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孔子)와 베트남의 대 유학자를 모신 유교 사원인 문묘(Van Mieu-Quoc Tu Giam).
1070년 리탄통(Ly Thanh Tong)황제가 공자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원이다.
11세기 리 왕조(李朝)가 하노이에 독립왕조를 세우기 전에는 1000년동안 중국의 지배를
받았었는데 당시 유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대표적인 곳이 바로 이곳이다.
리 왕조 동안에는 불교에서 유교로 국교가 전환되면서 문묘는 당시 정신적인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며, 1076년에는 베트남 최초의 대학으로 유학자를 양성하기도 하였다.
태양을 상징하는 규문각(奎文閣).
이곳 문묘는 벽을 경계로 모두 5개의 마당으로 나뉘어 있으며
문묘문, 규문각, 연지, 대성전, 공자 사당, 종루 등이 배치되어 있다.
중앙 통로와 문은 황제 전용이다.
19세기 원조(沅朝)시대에 만들어진 규문각에는 1484년부터
300여년간 시행한 과거시험의 합격자 명단이 새겨진 총 82개의
진사제명비(進士題名碑)가 세워져 있다.
이는 각각 다른 얼굴을 한 거북이가 떠받치고 있는데, 머리가 높을수록 관직 또한 높다고 한다.
거북의 머리가 검게 닳아 있는 것은 이를 쓰다 듬으면 시험에
합격한다는 믿음 때문이며, 십장생인 거북이 등에
비석을 세운 것은 '오래도록 빛나라'라는 의미이다.
문묘의 마당은 중국 고전에 대해 3년마다 치르는 과거 시험장소로
이용되었고 우수한 인재는 지방 관리를 감찰하는
암행어사로 활동했다.
윗쪽에 걸린 만세사표(萬世師表) 편액은 '만세에 귀감이
되는 분'이라는 의미로 공자에 대한 존경을 표시한 것이라 한다.
이곳은 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찾아와서 자녀의 학업성취와
시험 합격을 기원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공자상(孔子像).
공자 사당의 중앙에는 공자가, 양 옆으로는 증자(曾子), 맹자(孟子),
안자(顔子), 자사(子思) 등 4성(四聖)의 상(像)이 각각 봉안되어 있다.
문묘라고는 하지만 향을 사르고 기원하는 모습에서
불교적인 느낌이 강하게 받게 된다.
생각보다 넓은 규모임에도 대체적으로
아담하면서도 깔끔한 분위기다.
대성전 뒤에 위치한 또 다른 건물인 국자감(國子監).
'꾸억뜨쨤(Quoc Tu Giam)'으로 발음되는 이 국자감은
베트남 최초의 대학이자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우리나라의 성균관과 비슷하다.
이곳은 강당, 도서관, 제기 등을 보관하는 장소로 구성되어 있다.
베트남의 대 유학자인 쭈반안(Chu Van An, 주문안, 周文安, 1292~1370)의 상.
국자감에는 대학 총장 등 최고의 학덕을 쌓은 분들의 상이 모셔져 있다.
문묘 한켠에는 수령이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고목이 버티고 서 있다.
아마도 이 나무는 동남아시아에서 자주 볼 수 있다는
반얀나무(榕樹, Banyan Tree)가 아닌가 한다.
반얀나무는 성장방식이 아주 독특하여 가지가 위로 뻗다가
길게 쳐지면서 지면에 닿으면 뿌리를 내리고 또 다른 줄기를
형성해 성장하는 방식으로 영역을 넓혀가는데, 결국에는
단 한 그루의 나무로 숲의 형태를 이루기도 한다.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의 중심에 있는 바딘(Ba Dinh)광장은
1945년 베트남의 독립을 선언하였던 곳이다.
지금은 이를 중심으로 국회의사당, 공산당사, 주석궁 등의
정부 행정기관과 외국공관, 그리고 호치민 영묘를 비롯하여
호치민 생가와 박물관 등이 위치해 있다.
바딘광장 한쪽에는 짙은 갈색의 대리석으로 된 사각형 모양의 건물이 세워져 있다.
이는 독립과 통일이라는 두 가지 과업을 이루어낸 위대한 지도자로 추앙받고 있는
호치민의 묘소인 영묘(靈廟)이다.
호치민은 베트남 전쟁 중인 1969년 심장병으로 사망하였다.
그는 유언에서 자신을 화장하여 재를 셋으로 나눈 후, 베트남 북 · 중 · 남부에
고루 뿌리고 어떠한 우상화 작업도 하지말라고 일렀으나 그의 추종자들이
국민적 영웅을 한 줌 재로 둘 수 없다 하여 방부처리, 이곳에 안치하고 있다.
호치민 묘소는 21.6m 높이로 3개층으로 나뉘어 있으며, 1973년에 건축을
시작하여 1975년에 완공되었다.
호치민 외에도 이렇게 방부처리한 인물로는 레닌,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이 있다.
호치민(胡志明, 1890~1969)은 베트남의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정치인으로,
북베트남의 총리와 대통령을 지냈다.
