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표면적의 약 70.8%를 차지하며, 3억 6천만㎢의 면적으로
육지면적의 2.43배가 된다는 바다,
그 넓고 깊은 바다를 뚫고 올라, 가쁜 호흡을 토해내는 바위섬.
고대로 부터 끝을 알 수 없을 정도의 넓이와 깊이로, 또는 해난으로 인한
희생으로 인하여 신비로움과 공포감을 함께 자아내게 했던 바다.
지금까지도 그 내면이 명쾌하게 드러나지 않았기에, 여전히 두려운 존재로 남아 있다.
그렇거나 말거나, 크고 작은 배들은 그 바다 위로 나 있는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무심히 오고 갈 뿐이다.
한 줄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바다를 양분하는...
비록 사람이 살아갈 수 없는 땅이지만,
두 발로 딛고 설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냥 마음이 편안해진다.
거친 파도와 바람이 함께 만들어 놓은 상처,
아니면 인간에게 주는 바다의 또 다른 선물...
뭔가 일이 풀리지 않아 답답할 때, 혹은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할 때면 생각나는 바다.
막힘없이 시원하게 터진 그 곳에서 인간은 꿈을 발견하게 되고,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짙푸른 바닷물에서 모험을 떠 올리며,
거칠게 몰아치는 파도에서 용기와 도전을 배운다.
바다는 그 넉넉함으로 모든 것을 포용하고, 또 다른 삶의 지혜마저 일깨워 준다.
태양이 자세를 낮춤에 따라, 바다도 서서히 휴식을 준비한다.
인간에게 있어 또 하나의 삶의 터전이기도 한 이 바다는 곧 적막속으로 빠져들 것이다.
아니, 보이지 않는 그 속에서도 누군가의 치열한 삶은 계속될 것이다.
다음날, 어제 갔던 길을 그대로 다시 올랐다.
등대섬은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건만, 날씨는 아쉽게도 어제와 달리 구름이 많다.
이미 한차례 눈인사를 주고 받은 뒤여서 인지,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벌써 친근감마저 느껴지고...
언제 나타났는지 유람선 한 척이 다가와 등대섬을 한바탕 쓰윽 훝어 보고는
그냥 뒤쪽으로 모습을 감추어 버린다.
아마 저기서 올려다 보는 풍경도 여기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 못지 않으리라.
아랫쪽 전망대에서 바라 본 등대섬으로, 해식단애와 어울린 등대가 멋스럽다.
그러나 흐려서 바래버린 하늘색 때문에 등대의 윤곽이 그대로 묻혀버려 아쉽기만 하다.
같은 위치에서... 수려한 풍광 때문이어서 인지
어느 각도에서 보나 그대로 하나의 그림이 되는 것 같다.
바다를 향해 우뚝 서 있는 기암석.
무너져 내린듯한 그 아랫쪽은 까마득한 절벽이다. 위쪽에 보이는 섬은 대매물도.
기암석 위쪽으로 길이 보인다. 사람이 드나든 흔적이다.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린다.
그 뒤로는 무엇이 그리 바쁜지 작은 배는 한껏 내달리고...
그와는 반대로 제법 커다란 배는 오히려 더 여유롭게 떠다닌다.
이렇듯 바다는 그냥 평온하게 보일 뿐, 오가는 배들로 인해 쉽게 잠들줄을 모른다.
바닷길이 열린 탓인듯, 한동안 적막감에 쌓여있던 등대섬은 몰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서서히 활기를 찾아간다. 그 위에 홀로 서 있는 하얀 등대도 한동안은 외롭지 않을 것 같다.
■ 소매물도등대는...
▶ 최초점등일 : 1917. 08. 05
▶ 면적 : 74.009㎡ (22.388평)
▶ 운용표지
광파표지 - 시인거리 약 46km
음파표지 - 청취거리 약 9km
이곳 소매물도 등대는 하얀색의 원형 콘크리트 구조물로 높이는 16m이며,
주변 경관과 조화를 잘 이루고 있어, 그 모양 또한 고풍스런 느낌을 준다.
