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창골에서 주방천(周房川)길로 내려서면서
가을의 흔적을 눈에 담는다.
제3폭포는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되지만
시간의 여유가 많지 않아 그대로 지나친다.
대체적으로 한산한 분위기다.
단풍은 곳곳에서 밝은 표정으로 반겨주고,
발걸음도 덩달아 가벼워진다.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깃든 주방천계곡의 제2폭포(용폭포).
이곳 계곡 곳곳에는 물과 바위가 만나서 형성된 폭포,
또는 소(沼)가 산재해 있어 눈을 즐겁게 해준다.
주왕산의 매력은 산 입구에서부터 제3폭포에 이르는 약 4km의 계곡길이다.
특히 상의매표소 - 대전사 - 주왕암 - 급수대 - 제1폭포 - 제2폭포 - 제3폭포 -
내원동 회귀코스는 아주 완만한 길이어서 누구나 쉽게 다녀올 수 있다.
그래서인지 계곡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더 많은 인파로 번잡해진다.
또 다시 개울을 따라 내려가니 바위를 두 개로 쪼갠듯한
거대한 단애가 나타난다.
하늘을 찌를듯이 우뚝 선 그 두 개의 바위 틈 사이로는 길이 나 있다.
과연 자연이 만들어 놓은 비경이라 아니할 수 없다.
주왕산의 절경을 이루는 암석들은 화산의 분화구에서 폭발한
뜨거운 화산재가 지면을 따라 흐르다가 쌓여 굳어진
회류 응회암으로 이루어졌다.
이런 회류 응회암들은 침식에 약하기 때문에 풍화의 차이에 따라
수직절벽이나 계단모양의 지형, 폭포 등을 만들어 내게 된다.
주왕산을 형성한 화산 활동은 지금으로부터 약 7천만년전으로
추정되는데, 이 때는 지질학적으로 중생대 백악기 후기로
공룡들이 떼지어 살던 시기에 해당된다.
선녀폭포라고도 불리우는 주왕산 제1폭포.
생각보다는 낙차가 그리 크지 않다.
그러나 주위로 버티고 선 높은 암벽 때문인지
왜소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태백산맥의 끝단에 위치한 주왕산은 기암절벽이 너무도 유명하여
한 때는 석병산(石屛山)으로도 불리웠다.
곳곳에 주왕의 전설이 있는 특이한 바위와 굴이 있으며
유난히 색이 짙은 철쭉과 아름다운 단풍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올해의 단풍은 생각보다 그리 곱지가 않다.
생김새가 떡을 찌는 시루와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 시루봉.
측면에서 바라보면 마치 사람의 옆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시루봉에는 옛날 어느 겨울, 한 도사가 이 바위에서 도를 닦고 있을 때
신선이 와서 불을 지펴 주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으며 바위 밑에서
불을 피우면 그 연기가 바위 전체를 감싸면서 봉우리 위로 치솟는다고 한다.
이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서 아들바위, 학소대, 급수대,
망월대 등의 기암들과 만나게 된다.
주왕산 입구쪽인 대전사(大典寺)로 들어섰다.
사찰 뒤 왼쪽으로는 장군봉, 오른쪽으로는 기암(旗岩)이 버티고 서 있다.
특히 기암은 주왕산의 상징과도 같으며 주왕이 대장기를 세웠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한가운데에는 두 조각으로 갈라 놓은 듯 금이 가 있는데 고려시대 장군
마일성이 쏜 화살에 맞아서 생긴 것이라 전해진다.
갈색으로 물들어가는 숲 위로는 장군봉이 높이 솟아 있다.
주왕산 상의매표소를 통과하면 바로 만나게 되는 대전사는
신라 문무왕 때 창건되었으며 최치원, 나옹화상, 도선국사, 보조국사,
무학대사, 서거정, 김종직 등이 수도했고, 임진왜란 때에는
사명대사 유정(惟政)이 승군(僧軍)을 훈련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진입로 옆 먹거리 상가에는 사과와 대추를 넣은
동동주가 익어가고 있다.
여기에 더덕, 인삼, 당귀 등 한약재를 넣어 만들기도 한다.
아침 햇살과 물안개, 그리고 물에 잠긴 왕버들의 반영으로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한다는, 그리하여 사진하는 사람들로 부터
성지로 불리워지기까지 한다는 주왕산의 남쪽 끝자락에 자리한
주산지의 모습이다.