1945년, 사회주의 국가인 베트남 민주공화국(북베트남)을 세웠으며, 초대 대통령으로
베트남의 식민지 해방과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이끈 장본인이다.
그런 업적을 높이 사 기존 사이공이라는 도시명을 버리고 호치민으로 바꾸었다.
호치민이라는 이름은 '깨우치는 자'라는 뜻으로,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호 아저씨(伯胡)'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바딘광장 주도로를 중심으로 한쪽에는 호치민 영묘가,
그 반대쪽으로는 잔디밭으로 이루어진 넓다란 광장이 마주보고 있다.
호치민 영묘 맞은편으로 펼쳐진 잔디밭이다.
하나의 크기가 가로 세로 약 5m정도로 바둑판같이 모두
174개가 모여 있는데, 이는 같은 수의 무명용사를 상징한다.
잔디밭 건너편으로는 이들을 기리기 위하여
무명용사탑을 세워 두었다.
호치민 영묘 뒷편에는 호치민 생존 당시의 거소 및 사무실용 목조건물,
그리고 호치민 박물관 등의 유적지가 있다.
이는 호치민이 1954년 12월부터 1969년 9월까지
15년동안 거주하고 일하던 과정과 관련된 유적들이다.
위 건물은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지어진 주석부(主席府)로,
당시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총독부이자 총독의 관저로 알려져 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호치민이 1946년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대통령으로 취임해 3개월을 이곳에서 살았으나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며 전기 배관공이 거주하던 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현재 이곳은 외국의 국빈들을 모시는 영빈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호치민이 두 번째 살았던 관저.
프랑스군이 침략했을 때는 전기공의 집이었으나 1954년부터
1958년까지는 그가 이 집을 사용했다.
이곳에는 호치민이 호화스럽게 먹을 수 없다고 하여 마련한
1식 3찬의 식탁, 그리고 평소 쓰던 책과 시계 등이 놓여있다.
부처나무라 부르는 붓목(BUT MOC, 부처나무).
나무 주위, 죽순 모양으로 솟아 오른 것은 신기하게도 이 나무의 뿌리이다.
그 모양이 남근 모양이었다가 점점 자라면서 스님형상을 보인다고 해서
그렇게 이름 붙였다고 한다.
나무 아랫부분의 하얀색은 벌레들이 달려들지 못하도록
발라 놓은 고무나무의 수액이다.
호치민 생가를 끼고 있는 연못.
오른쪽 건물은 그가 1958년 5월부터 1969년 8월까지
살았던 나산(Nha San)이다.
그러나 이 집들은 대통령이 머물렀다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소박하기만 했다.
나무를 숙주삼아 하얀 뭔가가 붙어있다.
보아하니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닌 듯 하다.
마치 어떤 생명체의 발현을 준비하듯, 긴장감마저 느껴진다.
아마도 어느 순간이 되면 이 속에서 뭔가가 꿈틀거리며 튀어나와
홀로 이 세상 밖으로 내던져지게 되겠지.
정체는 알 수 없어도... 분명 이 보호막 아래에는
또 하나의 생명이 태동하여 미래에 대한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 있을 것이다.
아직은 시간이 필요한 듯, 쉽게 정체를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물론, 이 모두가 모양이 다른만큼 각기 다른 모습으로
이 세상과 만나게 될 것이다.
아니,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에는 이 세상 어딘가에서 아주 우아한
몸짓으로 삶의 즐거움을 목놓아 노래하고 있을런지도 모른다.
겨우내... 생명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그런 줄기...
그러나 지난 봄날, 이곳에도 삶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치 인간들 간의 관계처럼 복잡하게 얽히고 설키며
가지를 뻗어 그 영역을 넓혀 나갔다.
어쩌면 그것은 바로 삶의 질적인 확장을 의미하기도 하겠기에...
하나의 줄기를 기점으로
초록의 물감이 번져나가듯 맹렬한 기세로 뻗어 나갔다.
어찌보면 아주 절박해 보이기까지 했다.
정복자 마냥 당당한 기세로...
이제는 누가 뭐라해도 그들의 세상인 것 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누가 감히 이 거부할 수 없는 자연의 힘을 막을 수가 있겠는가.
비록 말라 비틀어진 듯한 모습이지만,
머지않아 저 불끈 튀어나온 핏줄 속으로 힘찬 생명의 에너지가
펌프질을 하듯 콸콸 넘쳐 흐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힘찬 맥박소리로 펄펄 살아 있음을 만천하에 고하며,
거침없이 이 땅을 박차고 올라 하늘로 하늘로 키를 키워 나가게 될 것이다.
대구 해맞이 공원에 유채꽃이 만발했다는 소식을 접했었다.
그러나 그곳에 찾아간 것은 보름여의 시간이 더 흐른 지난 5월 초순이었다.
당연하게도 절정의 화려함은 없었다.
때마침 누군가가 곁을 지나가면서 이런 아쉬운 마음을 읽기라도 한듯,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노란 유채꽃으로 장관을 이루었는데...' 라며
혼잣말처럼 내던졌다.
