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럽게 마음이 동해서 나선 길이었습니다.
원래는 이참에 이기대 둘레길도 걸어볼 심산이었는데 아쉽게도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그러지는 못했네요.^^;;
만약 혼자 가는 길이었다면 시간은 맞출 수 있었을런지는 모르겠지만
정작 그전에 일찌감치 포기를 해버렸을테지요.
하지만 얹혀가는 길이라 슬쩍 용기를 내어본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게으른 성격을 내보인 꼴이 되어버렸네요.ㅎㅎ
불꽃축제를 보려면 각오를 단단히 하고 나서야 될 것 같던데요.
교통체증은 물론이고 수 많은 인파들에 이리저리 치여야 할테니까요.^^;;
물론, 멀리서 봐도 되지만 가까이에서 보는 재미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라...^^
저 빌딩, 부산에서 가장 인기있는 아파트라고 들은 것 같습니다만...^^;;
저는 아직 불꽃축제를 제대로 본 적이 없습니다...
간간히 불꽃놀이를 봤다지만 .. 불꽃축제와는 상대가 안되네요 .. ㅎㅎ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사진을 멋지게 담아주셔서 ..
환한 마음으로 멋진 불꽃을 바라보았습니다...
나이아가라폭포불꽃은 아주 인상적입니다... ^^
사람들이 마무리도 불꽃처럼 예쁘면 좋겠습니다..
서울의 불꽃축제도 그렇지만 사람들이 어지간히 많아야 말이죠.^^;;
이리저리 치이다 보면 힘이 다 빠질 지경이 되기도 하지만, 바로 머리 위에서
펑펑 터지는 불꽃을 보니 스트레스가 다 날아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여건상 명당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아쉬움은 있지만
그나마 한번쯤은 볼만하다는 생각은 해 봤네요.
떠난 자리에는 흔적을 남기는 법이 아닌데... 참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가보시지 않으셨다면서 제대로 잘 알고 계시네요.^^
저 역시 첫 방문때 그것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심지어 산을 올라가면서도 가느다란 막대같은 집이 고층으로
서 있는 것이 살짝 불안해 보이기까지 했답니다.^^;;
홍콩이 워낙 땅값이 비싸다보니 제 집을 갖기가 그만큼 어려울수가 없답니다.
그래서 우리가 30평형에 살고 있다고 하면 갑부인줄로 알 정도라네요.^^
잠시 스쳐가는 여행은 모르겠지만 그대로 눌러 살아라고 하면...^^;;;
124년 동안 고장 없이 운행되고 있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우리나라는 10년만 되도 .. 고장되고 못쓰고 그러는 경우가 많은데 말이죠 .. ㅎㅎ
오늘은 홍콩의 야경을 제대로 볼 수 있군요..
날씨가 무덥다 보니 ..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
야경을 바라보는 모습을 마구 상상해 봅니다..
전당대에 오르면 .. 탁 트인 전망에 .. 기분까지 좋아질 듯 합니다.. ^^
형식은 다르지만 우리나라에는 아예 한번도 써보지도 못하고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지요.
인천의 모노레일이 그렇다고 하던가요.;;
날씨가 더워지니 높고 탁 트여진 곳이 그리워지기만 합니다.
아무래도 그런 곳에 서면 좀 더 시원한 바람이 맞이해 줄테고
더불어 마음까지도 상쾌해질테니까요.^^
만약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상상만으로 마인드컨트롤을 시도해보는 것도...
잘만 한다면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니까요.ㅎㅎ
그래서인지 홍콩 곳곳이 영화촬영지로 남아있더군요.
중경삼림을 찍은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청킹맨션 등이 그렇고,
특히 이소룡의 용쟁호투는 촬영이 모두 홍콩에서 이루어졌다지요.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아주 반가워할만 하겠다 싶었습니다.^^
그나저나 저도 이젠 또 언제 여행을 떠나볼지...;;
자연의 풍광만을 찾아가는 여행도 재밌지만 ..
이렇게 사람과 사람 사이를 찾는 것도 즐거운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지금은 좀 잠잠해졌지만 . 그래도 홍콩하면 영화인데..
스타의거리 정도는 꼭 있어야 하고 .. 찾아볼만 할 것 같습니다..