마음 속으로만 그리던 그 현장을 주왕산 등반을 겸해
찾아가기는 하였으나, 이미 그런 모습을 기대하기에는
시간은 너무나 많이 지나 있었다.
청송군 부동면 소재지인 이전리 마을에서 약 3km 지점에 위치한
주산지는 농업용수, 가뭄 대비용으로 조선 숙종46년에 축조된
길이 100m, 너비 50m, 3만3057㎡ 규모의 인공저수지다.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30여종의 버드나무 중에서
키가 크고 잎이 넓은 것을 왕버들이라 불렀는데,
이곳 주산지와 왕버들의 조화는 표현 그대로
한 폭의 수채화같은 느낌이다.
이곳에는 수령 100년이 넘은 왕버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 저수지 속에는 약 150년생의 능수버들과 왕버들
30여 그루가 자생하고 있는데 주위의 울창한 수림과 함께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아랫줄기가 물속에 잠긴 채 수면 위로 솟아 있는 모습이
한편으로는 그로테스크해 보이기까지 한다.
몇 년을 이렇게 자라왔을까.
분명 짧은 시간만은 아닐터...
그래서인지 그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묵직한 감동이 전해진다.
깊어가는 가을은
이곳 물 속 깊은 곳까지 들어왔다.
주산지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촬영지로 한때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비록 근사한 안개와 수면 위의 반영은 없을지라도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멋진 풍경이다.
울긋불긋, 현란한 색으로 어지럽다.
수면위로 바람의 흔적이 가볍게 스쳐지나가면서
흐트러진 반영이 이 가을을 더욱 더 현기증나게 한다.
비록 인공적으로 조성되었다고는 하지만,
오랜 세월로 인해 이제는 그 자체가 하나의 자연이 되어 버렸다.
분명 이는 자연이 주는 선물이기도 하리라.
그리 크지않은 규모이지만 지금까지는 아무리 가물어도
바닥을 드러내 보인적도 없다고 한다.
이 역시 자연의 축복이라 아니할 수 없다.
저수지 한쪽으로는 100m 남짓한 산책로가 마련되어 있다.
그리고 그 끝에는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고백하건데... 사진을 찍고나서도 부끄럽기 그지없다.
물론, 사진의 질적인 면 만을 이야기 하려는 것은 아니다.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갔던 것에 대한 자기반성이자 변명이다.
이곳은 첫걸음이다.
그래서 이제껏 눈으로만 봐 왔던 그 멋진 장면들을 상상해 가면서
입구를 지나 목책(木柵)이 쳐진 산책로를 따라 전망대까지 들어갔다.
그러나 다시 되돌아 나오면서 살펴봐도 물에 잠긴 나무들은
부분적으로 다른 나무에 가려 가려있어 목책을 넘어서야만
온전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목책을 설치한 것은 자연의 훼손을 우려한 불가피한 조치였겠지만
당장은 아쉽기만 했다.
잠시 지켜서서 난감해 하고 있는데 언제 들어갔는지
목책 안쪽에서 누군가가 손짓을 하며 사진을 부탁해 왔다.
그리하여 그 순간만큼은 아무 생각없이 목책을 넘어 월경하게 되었고,
이미 내친 걸음이라고 생각, 자신의 카메라로 후다닥 몇 장 찍고
되돌아 나오게 되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목책도 목책이지만 그곳에는 출입금지 현수막도
함께 걸려 있었다고 한다.
그런 사실을 접한 순간 갑자기 얼굴은 화끈 달아오르고...
결국 사진에 대한 욕심 탓에 주위의 풍광에 정신을 빼앗긴 나머지
그 조차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뒤이은 산행일정 때문에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마음이 급한 나머지 앞뒤를 가리지 않은 데에도 그 원인이 있다고 하겠다.
결론적으로 그 분 덕분(?)에 아쉬움은 크게 남지는 않았지만,
대신 그 자리는 더 큰 부끄러움이 차지한 셈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마땅히 이 사진조차도 게시 않아야 옳겠지만,
그저 매 맞는 심정으로...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가 있다.
주위가 온통 환한 색깔들로 가득한 것으로 보아
가을은 이미 이만큼 가까이 와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또, 가까이 다가온 만큼 이별의 시간 또한
그다지 길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강렬한 느낌으로 찾아온 가을이다.
그 유혹은 사람들을 자연 속으로 이끌고
사람들은 그 속에서 또 다른 자연이 된다.