그러나 이미 그 꽃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이제는 푸른 초원이 펼쳐진 듯
또 다른 공간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사이로 곱게 나 있는 오솔길...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이곳에 대한 기대감을
완전히 꺾어버리지는 않았다.
한켠에는 뒤늦게 핀 유채꽃이 남아 있어
지나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끌리듯 꽃밭 속으로 파묻혀 들어갔고...
그대로 함께 또 다른 꽃이 되고 있었다.
푸른 하늘과 초록빛 능선은 시선을 정화시키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곳에서는 구태여 서두를 이유도 없었다.
그저.. 열린 풍경만큼이나 마음도 덩달아 넉넉해지는 느낌이었다.
아주 대단한 규모는 아니었지만,
막힌 도시의 숨통을 틔워주기에는 충분했다.
그러고 보니, 삶의 청량제는 결코 먼 곳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에 위치한 대구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
조선시대(1590년)때 축조된 대구읍성의 남문으로, 일제 강점기인
1906년 읍성이 철거될 때 성문들도 함께 철거되었다.
이후 1980년 망우공원으로 옮겨 중건하였으나, 성루의 위치나 규모,
그리고 품격 면 등에서 원형과 동떨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상판리에 위치한 정이품송(正二品松).
천연기념물 제103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1464년 세조가 법주사로 행차하던 중 임금이 타는
가마가 소나무 가지가 쳐져 있어 걸리게 되었으나, 이 나무 밑가지가
저절로 들려 올려져서 지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후에 세조가 정이품의 벼슬을 내렸다 해서 그렇게 불린다.
추위때문에 큰 눈송이로 성장하지 못하고 내리는 가루눈이다.
함박눈보다는 풍족해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눈은 눈이다.
다만 한가지 불만이라면 잘 뭉쳐지지가 않는다는 것인데,
눈사람을 만들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함박눈은 포근한 날이라야만 볼 수 있다고 하니 어쩌겠는가.
소리없이 내려앉는 눈송이마다 두런두런... 따뜻하고 정감있는
이야기들이 하나씩 녹아 있을 것만 같다.
그래서일까 눈이 내리는 날이면 웬지 마음이 더 포근해지는 느낌이다.
소나무의 강인함과 눈송이의 연약한 느낌이 극단적으로 대비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유난히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눈이 내리고 쌓이면서
말라버린 가지 위에서 하얀 꽃으로 피어났다.
그것도 아주 탐스러운 꽃송이를 피워 올렸다.
일순간, 새로운 생명으로 되살아 난 듯 하다.
비록 지금은 차가운 몸이지만, 이내 녹아 땅 속으로 스며들면서
이를 자양분 삼아 또 다른 생명들을 피워 올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어느새 따뜻한 봄의 모습으로
우리들 가까이에 다가서 있을 것이다.
얼었던 호수물이 풀린걸 보니 이제 그럴 날도 머지 않았다.
아니, 보이는 것과는 달리 적어도 마음만큼은 이미 완연한 봄의 느낌이다.
그런걸 보면, 역시 봄은 머리보다 가슴으로부터
먼저 찾아오는 것이 맞는 것 같다.
경북 포항시 북구 청하면에 위치한 천령산(天嶺山)의 우척봉(牛脊峯, 775m),
그곳에 올랐다. 초입부터 하늘을 뒤덮은 숲길이 정상까지 그대로 이어지면서
그 시원한 공기를 맘껏 들이키다보니 어느새 몸 속은 청정함으로 가득 들어찬 느낌이다.
그러나 정상에 도착해 보니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주위가 탁 트여진 그런 곳이 아니다.
그저 등반로의 쉼터 같은 곳에 표지석이 서 있어 그곳이 정상임을 알게 해줄 뿐이다.
잠시 앉아 쉬면서 조금은 답답해지는 마음에 왼쪽길로 조금 내려가 보니
그제서야 쫙 펼쳐진 산의 능선이 드러난다.
저쪽 중앙부 산꼭대기에 어렴풋이 돌출되어 보이는 곳은 경상북도 수목원의 전망대로
이 길을 계속해서 가면 그곳에 도달하게 된다.
좀 더 왼쪽으로 눈을 돌리니 저 멀리 청하면과 흥해읍은 물론,
포항의 북부지역 까지도 한 눈에 들어온다.
내려올 때는 청하골이라고도 불리우는 보경사 계곡 쪽을 택했다.
보경사가 있는 내연산(710m)은 포항이기는 하지만 포항에서
가장 북쪽이라 청송군의 주왕산과 접해 있다.
주 능선은 밋밋하지만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져 계곡미가 빼어난데다
무려 12개의 폭포가 이어져 절경을 뽐낸다.
보이지는 않지만 깎아지른 듯한 절벽 저 아래로는 12폭포 중 가장 높은
연산폭포(20m)가 세찬 물줄기를 땅바닥으로 떨어뜨리고 있는 중이다.
위에서 내려다 보니 다리가 후들거린다.
연산폭포 바로 아래에 위치한 관음폭포.