이소룡의 포스는 죽지 않았네요 ... ㅎㅎ
하긴 그 포스가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지만요 .. ^^
허긴.. 사람도 자연의 일부일테니 사람 그 자체가
자연이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터...^^
제가 어렸을 당시만 해도 홍콩영화는 알아도 헐리우드 영화는 뭔지도 몰랐습니다.ㅎㅎ
물론 그 뒤에는 이소룡이라는 불세출의 인물이 있었지요.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영화의 배경지를 찾아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서울에 비해 조금 색다르기는 하겠지요.
꽃들도 한 송이보다 군집으로 모여있는 것이 더 아름다워 보이듯이
이곳 마천루도 작은 공간에 밀집되어 있다보니
더 위용이 대단해 보이고 화려해 보이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현실과 이상 사이에는 항상 틈이 있기 마련이지요.^^;;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언젠가는 라오니스님에게도
이런 여행의 기회는 반드시 찾아올 것이라는...ㅎㅎ
지금은 뜸하기는 하시지만 매번 산에만 가실 수는 없잖아요.^^
가끔은 다른 방법으로도 마음을 채워주셔야지요.
물론 자갈치시장도 좋을 것 같습니다.
더구나 어릴적 추억이 깃든 곳이라면 더 의미가 있겠지요.
이번주는 부디 옛 기억을 되찾아가는 멋진 여행의 기회를 가지시길 바랍니다.^^
부산 해운대를 거닐다보면 ... 외국의 어느 해변에 와 있는 기분입니다..
해운대 주변을 둘러싼 높은 건물들이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지요 ..
그러고보니 .. 저는 해운대를 새벽에 주로 보게 되더군요 ..
마음이 답답할 때 .. 밤기차를 타고 .. 부산으로 해운대로 가던 옛기억이 떠오릅니다..
부산 사는 후배가 빨리 내려오라는데 ... 해운대로 다시금 떠날 날이
머지 않은 듯 합니다... ^^
직접 그런 상황이 되어보지 않으면 그 심정을 헤아리기가 쉽지는 않겠지요.
사람을 떠나 보낸다는 것은 그 사람과의 인연의 끈이 어떻게 얽혀있는가에 따라서
감정의 스펙트럼이 다양하게 나타날 것이기에, 무조건 슬프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한 것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분명, 언젠가는 한 번은 꼭 있어야 될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안타깝게 생각되는 건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시간의 아쉬움이 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물론, 이 슬픔도 시간이 해결해 주기는 할겁니다만...
인간이란 그런 것 같습니다.
살아가면서 수 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어가지만 특히 어릴적 친구는
유난히 더 살갑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그냥 생각해 보기로는 특별히 서로의 이익을 따지지 않고 스스럼없이
대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구요.
오랜 시간동안 볼 수 없었던 친구였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추억만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경북 최초의 기독교회이자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0호인 대구제일교회.
고종 32(1895) 부산에 있었던 북장로교 선교본부가 대구로 옮겨지고,
광무 2년(1898)에 기와집 4동을 교회당으로 사용하다가 1908년과 1933년에
각각 새로운 교회당을 짓고 제일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높이 33m의 종탑은 1937년에 세워졌다.
기독교가 근대화에 기여한 상징물로 근대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계산성당이 천주교 역사의 시발점이었다면 제일교회는
대구 최초의 기독교와 학교와 병원의 역사를 보여주는 중요한 곳이라 할 수 있다.
90계단이라 불리는 3.1만세운동길.
새로 신축된 대구제일교회의 남쪽에 위치해 있다.
3.1운동 당시 서문시장에 모인 계성고, 신명고, 대구고보, 성서고 학생들과
일반 주민 등 800여명은 이 계단 위의 솔밭길을 거쳐 도심으로 진출했다.
대구의 3.1운동은 일본경찰의 감시가 워낙 심한 관계로, 3월 1일보다
다소 늦은 1919년 3월 8일 오후 2시에 일어났다.
대구광역시 중구의 뒷골목에서 만나게 되는...
C1/ 3.1운동길, C2/ 선교사 스위츠주택. C3/ 선교사 챔니스 주택, C4/ 선교사 블레어 주택,
ㅎㅎ 제법 시간이 지난 사진이지요?^^;;;
가까운 곳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내기가 어려웠던 곳이라
생각난 김에 산책삼아 한번 나서봤습니다.
비록 빌딩이 가로막고 있기는 했지만, 만약 도심속에 이런 공간이라도 없었다면
얼마나 삭막하고 무미건조한 도시가 되었겠나 싶더군요.