가을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그들도 자연의 일부이기에 어쩌면 당연한 일인런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렇듯 인간은 자연을 그리워하고 필요로 하고 있지만,
자연 또한 그러할런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위협적인 존재이기만 한 것이 바로 우리들
인간인 것은 아닌지 스스로 되돌아 볼 일이다.
지난 11월초, 지나가는 가을의 뒷 꽁무니라도 잡아 볼 양으로 서둘러 나섰던 봉화 청량산.
언젠가 꼭 한번은 가 보리라 생각하여 마음속에 담아 놓고만 있던 곳이다.
청량사를 찾기 전에 먼저 청량산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다는 축융봉(祝融峰)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산성 입구의 표지판이 정상까지가 2km로 1시간 10분여가 소요됨을 알린다.
언덕길로 처음 한 구비를 돌아들면 바로 최단거리 코스인 산성길이 나오는데,
그 성곽을 따라 오르면서 밟게되는 계단이다.
얼마간 오르다 보면 만나게 되는 밀성대(密城臺).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청량산으로 와서 산성을 쌓고 군사들을 훈련시킬 때,
명령을 어긴 죄인을 절벽 끝에서 밀어 처형했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그 자리에는 세워진지 얼마되지 않아보이는 전망대가 계단이 통제된 채로 서 있다.
산성 또는 계단... 오르는 길은 깨끗하게 정비된 상태라 그 어느 쪽이라도 좋다.
당시 정상부위에서는 산성의 복원작업이 한창이었다.
청량산성은 예로부터 군사적 요새였다.
이 지역은 삼국시대부터 고구려와 신라의 각축장이었고,
천연요새로서의 지형적 요건들을 충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곳의 지세는 산 앞으로는 낙동강이 휘감아 돌아 나가고, 험준한 천인절벽의
바위산으로 이루어져 외부의 침입을 방어하기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산성이 축조된 시기는 산성유지에서 삼국시대로 보이는 일부 유물이 수습된 바 있어
그 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 공민왕이 2차 홍건적의 난을 피해 몽진해 왔을 때
개축되었다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보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산성의 형태는 험준한 지세를 이용해 봉우리와 봉우리를 연결하는 포곡식(包谷式) 산성으로,
흙과 돌을 섞어 성벽을 연결시킨 토석혼축성(土石混築城)의 형태를 띤다.
지금도 산 곳곳에는 산성의 흔적이 역력하며, 장군의 지휘소였던 장대와 건물터,
성문터 등의 유구가 남아 있다.
해발 845.2m의 축융봉 정상에 다다르자, 구름 많은 날씨인데다가
바람길이 트였는지 갑자기 차가운 바람까지 불어와 몸이 저절로 움츠려든다.
우측에 보이는 망원경으로 반대편을 바라보면,
불쑥블쑥 솟아오른 청량산의 여러 암봉과 하늘다리가 잡힐 듯 다가온다.
청량산은 주왕산, 월출산과 함께 한국의 3대 기악으로 불리우며, 12개의 암봉을 가지고 있다.
축융봉도 청량산의 여러 봉우리 중의 하나이기에,
이 곳에서는 맞은편의 나머지 11개의 봉우리가 한 눈에 들어온다.
단풍은 이미 잔해만 남아있는 상태여서 영락없는 초겨울의 풍경 그대로이다.
청량산의 최고봉인 장인봉을 비롯하여 외장인봉, 선학봉, 자란봉, 자소봉,
탁필봉, 연적봉, 연화봉, 향로봉, 경일봉, 금탑봉, 그리고 이 곳 축융봉 등
12봉우리(육육봉)가 연꽃잎처럼 청량사를 둘러싸고 있으며,
봉우리마다 어풍대, 밀성대, 풍형대, 학소대, 금가대, 원효대, 반야대, 만월대, 자비대,
청풍대, 송풍대,의상대 등의 대(臺)가 있다.
산 속에는 신선이 내려와서 바둑을 두었다는 신선대, 선녀가 유희를 즐겼다는 선녀봉,
최치원이 마시고 정신이 맑아졌다는 총명수와 감로수 등의 약수가 있으며,
27개의 사찰과 암자 터가 있다.