왼쪽의 그늘진 절벽은 '비하대', 그리고 그 오른쪽으로 햇볕을 받고 있는 곳은 '학소대'이며,
저 구름다리는 연산폭포와 연결된다.
그늘에 가려져 잘 보이지는 않지만 폭포 주변으로는
관음굴이라 불리우는 작은 굴들이 여러개 뚫려 있는데,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어우러져 가히 절경이라
불리울만한 멋진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도 그럴것이 이미 이 계곡은 그 옛날, 진경산수라는
그림 양식이 완성된 곳으로서 진경산수의 고향으로
불려지고 있는데 그 창시자가 바로 겸재 정선이다.
왼쪽 그림은 겸재가 청하현감을 지낼 때에 그린
'내연삼용추도(內延三龍湫圖)라는 작품으로,
맨 윗부분의 폭포는 연산폭포이며 그 아래
두 가닥으로 갈라진 물줄기는 관음폭포, 그리고
맨아래 폭포는 잠룡폭포를 나타낸다.
다만 연산폭포가 비하대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데도 시원하게 드러나 보이는 것 말고는
실제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림이 아닌, 사진인데도 그 웅장한 풍경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것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아니, 사진으로 담기에는 그 분위기는 너무나 압도적일 뿐더러
오히려 그림이 더 실감나게 다가오는 것 같다.
초록의 산을 뚫고 불쑥 솟아오른 바윗덩어리...
'선일대'이다.
보경사(寶鏡寺)의 전경. 경북 포항시 송라면 내연산에 위치한다.
602년 진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신라 지명법사가 진평왕에게 '동해의 명산에서
명당을 찾아 자신이 진나라의 도인에게 받은 팔면보경을 묻고 그 위에 불당을 세우면
왜구의 침입을 막고 이웃나라의 침입도 받지 않으며 삼국을 통일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진평왕은 지명법사와 함께 동해안 북쪽 해안을 거슬러 올라 가다가
해아현 내연산 아래에 있는 큰 못 속에 팔면보경을 묻고 못을 메워 금당을 건립하면서
보경사라 불렀다고 전한다.
경내에는 중요문화재로 보물 제252호인 보경사 원진국사비와 보물 제430호인
보경사 부도가 있으며, 조선 숙종의 친필 각판(刻板) 및 5층 석탑 등이 있다.
고려 중기의 승려 원진국사의 탑비인 원진국사비.
13세에 승려가 된 원진국사(1171~1221)는 명산을 두루 다니며
수도를 하기도 하였는데, 왕의 부름으로 보경사의 주지가 되었다.
이후, 51세로 입적하자 고종은 그를 국사로 예우하고 '원진'이라는 시호를 내리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운 간결한 모습으로, 비의 몸체 윗부분의 양 끝을
접듯이 잘라 놓았는데 이러한 모습은 당시에 유행하던 양식이다.
이 비가 완성된 것은 고종 11년(1224)으로 원진이 입적한 지 3년 후의 일이며,
비문에는 원진국사의 생애와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한라산 중산간지대에 위치한 이시돌목장.
목장보다는 천주교 성지로 더 잘 알려져 있다는 그곳을 스치듯 지나간다.
초원 위로는 병풍같이 둘러쳐진 나무들이
뒤쪽의 한라산을 호위하듯 가리고 있는 모습이다.
시원한 초록의 융단이 펼쳐졌다.
그 위를 가로지르는 몇 가닥의 전깃줄은 큰 전신주를 꿰 찬채
어디론가를 향해 끊임없이 달아나기만 하고...
시원하게 쭉 뻗은 길보다는
구불구불 휘어져 감도는 길이 더 정감이 간다.
직설적이지 않은 은근함에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허리를 쭈욱 펴고 길을 따라 도열하듯 늘어선 나무들...
그 사이를 지나자니 괜히 마음이 우쭐해진다.
이곳에 나무가 없다면 그저 시원하게만 보여질까.
새삼 나무가 고맙게 생각된다.
길을 가다가 만난 특이한 형태의 집,
이른바 테쉬폰(Cteshphon)이라고 부르는 집이다.
그 옆에는 다음과 같은 안내문이 있다.
이라크 바그다드 가까운 곳에 테쉬폰이라 불리우는 곳이 있는데
이곳에서 이 건축물의 기원을 찾을 수 있기에 이러한 양식의 건물을 테쉬폰이라고 한다.
그곳에는 지금도 약 2천년전 부터 전해 내려오는 유사한 형태의 건물들을 볼 수 있다.
곡선형으로 연결된 쇠사슬 형태의 구조 때문에 그 오랜 세월, 거센 태풍과
지진으로 부터 온전한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곳 이시돌에는 1961년도에 처음 목장에서 숙소로 사용하기 위해 건축되었고,
이후 조금 작은 크기로 제작해 돈사로도 사용을 했으며, 1963년에는 사료공장,
1965년에는 협재성당을 건축하는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었다.
협재성당은 아직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테쉬폰 주택은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이곳 이시돌에만 있다.