이외에도 진골목 등 소소한 볼거리가 많기는 하지만 훗날 다시 찾아가봐야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대구의 중심지에 위치해 있는지라 빌딩은 피할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 덕분(?)에 상대적으로 고택은 더 왜소해 보이기도 했지요.;;;
한편으로는 잘 관리되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구요.^^
그런데 이곳 사진을 보신적이 있으시군요.
이 계단은 대구 중구 골목투어의 코스에 포함되어 있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을 겁니다.^^
대구시민들의 아름다운 마음이 사라져가는 고택을 살렸군요..
이런 고택은 나라에서 더욱 관심갖고 지켜나가야 하는대..
개발의 파고는 소리없이 쓸어 버리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고택이 살아나긴 했어도.. 관리가 잘 이루어진다고 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군요..
대구의 근대문화유산을 스토리텔링으로 잘 엮으면..
지금보다 더욱 많은 사람이 관심갖고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을 해봅니다.. ㅋㅋ
맞는 말씀입니다.^^ 단순히 그저 있는 것을 보여준다는 의미보다는, 재미있고
알기쉬운 이야기로 엮어준다면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겠지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더 오랜 문화재에 비하면 근대의 문화유산은
다소 경시하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의심이 가기도 하는데요,
이 역시 당시의 역사 무게로 보면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유산들의 보존과 관리 또한 신중한 자세가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서울의 중심, 서울의 상징이자 서울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는 곳.
서울 땅을 밟을 때마다 항상 먼발치에서 올려다 보기만 했던
바로 그 'N서울타워'.
드디어 그 곳에 가장 가까이 다가서는 순간이다.
이 케이블카에서 내리면 남산, 즉 서울의 랜드마크인 'N서울타워'와
바로 눈 앞에서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남산케이블카의 선로길이는 605m, 고도차는 138m이며
초속 3.2m의 속도로 정상까지 오르는데 3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그러나 1962년 부터 운행되어 온 이 남산케이블카가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는 기사가 눈에 띈다. (이곳 참고)
남산에 오르니 봉수대가 먼저 맞아준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1394년 도읍을 한양으로 옮긴 후 남산에 봉수대를 설치하였다.
1894년 까지 약 500여 년 동안이나 사용되었으며, 봉수대의 명칭은 남산의 옛 이름을
따서 목멱산(木覓山)봉수라고 하기도 하고 서울에 있다고 하여 경봉수라고도 하였다.
전국의 모든 봉수가 최종적으로 이곳으로 전달되도록 하였기에, 남산 봉수대는
중앙 봉수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남산봉수대는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5개소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고 한다.
'N서울타워'는 한국 최초의 종합 전파탑으로 1969년 TV와 라디오 방송을
수도권에 송출하기 위해 동양방송 · 동아방송 · 문화방송 등 3개의
민영방송국이 공동으로 투자하여 1975년에 완공되었다.
이곳에는 'KBS, 'MBC' 'SBS' TV와 FM송신 안테나를 비롯하여
'PBC', 'TBS', 'CBS', 'BBS', FM 송신 안테나 등이 설치되어 있으며,
전국 가청 인구의 48%가 이곳을 통하여 방송을 시청하고 있다.
2000년 YTN에서 인수하여 전면 개설공사를 시행하였으며,
2005년 'N서울타워'라는 이름으로 개장하였다.
'N서울타워'의 영문'N'은 'NEW', 'NAMSAN'을 상징한다.
이 타워는 총 높이가 해발 479.7m(남산: 243.0m, N서울타워: 236.7m)로
초속 56m의 강풍에도 안전하도록 설계되었다.
타워 곳곳에는 사랑의 자물쇠로 장식되어 있어 이곳의 명물이 되고 있다.
연인들끼리 혹은 가족, 친구들끼리 자신들의 사랑과 우정이 변치않고
영원하길 바라는 마음을 자물쇠에 적어 메달아 놓은 것이다.
그 소망처럼 이 자물쇠 나무에서는 형형색색, 영원불변의 꽃으로 피어나는 듯하다.
공간마다 빼곡히 채워진...
그 하나 하나에 담긴 정성과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 오는 듯,
웬지 따끈한 분위기다.
남산 전망대에서 내려다 보는 조망은 일단 시원하다.
그러나 시야는 무척이나 흐리다.
모르긴 해도, 저 멀리 흐르는 한강 바로 그 너머로 높이 솟은 건물은
또 하나의 랜드마크인 63빌딩인 것 만큼은 확실한 것 같다.