원효대사가 창건한 유리보전(내청량사:경북유형문화재 47),
신라시대에 창건한 외청량사(응진전), 최치원의 유적지인 고운대와 독서당,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은신한 오마대(五馬臺)와 공민왕당(恭愍王堂),
공민왕이 쌓았다는 청량산성, 김생이 글씨를 공부하던 김생굴,
퇴계 이황이 수도하며 성리학을 집대성한 오산당(청량정사) 등 역사적 유적지도 많다.
아침의 따뜻한 햇빛을 그대로 받고 있는 응진전,
그리고 아직 채 걷히지 않은 짙은 그림자 속으로 숨죽이듯 몸을 숨기고 있는 청량사가
그 안쪽으로 살며시 들여다 보인다.
각각의 이름을 가진, 편마암으로 이루어진 여러 봉우리가 서로 몸을 기대고 있는 가운데,
좌측으로는 두 개의 봉우리 사이를 이어주는 하늘다리가 길게 걸쳐져 있다.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사람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 쪽도 마찬가지이다.
청량산의 하늘다리는 해발 800m지점의 왼쪽의 선학봉과 오른쪽의 자란봉을 연결하는
길이 90m, 바닥폭 1.2m의 현수교로, 2008년 5월에 완공 되었다. 이는 국내에서
산악지대에 설치된 다리로서는 가장 길고 가장 높아 청량산의 또 다른 명물이 되고 있다.
340kg/㎡의 통과 하중에 최대 100여명이 동시에 지나갈 수 있는 규모로,
올해에는 다리난간 중앙부분의 바닥재를 강화유리판으로 교체하여,
계곡아래를 훤히 내려다 볼 수도 있다.
시간이 지나자 내청량사의 얼굴이 그대로 드러난다.
오른쪽으로는 외청량사인 응진전이 금탑봉의 난간에 아슬하게 걸려있는 형국이다.
암벽이 3개의 층을 이룬 금탑봉은 청량산을 대표하는 봉우리이기도 하지만,
유달리 노란색잎을 가진 생강나무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풍경과 이름에서 공통점이 느껴지기도 한다.
마치 바벨탑을 연상케 하는 모습의 금탑봉...
그 위에 얹혀진 응진전을 지나 왼쪽 절벽으로 굽이 돌게되면,
청량사의 모습이 한 눈에 조망되는 어풍대를 만나게 된다.
이미 변화는 시작되었다.
훈훈하게 불어주던 바람도, 따뜻하게 몸을 덥혀주던 연못의 물도,
이제는 차갑게 식어가고 있음이 온 몸으로 감지된다.
몸은 웅크려지고, 생기 또한 점차 사그라진다.
살랑살랑 불어오던 바람도 어제의 그 바람이 아니다.
바람과 햇빛, 그리고 땅의 기운으로 부터
이제는 새로운, 또 다른 계절을 준비해야 함을 스스로 알게 한다.
누구는 계속될 삶을 위해서 달고 있던 잎을 하나 둘 떨어뜨리고,
또 누구는 곧 짧은 생을 마감하고 이 세상과 작별해야 한다.
그래서 이 가을을 두고 이별의 계절이라 하는가 보다.
아쉽지만... 보내야 할 것은 미련없이 떨구어 보낸다.
그리고 동시에, 또 다시 돌아올 새 삶을 위해 차분한 준비에 들어간다.
따뜻한 햇살이 살아 숨쉬는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누리려는 듯
가지에 매달린 채 안간힘을 써 본다.
그래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도 물론 알고는 있지만,
삶이란 분명 즐거운 것이 아니었던가.
비록 구석진 곳이었지만, 척박한 담벽에 의지하며 힘겹게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는 나고 자란 그 자리에서
이미 준비하고 있었던 것 처럼, 조용히 순응하며 그대로 시들어 간다.
그런 이유로, 이들에게 있어서는 이 계절이 결코 아쉽게만 느껴지는 것은 아닐 것 같다.
어쩌면 그것이 바로 행복이라는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언젠가는 떨어져 내릴 것이지만, 그래도 한 줌 미련이 남아서일까.
추위를 이겨내려는 듯 스스로 온 몸을 붉게 달구어 본다.
그러나 여전히 가늘게 떨려오는 몸...
이들의 간절한 몸짓을 보고서야 가을이 온 것을 알았고,
또 가을이 가고 있는 것도 알았다.
물론, 당연하게도 추운 겨울이 지나고 나면,
이들의 삶은 또 다시 계속되어지리란 것도...
가을비에 힘없이 떨어져 내려앉은 나뭇잎.