길을 가다가, 저쪽 멀치감치에서 풀을 뜯고 있던 말 한 마리가
적적하고 외로워 보이길레 멈추어 섰다.
그러자 그 녀석도 나를 발견하고는 반가운듯 성큼성큼 다가온다.
그런데 갑자기 멈추어 서더니 그저 멀뚱히 쳐다보기만 할 뿐, 더 이상 접근을 않는다.
한참을 쭈뼛거리며 그렇게 서 있더니 결국 제 자리로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고 만다.
보아하니 내 얼굴을 보고서는 자못 실망했다는 표정이다.
정말 괘씸한 녀석이다.
제주시에서 20여분 거리에 위치한 제주절물자연휴양림.
청정자연의 맑고 깨끗한 공기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이곳은,
휴양 숙박시설, 맨발지압 효과의 건강산책로, 교육시설인 강의동,
산림자료를 갖춘 전시관, 흥미와 체력을 겸한 도전 프로그램장,
오름 등산로, 쉼터, 약수터 등 여러가지 시설들을 갖추고 있다.
'절물'이란 지명은 옛날 절 옆에 물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 절은 없으나 약수암이 남아 있다.
특히 이곳 약수터에서 솟아나는 용천수는 신경통과 위장병에 큰 효과가
있다고 전해지며, 음용수로 제주시 먹는 물 제1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입구를 들어서자 마자 하늘을 찌를 듯 쭉쭉 뻗은
40여 년생의 삼나무 숲이 펼쳐진다.
은은한 숲향기 '피톤치드'가 전신을 감싸는 듯, 기분이 상쾌해지고
몸도 마음도 덩달아 맑아지는 느낌이다.
산책로를 따라 빽빽히 늘어선 나무들은 저마다 시원한 자태를 뽐내고...
또 다른 한켠에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익살스러운 표정의
장승들이 모여서서 환한 웃음을 터뜨리고 있다.
그래서 여행자는 혹시 몸에 무엇이라도 묻어서 그러나 하고 괜히 살펴보게 된다.
그것이 아니면 그저 따라서 크게 한번 웃어주면 될 것이고...
휴양림 내에 위치한 약수암에서...
단촐한 분위기의 사찰이다.
가볍게 산책을 하다가 변산바람꽃을 만났다.
2월에서 3월 사이에 꽃망울을 터뜨리기 때문에 보기 어렵다는 꽃이다.
쌍떡잎식물 이판화군 미나리아재비목 미나리아재비과의 여러해살이풀이다.
산지의 햇볕이 잘 드는 습윤한 지역에서 잘 자라며, 꽃받침이 꽃잎처럼 보이는데,
보통 우산처럼 생긴 꽃받침 5장이 꽃잎과 수술을 떠받들듯 받치고 있다.
처음에는 꽃받침 끝이 위로 향하다가 차츰 밑으로 처지면서
느슨하게 허리를 뒤로 젖히는 듯한 모습으로 바뀐다.
꽃받침은 6~7장이며 수술 수가 많고 열매는 4월에 익는다.
한국 특산종으로 학술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93년 부터인데,
학명도 발견지인 변산이 그대로 채택되었다.
변산반도, 마이산, 지리산, 한라산, 설악산 등지에 자생하며
관상용으로 심기도 하는데, 개체 수가 많지 않아 보존이 필요한 식물종이다.
미나리아재비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인 복수초도 이곳에서 만났다.
2~3월에 꽃이 피며, 5월에 다른 식물들이 막 신록을 뽐낼 때 이 복수초는 휴면에 들어간다.
꽃은 줄기 끝에 한 개씩 달리며 지름 3~4cm 정도이고 노란색이며 꽃잎은 20~30장 정도로 많다.
꽃이 황금색 잔처럼 생겼다고 하여 측금잔화(側金盞花)라고도 부르고,
설날에 핀다고 원일초(元日草), 눈 속에 피는 연꽃 같다고 설연화(雪蓮花),
쌓인 눈을 뚫고 나와 꽃이 피면 그 주위가 동그랗게 녹아 구멍이 난다고 하여
눈색이꽃, 얼음새꽃이라고도 부르는데, 강원도 횡성에서는 눈꽃송이라고도 부른다.
3월... 당시에는 황량해 보이기만 했던 이곳, 앞으로 초록이 무성해지면
말 그대로 순수한 자연을 마음껏 만끽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제주 유리의 성은 국내 최대규모의 유리 조형예술 체험테마파크로,
우리나라는 물론 이탈리아, 체코, 일본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유리명장들이 만들어낸 유리 조형예술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이곳은 맑고 투명한 유리로 된 대형 건축물과 아기자기한
유리공예품이 전시된 야외테마공원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의 상징인 구슬이(왼쪽)와 유리(오른쪽)가
인공폭포에서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유리판에 새겨진 앙상한 나무가 주위의 실제 나무와 어울려
묘한 분위기를 연출해 내고 있다.
너무나 친근한 소재이기 때문일까,
유달리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고 있는 콩나물이다.