눈부신 태양이 뿌연 안개 속으로 침몰하기 직전...
이 도시에는 불빛이 하나 둘씩 나타나기 시작한다.
1초에 4m를 이동한다는 초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N서울타워 전망대에 오르는 사이 불빛은 더 많아졌다.
이제 도로에는 길게 불빛이 흐르기 시작한다.
신라호텔 방향...
맑은 날 이곳에 올라서면 서울 전역은 물론,
송악산과 인천항까지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상태로는 전혀 감조차 잡을 수가 없다.
이제 주위는 색을 완전히 잃어버렸고,
짙은 어둠만이 세상을 지배한다.
다만 점점이 흩뿌려 놓은 듯한 불빛들 만이
인간이 사는 세상임을 알려 주고 있다.
비록 아주 맑고 투명하지는 않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화려하다고 해야 할 서울의 밤풍경인 것이다.
그런만큼 멋지게 담아보려 했으나 삼각대도 없고... 역부족이다.
그저 그 감흥만 오롯이 두 눈에 담아 올 수 밖에...
N서울타워의 낮과 밤.
이곳을 빠져 나올 때에는 최신 LED조명으로 단장하여
낮에 보던 것과는 또 다른 모습으로 변신해 있는
N서울타워를 만나볼 수 있었다.
굳이 타워에 까지 오르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았습니다.
안개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남산에서 내려다 봐도
시각적으로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것 같았거든요.^^
다만, 사방을 다 볼 수 없다는 점만 제외하면 말이죠.ㅎㅎ
저도 인천항까지 보이는지 확인하고 싶었는데 아쉽게 되었네요.^^
저도 혼자 갔다면 오르지 않았을 겁니다.
마침 어르신과 동행을 했기에, 이 기회에 안 올라 보신다면
두고두고 섭섭해 하실까봐 함께 올라봤던 거지요.ㅎㅎ
이제껏 자물쇠가 채워진 곳을 몇 군데 보긴 했어도 이곳만큼 규모가 큰 곳은 없더군요.
그러니 서울을 두고 '사랑의 도시'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ㅋㅋ
어찌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랑이 넘치는 것도 같고,
또 어찌보면 그만큼 사랑에 목말라 하는 것도 같고...
서로간의 믿음이 저토록 애틋한 걸로 봐야 할까요, 아니면
저렇게 해야 할 정도로 서로를 믿지 못하는 걸로 봐야 할까요.ㅋㅋ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감정이 극과 극을 오가네요.ㅋㅋ
중국 베이징에 다녀온건 지난 8월의 일이지만, 차일피일 미루다가
해가 바뀌는 시점이 된 지금에서야 올려본다.
대체로 사전을 들추는 듯한 분위기로 약 15회 정도의 분량이 될 것 같은데,
이왕 늦은것... 수박 겉핥기식으로 쉬엄쉬엄 정리해 보려 한다.
물론 여행기라고는 할 수 없다.
이제껏 그래왔듯이 그다지 재미는 없을거라는 얘기다.
지난 7월부터 중국 전역에서는 낮 최고 기온이 섭씨 35도를 넘는
불볕더위가 계속되었고, 8월 11일의 경우만 해도 중국 충칭에서는
43도까지 치솟았다고 했다.
그런 보도를 보고 조금 걱정이 되긴 했지만, 말로만 듣던 천안문과 자금성,
그리고 만리장성 등의 모습을 직접 가까이에서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에
중국의 수도인 베이징을 찾게 되었다.
그러나 가는 날 부터 가랑비가 시작되더니 한때만 햇볕이 반짝거렸을 뿐,
대체로 궂은 날씨... 결국 마지막 날에는 장대비까지 쏟아지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더위가 다소 누그러지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지만 말이다.
중국은 BC221년 진(秦)나라의 시황제(始皇帝)가 처음으로 통일을 이루었다.
중국 최후의 통일왕조인 청(淸)나라에 이어 국민당의 국민정부가 세워졌고,
1949년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웠다.
정식명칭인 중화인민공화국의 행정구역은 22개의 성(省), 5개의 자치구,
4개의 직할시, 2개의 특별행정구로 구성된다.
이 중에서 홍콩, 마카오를 제외한 지역을 중국대륙(중국본토)으로 칭한다.
베이징부근은 2000년 훨씬 이전부터 이미 중국 동북부 국경지대의 중요한
군사, 교역의 중심지였으며, 원대(元代, 1271~1368)인 1267년 이곳에
대도(大都)라는 이름의 신도시가 건설되어 행정수도가 되었다.