등대불을 밝히는 등명기는 2209*1085cm의 대형 프리즘 렌즈를 사용하고 있어,
그 규모가 웅장하면서 48km거리까지 불빛을 비추기 때문에 남해안을 지나는
선박들의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다.
물이 들고 남에 따라 소매물도와 동쪽의 등대섬을 연결시켜주었다가 다시 나누어지는
70m의 열목개 자갈길. 그 길을 건너서 드디어 등대섬으로 진입했다.
그 곳에서 소매물도쪽으로 바라다 본 모습이다.
▶ 열목개/ '열린 목'이라 하여, 물이 나서(간조시) 소매물도와 등대도 사이에 목이 드러나
뱃길을 막았다가 만조시 이 좁다란 목이 물속에 잠기게 되면, 동서 바다가 열려
배를 타고 지나갈 수 있어 부른 지명이라고도 하고, '여린 목'이라 하여 두 섬을 잇는 목이
여리고 가늘게 생겼다 하여 부른 이름이라고도 한다.
목개는 '열린 목' 또는 '여린 목'이 '열목'으로 변한 것으로 추정된다.
통영에서 뱃길로 약 20km 해상에 위치한 매물도는, 행정구역상 경남 통영시
한산면 매죽리에 속하며 '대매물도'와 '소매물도'로 나누어져 있다.
그 중 우리나라 섬 중에서 경치가 가장 아름답다고 알려진 소매물도로 향했다.
거제 저구항에서 30여분 걸려 소매물도에 도착하니, 선착장 왼쪽으로
병풍같이 둘러쳐진 해안절벽이 가장 먼저 맞아준다.
그 곳에서 바라다 보이는 짙푸른 남해바다가 무척이나 시원스럽다.
소매물도는 지난 2003년 해양부가 전국의 어촌을 대상으로 선정한
'아름다운 어촌 100선'에 꼽히기도 했다.
선착장, 우측으로는 절벽길이다.
평지가 드물고, 해안 곳곳에 해식애가 발달한 지형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내리자 마자 바로 언덕길이다. 첫 풍광부터 예사롭지 않은 것 같다.
짐을 풀고나서 잠시 숨을 돌린 후,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등대섬이 궁금하여 곧바로 망태봉으로 향했다.
선착장에서 망태봉까지 0.75km, 망태봉에서 등대까지는 1.30km로, 고만고만한 거리이다.
도중에 만난, 1996년도에 폐교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폐쇄되어 있는 소매물도 분교장터의 모습으로,
곳곳에 수국이 피어 있어 고즈넉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아니, 너무나 조용하여 으시시한 분위기라고 해야 더 맞을 것 같다.
이 곳은 영화 '파랑주의보'를 찍은 곳이기도 하다.
능선에 올라서서 잠시 꺾어 내려가자, 눈에 익은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진으로만 보아 오던 바로 그 등대섬이었다. 일명 쿠크다스 섬이라고 했던가.
조금 더 높은 곳에서 전체 모습을 조망해 보기 위해 오른 망태봉 정상, 그 곳에서 바라 본
등대섬의 모습으로, 마치 바다위를 헤엄쳐 가는 거북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등대섬 저 뒤쪽으로는 기암절벽이 형성되어 있어 파도와 어우러지는 모습이 장관이라고 한다.
주황색 지붕을 한 건물은 항로표지관리소.
■ 소매물도의 자연환경
▶ 기상/ 평균기온 14.7℃(최저 -10.7℃, 최고 36.9℃), 평균풍속 2.5m/s(최대 46.6m/s)
연평균 강수량 1,562.7mm, 상대습도 65.4%
▶ 지형/ 표고 20m 미만(45.6%), 경사 20%초과(75.8%)
▶ 식생/ 식재한 소규모 곰솔군락과 초본류의 이차초지로 대별됨.
▶ 경관/ 등대섬 전체는 통영8경에 속하며 경관이 뛰어나다.
등대섬의 기암절벽 사이로 시퍼런 파도가 몰려와 하얗게 부서지기를 반복한다.