유리로 만들어진 3천여개의 콩나물이 시루에 빼곡히 들어차 있는 모습으로,
워낙 원래의 모양 자체도 단순하기는 하지만,
실물크기여서 인지 진짜와 구별이 안갈 정도이다.
램프워킹 기법으로 만들어진 150명으로 구성된 유리 밀랍인형 오케스트라.
램프워킹이란, 유리재료 중 '파이렉스'라는 소재의
속이 빈 유리튜브를 이용하여 하는 작업을 말한다.
평화로운 유럽의 어느 마을도 스테인드글라스로 제작되어
이곳에 들어 앉았다.
속이 투명한 멋있는 자태의 말 한 마리...
금방이라도 이곳 전시장을 박차고 뛰쳐 나가버릴 것만 같다.
제주의 상징인 돌하르방을 유리하르방으로 변신시켜 놓았다.
유리관 입구 로비에 세워진 제주 유리의 성 수호신으로,
지역 수호신의 상징으로 모든 액을 막는다 하여 세웠다.
국내 최초로 내열강화유리인 파이렉스 유리로 특수 제작되었다.
이곳 유리의 성은 각기 다른 6개의 테마조형파크로 구성되어
다양한 350여점의 유리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애초부터 그곳에 길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언젠가 누군가의 호기심에 의해 내딛어졌을 첫 번째의 발걸음을 시작으로,
점차 서로 이해관계로 연결되면서 지금은 공존의 흔적으로 남아있다.
사람이 사는 곳, 그 어딘들 길이 없으랴.
자동차가 늘어나고, 그곳에서 보내는 시간이 점차 많아지고 나서부터
길은 삶의 일부이자 전쟁터와 다름없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제는 자전거 길 외에도, 올레라는 이름을 가진 휴식을 위한 길까지
만들어지고 있으니, 이는 길에 대한 커다란 진화라 하겠다.
오랜 옛날부터 두려움의 상징이기도 했던 물길도 이제는 아니다.
거칠고 험한 바다는 도전의 상징이 된지는 이미 오래...
이제는 인간의 발길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이란 없다.
훌쩍 날아 오르고 싶은, 그것은 호기심이자 또 하나의 모험...
하늘도 당연히 예외는 아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의외로 분주한 하늘길이다.
1783년 10월, 프랑스 P.로지에는 J.M.몽골피에가 만든
공기보다 가벼운 기체를 이용한 기구를 타고 인간으로서는 최초 비행에 성공.
1891년 독일의 O.릴리엔탈은 날개의 양력을 이용하여 비행하는
글라이더를 최초로 제작, 비행에 성공.
그 후 1903년 미국의 라이트 형제가 만든 플라이어호로 미국 키티호크에서
12초동안 36m를 비행하여 세계최초로 실질적인 비행에 성공...
그날 이후 지금 그리고 또 앞으로 다가올 미래...
날아 오르는 꿈이 현실이 된지는 이미 오래지만, 앞으로도 그 꿈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다만 과거와 다른 확실한 한 가지는 그 무대가 보다 더 넓어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길은 다리로 이어지기도 한다.
더운 여름날, 굳이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아니더라도
다리는 바람길로서 훌륭한 휴식처가 되어주기도 한다.
육중하면서도 소박하기도 한 다리는 그냥 단순한 구조물은 아니다.
그렇다고 이 곳과 저 곳을 연결해 주는 교통의 통로인 것 만도 아니다.
다리는 인간의 마음을 이어주고 정을 이어주는, 그런 든든한 끈에 다름 아니다.
비록 지금은 한 갈래의 숲길에 불과하지만,
누군가에 의해 또 다른 길로 변하고 확장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것이 바로 이 길이기도 하다.
마치 인생의 외길처럼 앞만 보고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그런 고집스러움도 있겠지만 말이다.
동행, 더불어 함께 한다는 것은
스스로 짊어진 짐을 서로 나누어 갖는 것이다.
하나의 길을 간다는 것. 그것도 혼자가 아니면 더 즐거워질...
생은 단거리, 혹은 장거리 경기라고 했던가.
하루의 삶을 치열하게 살다가 저녁이 되면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바로 그런 경기 말이다. 결국 그것의 반복이 바로 삶이라는...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속리산에 위치한 미륵신앙(彌勒信仰)의 요람으로 불리우는 법주사.
먼저 일주문과 수정교를 지나고 나면, 가람에 들어서는 첫 입구라 할 금강문(金剛門)을 만나게 된다.
좌우로는 돌담으로 회랑을 형성하고 있으며, 인왕상을 봉안하기 때문에
인왕문(仁王門)이라고도 부른다.
법주사는 553년 (신라 진흥왕 14)때 의신(義信)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성덕왕 때 중수를 하였는데, 현재 남아 있는 석물(石物)은 모두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중수를 하였으며, 현존하는 목조건물은 모두 조선 후기의 것이다.
이곳 금강문 안에는 1974년에 조성한 금강역사 2위와, 사자를 탄 문수보살,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을 함께 봉안하였다.