그것은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는,
또한 겨울이 멀지 않았다는 신호.
생존이라는 전장에서 맞이하는 낙오된 인생,
그러나 어찌하랴.
실패한 인생 그 자체도 결국은 삶인 것을...
비록 선택되지는 못했어도,
어차피 돌아가야 할 그 자리라면, 또한 그것이 자연의 순리라면
기꺼이 순응할 뿐 이다.
아니, 어쩌면 미리 예감하고
오래전부터 이러한 이별을 준비해 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불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대로 남겨진, 보다 더 알차고 풍성한 열매들로
인간들에게 더 큰 기쁨으로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갑갑한 외피를 벗고 속살을 내 보인...
그러나 자신있게 살아온 삶이기에 부끄러움은 있을 수 없다.
그저 당당히 세상과 마주할 뿐...
여기 저기서 터져 나오는 소리없는 아우성...
가을이 깊어감을 알리는 소리다.
그 풍요로움의 무게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화려한 색깔이 하나 둘씩 늘어감에 따라 초록은 가만히 숨을 죽인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넉넉해진다.
그래서 이 가을을 두고 풍요의 계절이라고 하는가 보다.
결실로 보답하는 가을의 선물,
그 고마움에, 그 삶에, 더 나아가 함께 호흡하고 있는 대자연의 경이로움에
그저 고개만 숙여질 뿐...
해마다 그랬듯이, 올해도 우리의 명절인 추석이 찾아 왔습니다.
짧은 기간이지만, 여유와 풍요로움을 맘껏 누리시고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뵈었으면 합니다.
이웃분들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사실, 이곳 해인사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다.
이미 모두가 익히 알고있는 곳이다 보니...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256호인 대적광전
대적광전은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모시는 화엄종 사찰의 중심 법당이다.
부처가 설법한 진리가 태양처럼 우주에 가득 비추는 것을 형상화한 비로자나불은
불교의 진리자체를 상징하는 불상이다.
비로자나불을 모신 전각은 대적광전 이외에도 화엄전과 비로전이 있다.
대적광전은 802년(애장왕 3)에 순응,이정 두 스님이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의 명칭은 비로전이었으나, 1488년(성종 19)에 왕실의 지원에 의해
학조대사가 중창하면서 대적광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현재의 건물은 1817년(순조17)에 불타버려 이듬해 중건한 것을 1971년에
지관스님이 다시 중수한 것이다.
큰 절의 중심 불전에 걸맞게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을 한 우람한 모습이다.
정선이 그린 해인사 그림에는 대적광전이 2층으로 그려졌는데,
1817년의 화재 이전에는 지금보다 더 큰 건물이었을 것이다.
지금의 모습은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다포계 팔작집으로서
중수과정에서 많이 변형되었음을 알 수 있다.
법당 안에는 용기사에서 옮겨온 중앙의 큰 비로자나불을 비롯해
법단의 좌에서 우측으로 법기보살, 보현보살, 지장보살, 비로자나불(대),
비로자나불(소), 문수보살, 관세음보살 순으로 일곱분의 불보살님이 봉안되어 있는데
비로자나불과 지장보살이 함께 모셔진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이는 주변지역의 불타버린 법당에 있던 지장보살을 옮겨 놓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4호인 해인사 3층석탑
해인사의 대적광전 아래 서 있는 석탑으로, 넓은 뜰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어
일명 ‘정중탑(庭中塔)’이라고도 불린다.
이 탑은 2중 기단과 3층의 탑신 및 지붕돌로 이루어진 통일신라 후기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이다.
원래 이 탑의 받침은 신라 석탑 양식인 2중이었으나, 1926년에 탑을 수리하면서
받침을 확장하고 한 층을 더 올려, 본래 지니고 있던 조화미를 상당 부분 상실하고 말았다.
4면의 각 모서리에 기중을 새긴 것 외에는 별다른 조각이 없다.
지붕돌받침은 신라 석탑의 전형인 5층으로 되어 있고,
지붕돌 추녀 끝은 살짝 들어올려져 완만하게 처리되었다.
지붕돌의 각 모서리에는 작은 종이 달려있는데, 본래의 것은 없어지고
나중에 다시 매단 것이다.
탑의 꼭대기 역시 일부가 소실되어 꼭대기를 떠받치는 받침대와
위로 핀 연꽃, 바퀴만 남아있다.