하루 두 번 있는 썰물때에는 소매물도와 등대섬을 연결하는 바닷길이 열려
이 길을 걸어서 건널 수 있다. 물론, 지금 이 정도라도 충분히 등대섬으로 건너갈 수는 있으나,
물때가 닫히는 시간이라 섣불리 나서지를 못하고 그냥 되돌아 설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쉬울 것은 없다. 내일이 또 기다리고 있으니...
되돌아 오면서 망태봉을 거쳐 내려서자 마자, 올라갈때 보이지 않던
돔형 지붕의 구조물이 눈에 들어 온다. 이 건물은 이전의 '세관 매물도 감시서'로
2~3명의 세관직원이 상주하면서 밀수를 방지하기 위해 레이더와 망원경을 이용,
단속을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대로 방치된 상태다.
독특한 모양새로 시선을 끌기에, 그대로 두기에는 아까운 구조물이라는 느낌이 든다.
아무쪼록, 계속 그대로 방치되어 흉물로는 남아있지 않았으면 한다.
경상남도 거제시 일운면 구조라리에 위치한 구조라해수욕장은 와현해수욕장과 함께
거제도에서 두 곳 밖에 없는 백사장이 있는 해수욕장으로,
길이 1km의 해안으로 펼쳐진 모래가 부드럽고, 수심이 완만하며,
수온 또한 해수욕하기에 적당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조선 중기에 축성한 구조라성지와 내도, 외도, 해금강 등 이름난 여러 명승지가
가까이 있어 유람선을 타고 이곳들을 두루 관광해 볼 수도 있다.
유람선 선착장은 구조라해수욕장 바로 옆 구조라항에 위치해 있다.
또한 이 곳에서는 싱싱한 생선회와 멸치, 미역 등의 특산품도 만나 볼 수 있다.
구조라해수욕장 서쪽 해상으로 빤히 바라다 보이는, 효자의 전설이 담겼다는 윤돌섬.
이 섬은 육지와는 약 500m정도 떨어져 있으며 무인도로, 동백나무, 구실잣밤나무, 참식나무,
생달나무 등 상록 활엽수 및 노거수들이 많이 자라고 있다.
경남 기념물 제239호로 지정되어 천연림으로 보호되고 있는만큼,
일반인의 출입 또한 금지되어 있다.
■ 윤돌섬의 전설
윤씨 삼형제와 함께 윤돌섬에 사는 늙은 노파는, 북병산 밑 양지마을에 사는
김망월이라는 홀아비 늙은 어부와 함께 서로 외로움을 달래게 된다.
노파할멈이 매번 아들 삼형제 몰래 망월노인을 찾아가곤 했는데,
이 윤돌섬은 북병산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려 그 줄기가 간조때면 물위로 드러나기 때문에
윤돌섬에서 양지마을까지 걸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엄동설한이 되고나서 부터는 간조때를 기다려 섬과 육지사이를
버선을 벗고 걸어갈 수 밖에 없었는데, 그러자니 추위때문에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상황이라,
그토록 보고싶은 망월영감을 만나지도 못하고 그저 애만 태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이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 본 윤씨 삼형제가 홀어머니를 위해
징검다리를 놓아주게 되면서 부터는 버선을 벗지 않고서도 건널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이 섬을 효자섬이라고 불렀다가, 윤씨 삼형제가 돌다리를 놓았다는 의미의
윤돌섬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전설처럼 바닷길은 사람이 건널 수 있을 만큼 물이 빠지지는 않는다.
다만 1년에 딱 한 번, 진도 바닷길이 열리는 시기에는 거제도와 연결이 된다고 한다.
그러한 사연을 담은 윤돌섬 주위로 고깃배들만 무심히 오가고...
해수욕장 전면으로 보이는...
저 멀리 왼쪽, 동그랗게 봉긋이 솟은 섬이 해금강이다.
해금강을 배경으로 오가는 여러 종류의 배들.
내륙형 해안이어서 인지 대체로 조용하고, 호수처럼 아늑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이 곳 구조라해수욕장에서 아쉬운 점이라면, 모래질이 좋기는 하지만
백사장의 폭이 좁으며, 따가운 햇볕을 가려줄 그늘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큰 바위는 '아버지바위'이고 작은 바위는 '아들바위'라 하며
둘 다 머리에 삿갓을 쓴 형태이다.