명(明, 1368~1644)의 제1,2대 황제 재위기간에는 난징(南京)을 수도로 삼았으며,
전대의 수도였던 대도는 베이핑(北平)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명의 제3대 황제는 베이핑을 다시 수도로 삼고 베이징이라는 새 이름을 붙였다.
그 후 베이징은 국민정부가 난징을 다시 수도로 삼았던 짧은 기간을 빼고는
계속 수도로서의 지위를 지켜왔다.
베이징은 중국의 수도로서 줄잡아 7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다.
특히 원(元), 명(明), 청(淸) 3개 왕조에 걸쳐 수도로 있었기에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 해고 과언이 아니다.
16개 구와 2개의 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면적은 16,807km² 로
서울, 인천, 경기도를 포함한 것보다 넓다.
정식 명칭은 베이징직할시(北京直轄市)이며, 약칭하여 징(京)이라고도 부른다.
베이징은 미국 '외교정책' 잡지가 발표한 2010년 세계도시 랭킹에서
도시 규모와 경제력, 상업활동 등 종합적인 영향력을 바탕으로 15위에 오르기도 했다.
인구는 1,800만명 정도이며 유동인구는 500만명 정도로 추산한다.
서양의 기준으로 보면 베이징의 생활리듬은 느린 편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먹고 싶을 때는 마음껏 먹는 그들이다.
중국인들은 집치장과 옷차림 보다도 먹는 것을 첫째로 꼽는다고 한다.
먹는 것 외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말이다.
베이징의 특산 요리로는 오리구이인 베이징카오야(北京烤鸭), 궁팅차이(宮廷菜),
탄자차이(譚家菜), 불고기, 샤브샤브가 5대 요리로 꼽힌다.
베이징은 중국의 수도인 관계로 문화 수준이 비교적 높고 예절 바르며
정치에 대한 관심이 크다.
대륙적인 기질로 여유만만하고 스케일이 큰 반면 상대방을 의심하고
여간해서는 속마음을 내비치지 않는 중국인, 만만디(慢慢的)는 느릿느릿한
사림이라는 뜻으로 그들을 두고 흔히들 하는 말이다.
중국은 56개 민족이 거주하는 다민족국가이다.
한족(漢族)이 전체 인구의 92%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외 55개의 소수민족이 8%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중국사람들은 무엇보다도 돈을 중시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어린아이 돌잔치에 돈, 연필, 실 등을 잔치상에
올리는데 비해 그들은 붓과 함께 주산을 올릴 정도다.
그리고 수 많은 신(神)들을 섬기기도 한다.
조상신은 물론 땅의 신, 집의 신, 화장실, 대문, 부뚜막의 신도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돈의 신인 전신(錢神)이 있으며 재신(財神)도 있다.
베이징은 계획도시이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의 길이 동서 아니면 남북으로 나 있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은 길을 가르쳐 줄 때, 대체로 전후좌우 방향이 아니라
동서남북을 기준으로 알려 준다.
또한 그들은 버스나 자전거로 출퇴근하는가 하면 폭넓은 여가를 즐기기도 한다.
시내교통은 주로 트롤리버스와 버스에 의존하고 있으며 도로도 잘 정비되어 있다.
베이징의 경우 3명당 2대 꼴로 자전거를 소유하고 있기도 하다.
중국의 대표적인 전통연극으로는 경극(京劇)이 있다.
베이징에서 발전하였다 하여 경극이라 하며
14세기부터 널리 성행했던 중국 전통가극인 곤곡(崑曲)의 요소가
가미되어 만들어졌다.
여타 대부분의 나라들처럼 중국에서도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
이는 부유층과 국유기업 관리등이 실제로 받는 월급외에 각종 제도적 허점과
편법을 이용해 각종 부수입을 챙김으로써 빈곤층이 벌어 들이는 수입의 수십 배에서
많게는 수백배의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여건에 있다는 것이다.
1988년 상하위 10%간의 소득격차가 2007년 23배로 늘어났다는 공식 통계가
있긴 하지만, 통계에 잡히지 않는 수입까지 포함하면 실제 차이는 55배 가량
될 것이라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출처/ 와우뉴스)
2009년 중국의 1인당 GDP(국내총생산)는 3600달러에 달했다.