대체로 문 양쪽에는 금강저(金剛杵)나 칼과 창을 손에 들고 있는 금강역사가 모셔진다.
그래서 왼쪽에는 밀적금강(蜜跡金剛), 오른쪽에는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을 모시는데,
혹 입을 벌리고 있는 상을 아금강역사, 입을 다물고 있는 상을 우금강역사라 부르기도 한다.
금강문을 지나자 하늘을 향해 뻗은 두 그루의 나무가 시원스럽게 맞아준다.
바로 뒤의 건물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되었으며 사천왕상을 봉안한 사천왕문으로, 국내의 천왕문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고 한다.
지붕 위쪽으로는 바로 뒤에 위치한 팔상전의 꼭대기 층이 넘겨다 보인다.
팔상전. 국보 제55호로 지정되었으며 5층으로 이루어졌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목조탑이며 탑 중에서도 가장 높은 건축물이기도 하다.
지금의 건물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짓고 1968년에 해체, 수리한 것인데,
안쪽 벽면에는 부처의 일생을 8장면으로 구분하여 그린
팔상도(八相圖)가 그려져 있어 팔상전이라 이름 붙였다.
팔상도란,
1. 석가모니가 도솔천에서 내려오는 장면
2. 룸비니 동산에서 마야부인에게서 태어나는 장면
3. 궁궐의 네 문밖으로 나가 세상을 관찰하는 장면
4. 성을 넘어 출가하는 장면
5. 설산에서 고행하는 장면
6. 보리수 아래에서 마귀를 항복시키는 장면
7. 성불 후 녹야원에서 설법하는 장면
8.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하는 장면 등이다.
높이 33m로, 동양 최대 규모의 미륵불 입상인 금동미륵대불(청동미륵대불).
신라 혜공왕 때인 776년, 진표율사가 금동미륵대불을 처음 지었다고 하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 몰수되어 1964년에 시멘트로 다시 불사를 했다.
1990년에는 붕괴직전의 시멘트 대불이 청동대불로 다시 태어났으며,
2000년 들어서는 원래의 제 모습을 찾아 주고자 금동미륵불로 복원공사를 했다.
당시, 3mm 두께로 황금을 입히는데 모두 80kg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대웅보전에서 팔상전에 이르는 앞마당에는 신라시대의 걸작이라 할 쌍사자석등(雙獅子石燈)이 서 있다.
국보 제5호로, 높이 3.3m에 이르는 팔각석등이다.
신라시대의 석등은 대게 하대석과 중대석, 상대석으로 구성되는데,
이 중대석을 두 마리의 사자가 앞발을 높이 치켜들어 상대석을 떠받치는
독특한 양식으로 되어있다.
보물 제915호로 지정된 대웅보전.
창건무렵인 신라 때에는 미륵장륙상을 모신 용화보전이 미륵신앙 도량인
법주사의 중심역할을 했을 것이기 때문에, 대웅보전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지금의 건물은 고려 중기에 처음 세운 것으로 보이며, 1624년(인조 2)에 중건하였고
이후 잦은 중수를 거듭하였지만, 조선 중기의 양식을 잘 갖추고 있어 보물로 지정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벽암대사가 중창한 이후 400년 만인 2005년,
4년간의 공사끝에 옛모습 그대로 복원한 것이다.
대웅보전 앞에 보이는 석탑은 보물 제15호로 지정된 사천왕석등(四天王石燈)으로,
상대석에 사천왕이 새겨져 있어 그렇게 부른다.
두툼한 판석과 커다란 그릇을 머리에 이고 있는 모습의 희견보살상(喜見菩薩像).
우리나라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보살상으로
전체 높이가 2m에 이르며, 보물 제1417호로 지정되었다.
전체적으로 선이 굵고 대담한 기법이 돋보이는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다.
희견보살은 법화경을 공양하기 위해 스스로 몸과 팔을 불태워
소신(燒身)공양을 올렸다는 보살이다.
그러나 이 보살상의 주인공을 석가여래의 으뜸가는 제자였던
가섭존자(迦葉尊者)에 가깝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가섭존자는 석가가 입멸한 후,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열반에 들지말고
세상에 남아, 가사와 발우를 전하라는 석가여래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경설을 바탕으로
이를 형상화 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능인전 옆의 추래암(墜來岩) 암벽에 새겨진, 전체 높이 5m의 마애여래의상(磨崖如來倚像).
고려시대의 마애불상으로서 보물 제216호로 지정되었다.
의상(倚像)이란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마애불로서 이러한 예는 경주 남산의 삼화령 미륵불이 유일한 작품인데,
그 양식상의 특징과 연관지어 미륵불로 추정하고 있다.
오른편으로 높이 솟은 것은 당간지주로, 고려 초인 1006년(목종 7)에 조성되었는데
당시에는 높이가 16m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뒤 조선 후기인 1866년(고종 3)에는 대원군의 명령으로 국가에서
당백전(當百錢)을 주조하면서 사찰의 많은 금속물들이 징발 당했는데,
그 과정에서 당시 용화전의 미륵장륙상과 이 철당간이 사라졌다.
