 있지 않겠는가?
워낙 유명세가 있는 곳이다 보니
이곳을 여러가지 목적으로 활용하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는 것 같다.
올림픽 후 방영예정이라는 SBS드라마
'타짜'의 촬영모습이다.
시간에 쫓겨 둑길을 모두 다 돌아보진 못했지만,
이곳은 천연기념물 제366호로 지정된
담양의 관방제림이다.
보호수는 177주로
나무의 수령은 최고 300년이 된다고 한다.
관방제림(官防堤林)은
조선 인조26년(1648) 당시의 부사 성이성(府使 成以性)이
수해를 막기 위해 제방을 축조하고
나무를 심기 시작하였으며,
그 후 철종 5년(1854)에는 부사 황종림(府使 黃鍾林)이
다시 이 제방을 축조하면서
그 위에 숲을 조성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2004년에는 산림청이 생명의숲가꾸기국민운동,
(주)유한킴벌리등과 공동 주최한
'제5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하기도 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