목포는 1897년에야 일본인들이 한국침략의 서남거점으로 개항해
오늘날처럼 도시로 발전했다. 그 전에는 영산강하구를 지키는
보잘 것 없는 나루로 조그만 마을이 있었을 뿐이다.
이 갯마을에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병든 아버지를 모신
가난한 소금장수 청년이 살고 있었다.
그는 포구에 실려 오는 소금을 받아 인접마을에 팔아서 끼니를 이어갔다.
가난하여 약 한 첩 제대로 쓸 수 없었던 청년의 아버지는
날로 병환이 악화되어 갔다. 청년은 안타깝기만 했다.
그는 스스로 큰 결심을 했다.
이번에는 아버지 약값을 충분히 벌어야 집에 돌아온다고 다짐했다.
힘에 겹도록 소금 짐을 짊어지고 떠났다.
그러나 딱하게도 소금을 사려는 사람이 없었다.
빈손으로 집에 돌아갈 수 없었던 청년은 날품이라도 팔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부유해 보이는 길갓집을 찾아 들었다.
그 집주인은 소문난 구두쇠로 한 달 동안을 일하고 품삯을 달라는 청년에게,
'그동안 먹여준 밥값도 못한 주제에 품삯은 무슨 놈의 품삯이냐' 며 쫓아버렸다.
아버지 약값을 구하지 못하면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한터라
길거리에 주저앉아 신세한탄만 하고 있었다.
그 마을을 지난 던 도승이 청년을 보고 무슨 걱정거리가 있기에
그리 한숨을 쉬느냐고 물었다. 청년은 자초지종 그의 처지를 말했다.
얘기를 들은 도승은 크게 낯 색이 변하며 청년을 꾸짖었다.
'청년은 한가지만 생각했지 깊은 생각이 부족했네,
자네가 약값을 마련하겠다고 타향을 전전하고 있는 동안 병든 아버지는
누가 돌보았겠으며 그동안에 죽었다면
애써 약값을 마련했다 한들 무슨 소용 있겠나'
그때서야 병든 아버지를 생각한 청년은 부랴부랴 집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돌보는 이 없이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었다.
청년은 그의 어리석음이 한없이 후회스러웠다.
이승에서 편히 지내지 못한 아버지이지만 저승에서나 편히 쉬게 하는 것이
그의 도리라 생각하고 관을 메고 명당을 찾아 나섰다.
갓바위는 예부터 말 형국으로 명당이 있고 안장터가 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산을 헤매던 청년은 지금의 갓바위 곁에서 앞을 바라보니 시원하기가 그지없고
양지바르므로 이 곳에 묘를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
관을 바닷가에 놓고 묘를 파던 청년은
그만 실수를 저질러 곁에 둔 관을 건드렸던지
관이 데굴데굴 굴러 바닷속으로 첨벙 빠지고 말았다.
넋을 잃은 청년은 행여 관이 떠오르지 않을까 기다렸으나 영영 떠오르지 않았다.
바다를 내려다보면서 엉엉 울던 청년은 하늘을 쳐다볼 수 없는 놈이라며
바다로 뛰어들어 자살하고 말았다.
이 일이 있은 뒤로 이 곳에 아버지바위와 아들바위가 솟아오르고,
아들은 죄진 몸이라 하늘을 대할 수 없어 삿갓을 쓰고 있었다.
이 삿갓은 넓이가 6 m가량이고 한쪽 깃이 2m가량이나 된다.
청년이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팠다는 바위의 윗부분은
바위가 널리 깔린 탓인지 풀이 자라지 않고 있지만 사람들은 청년이
파헤쳐 놓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부근에는 이 바위를 중바위라 부르는 이도 있다.
아라한과 부처님이 영산강을 건너 이곳을 지날 때
쉬던 자리에 쓰고 있던 삿갓을 놓고 간 것이 갓바위가 되었다고도 주장한다.
지금 이곳은 이씨 집안의 선산이 되어 여러 개의 묘가 들어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