1926년 6월에 이 탑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상층 받침의 돌 함 속에서 9개의
작은 불상이 발견되었는데, 석탑을 수리하고 나서 이들 불상을 다시 탑 안에 봉안하였다.
또 이 석탑 앞에는 코끼리의 눈모양을 형상화했다는 안상과 연꽃무늬가 조각된
배례석이 있었으나 수리하는 과정에서 석등 앞으로 옮겨졌다.
[조선불교통사] 에는 태조가 즉위하여 이 탑을 수리할 때, 대장경을 탑 안에 봉안하면서
나라의 번영과 백성의 평안을 빌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그러나 1926년에 탑을 수리할때 대장경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태조가 수리한 탑이
이 탑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더욱이 근래의 사찰 보수 때 경학원 근처에서 신라 석탑의 재료가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또 다른 석탑이 있었을 가능성도 크다고 하겠다.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5호인 해인사 석등
석등은 부처님이 계신 사찰에 어둠을 밝히기 위해 만든 것이다.
부처님에 대한 등 공양과 관계된 것이므로 부처님을 상징하는 탑과 함께 법당 앞에 설치된다.
이 석등 역시 원래 석탑 앞에 있었지만 현재 위치로 옮겨놓았다.
옮겨진 이유와 시기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없다.
석등은 받침돌과 기둥돌, 등불을 놓는 화사석, 지붕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둥돌이 원래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전체의 크기는 알 수 없다.
맨아래 네모난 받침대에는 코끼리 눈 모양의 무늬를 새겨 넣었으며,
8각형의 아래 위 받침대에는 8장의 연꽃잎을 각각 따고 하늘을 향하도록 새겨넣었다.
화사석에는 4개의 창을 두었는데, 창 사이의 모서리 4면에 각각 사천왕상을
돋을새김한 것이 이채롭다.
지붕돌은 역시 8각으로 처리하여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었으며 맨 위에는 둥근 구슬을 올렸다.
새겨진 눈 모양과 연꽃무늬의 우아한 조각수법, 그리고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볼 수 있다.
한편 1398년 조선 태조 7년에 강화 선원사에 있던 팔만대장경을 지천사로 옮겼다가
이듬해 이곳으로 옮겨왔다.
팔만대장경판전은 1995년 12월에 세계문화 유산으로 공식지정되었다.
경내에는 일주문, 대적광전,구광루 등 문화재 및 암자들이 즐비하여
찾는 이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다.
붉게 물든 덩굴은 담장을 휘감고,
하늘은 마냥 높기만 하다.
대적광전의 화려한 단청.
섬세한 인간의 손길이 이루어 놓은,
획 하나마다에 가득 담긴 불심...
고려팔만대장경판이 보존되어 있는
대장경판전의 입구.
장경판전은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경이나 그것을 인쇄하기 위한 목판을 보존하고 있는 전각으로
사찰에 따라 대장전 혹은 판전, 법보전 등으로 불리운다.
합천 해인사의 장경판전에는 세계의 문화유산인 고려 팔만대장경이 모셔져 있다.
해인사는 신라 창건 이래 조선 말기까지 여러차례에 걸쳐 화재를 입고 중건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천만다행히도 고려의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던 대장경판전(국보 제52호)은
조선 초기 개수를 한 그대로 보존이 되어있어 국보 가운데의 국보인
고려팔만대장경판(국보 제32호)이 함께 온전하게 보존,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
▶ 합천 학사대(學士臺) 전나무, 경상남도 기념물 제 215호이다.
이 전나무는 높이 약30m, 둘레 5.1m 쯤 되는 수령이 1,000년 이상 된 고목이다.
나무의 줄기가 지상 10m 높이에서 두 개로 벌어져 있으며, 나뭇가지가 아래로 향해 뻗어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곳은 고운 최치원 선생이 만년에 벼슬을 버리고
가야산에 은거할 때 찾았던 곳이다.
학사대라는 이름은 고운 선생이 헌강왕때 29세의 나이로 한림학사 벼슬을 하였는데
그 벼슬 이름을 따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고운 최치원 선생은 말년에 제자들 앞에서 이 곳에 지팡이를 꽂으며
"내가 살아 있다면 이 지팡이도 또한 살아 있을 것이니 학문에 열중하라" 는 유언을 남기고
지금의 홍제암 뒤 진대밭골로 유유히 홀로 들어가신 전설로 유명하다.
그래서 이 전나무를 일러 고운 선생의 "지팡이 나무"라고 불리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