한편으로는 백만장자 또한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세계명품협회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의 명품 소비규모는 94억달러에 달해
세계시장 점유율 27.5%를 기록했다. 이는 일본에 이어 세계 2위에 해당한다.
중국의 전체 인구는 2008년 기준으로 13억 3004만명이다.
중국 정부는 인구증가가 중국의 경제발전의 혜택을 나눠 먹어야 할
입만 늘려 놓은 셈이라는 판단아래 교육과 선전 및 상벌을 통해
1자녀갖기 운동을 추진하고 있으나, 농촌의 전통적인 남아선호
관념 등의 이유로 제대로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포스트 잘봤습니다. 예전 생각이 나네요 ^^
그런데 내용중에 중국인이 돈을 중시한다는 부분에서 많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예전에도 중국관련포스트나 주변에서 하는 소리를 듣다보면 "이건 아닌데..."적어도 "꼭 그렇게 단정지을 수는 없는데"라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중국인의 물질(금전)중시풍조를 예로 들어도 단편적인 부분을 확대해석하거나, 사소한 것에 주관적인(한국적인 혹은 외국인의) 해석이 곁들여지다보면 곡해된다고 생각하거든요.그러면서도 참 복잡하고 어려운게 사람들이 저렇게 생각하는 것을 저건아닌데....라고 하면서 제 결론은 또 그 사람들이랑 비슷하단 말이에요 ^^ 그래서 뭐라고 할수도 없는 노릇이고....
예전에 우리나라에서 중국인들은 돈만 밝힌다는 의미를 빗대어
왕서방이라는 표현을 많이 쓴걸로 알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원로가수였던 김정구님이 불렀던 왕서방 연서라는 노래가 있었지요.
실제로 조금 시간이 지나기는 했습니다만 자료를 찾아보니 '신랑'이라는
중국 최대 포털사이트에서 인생의 10대 희망을 묻는 여론조사를 했었는데
응답자의 70%가 축재(蓄財)를 꼽았다는군요.
그러고 보니 고급식당이나 집안에 '재신'을 모셔놓고 치성을 드리는 모습 또한
홍콩이나 대만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냥 단순한 생각으로는 선입견일 수도 있기는 하겠지만 아마 그런 부분도
크게 작용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허긴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라고 크게 다르긴 하겠습니까.
마침 어제 모 일간지에 '우리는 중국을 아는가'라는 기사가 실렸었습니다.
세계 주요 2개국(G2)으로 불릴만큼 크게 성장해 온 중국의 주변국으로서 우리나라는
서로 상생해 나가기 위해서는 그들을 제대로 알아야 하는데 중국과 관련된 전략적인
연구인력은 턱없이 모자라거나 아예 없다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하물며 나라에서도 그럴진데 일개 서민이 그것도 잠시 그 나라를 다녀왔다고 해서
무얼 알겠습니까만, 일단 기존 자료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는 한계도 실감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모든 중국인들이 그렇지는 않았으면 하는것이 저의 바램이기도 합니다.^^
방문해 주시고 댓글까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ㅎㅎ
어떤 이유에선지는 모르겠지만 아쉽게 되셨네요.
특히 천안문, 만리장성, 자금성 등이 위치한 곳이기에 재우군의 경우에도 큰 공부가 될 것 같은데 말이죠.
그래서 저는 아들래미와 함께 다녀왔더랬습니다.
이후에도 혹시 기회가 되신다면 재우군과 함께 세가족 모두가 함께하는 뜻깊은 여행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냥 괜히 중국을 세계 주요 2개국(G2)에 포함시키지는 않았겠지요.ㅎㅎ
말씀대로 짧은 여행이었지만 경제대국에 걸맞은 스케일과 위용을 느껴 볼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습니다.^^
물론 정치분야까지 대국이 되려면 아직 멀어보이기는 하지만,
특히 우리나라와의 이해관계에 있어서 그 위상이 나날이 높아가고 있는 걸 보면
앞으로도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지켜봐야 할 대상인것 만큼은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거.. 원영님을 실망시켜 드릴 것 같아 걱정부터 앞서는데요.^^;;
예, 그런 것 같습니다.^^ 이곳에도 개발의 바람이 불어 골목길이 많이 없어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뒷골목은 오히려 관광 상품화 되어 크게 인기를 끌고 있다네요.
어쩌면 그 나라를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는 바로 골목문화에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경제대국으로 불리워지고 있는 만큼, 정치적으로도 균형을 맞춰 가야 할텐데.. 그건 쉽지 않아 보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