이후, 1910년경에는 22m 높이의 철당간을 확대, 복원하였고, 1972년에 보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감나무에 매달린 감은 또 하나의 단풍이다.
붉게 타들어 가는 것이 산 속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그리고 화려한 꽃이기도 하다.
가지 가득 함박웃음을 흘리고 있는...
이러한 감이 있었기에 지난 가을은 여전히 풍요로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렇듯 고운 색깔의 단풍잎 하나 제대로 대하지 못하고,
그냥 보내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 때문일까.
지난 가을에 대한 기억은 감이 전부라 할 만큼 크게 다가오는 것 같다.
무거운 가지를 잔뜩 늘어뜨려 인간의 손길을 유혹하는...
발길이 서성거려진다.
그대로 지나치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 같다.
굳이 풍성함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 자체가 이미...
풍경에 감나무가 더해지면 정겨움도 더해진다.
감나무는 가까이 머물러 우리와 함께 해 온 친근한 존재이기도 하다.
집을 지키는 수호신 마냥,
집 한 켠으로 불쑥 고개를 내민 감나무 한 그루씩은 어디서나 쉽게 찾아 볼 수 있었던,
우리네 주위의 따뜻한 풍경 중 하나이기도 했다.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듯한...
우뚝 서 있는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멋스럽다.
화려하게 쏘아 올린 가을을 위한 축포,
아니면, 가지마다 가득 내걸린 환한 등불.
비록 눈부신 대낮일지라도...
조용하면서도 요란하게, 절정으로 치닫는다.
비록 차갑게 식어가는 대지이지만,
붉게 익은 감이 머물러 있는 한, 온기는 언제까지나 계속되어질 것이다.
가을 과일 중에서 가장 비타민이 많고, 익을수록 맛과 영양이 달라진다는 감.
종류는 단감(9월말~ 10월중순 출하), 홍시(10월중순~11월초순 출하),
곶감(12월~2월 출하)으로 나뉘어지는데,
단감의 경우 비타민A가 홍시에 비해서 약 3배 정도 많고,
홍시의 경우에는 비타민C가 단감에 비해서 약 5배 수준으로 많이 들어 있다고 한다.
그 중에서 가장 영양이 높은 것은 곶감으로,
홍시나 단감보다 영양성분이 3~4배나 높다고 한다. (출처/SBS NeTV)
사실, 이곳 해인사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다.
이미 모두가 익히 알고있는 곳이다 보니...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256호인 대적광전
대적광전은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모시는 화엄종 사찰의 중심 법당이다.
부처가 설법한 진리가 태양처럼 우주에 가득 비추는 것을 형상화한 비로자나불은
불교의 진리자체를 상징하는 불상이다.
비로자나불을 모신 전각은 대적광전 이외에도 화엄전과 비로전이 있다.
대적광전은 802년(애장왕 3)에 순응,이정 두 스님이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의 명칭은 비로전이었으나, 1488년(성종 19)에 왕실의 지원에 의해
학조대사가 중창하면서 대적광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현재의 건물은 1817년(순조17)에 불타버려 이듬해 중건한 것을 1971년에
지관스님이 다시 중수한 것이다.
큰 절의 중심 불전에 걸맞게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을 한 우람한 모습이다.
정선이 그린 해인사 그림에는 대적광전이 2층으로 그려졌는데,
1817년의 화재 이전에는 지금보다 더 큰 건물이었을 것이다.
지금의 모습은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다포계 팔작집으로서
중수과정에서 많이 변형되었음을 알 수 있다.
법당 안에는 용기사에서 옮겨온 중앙의 큰 비로자나불을 비롯해
법단의 좌에서 우측으로 법기보살, 보현보살, 지장보살, 비로자나불(대),
비로자나불(소), 문수보살, 관세음보살 순으로 일곱분의 불보살님이 봉안되어 있는데
비로자나불과 지장보살이 함께 모셔진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이는 주변지역의 불타버린 법당에 있던 지장보살을 옮겨 놓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4호인 해인사 3층석탑
해인사의 대적광전 아래 서 있는 석탑으로, 넓은 뜰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어
일명 ‘정중탑(庭中塔)’이라고도 불린다.
이 탑은 2중 기단과 3층의 탑신 및 지붕돌로 이루어진 통일신라 후기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이다.
원래 이 탑의 받침은 신라 석탑 양식인 2중이었으나, 1926년에 탑을 수리하면서
받침을 확장하고 한 층을 더 올려, 본래 지니고 있던 조화미를 상당 부분 상실하고 말았다.
4면의 각 모서리에 기중을 새긴 것 외에는 별다른 조각이 없다.
지붕돌받침은 신라 석탑의 전형인 5층으로 되어 있고,
지붕돌 추녀 끝은 살짝 들어올려져 완만하게 처리되었다.
지붕돌의 각 모서리에는 작은 종이 달려있는데, 본래의 것은 없어지고
나중에 다시 매단 것이다.
탑의 꼭대기 역시 일부가 소실되어 꼭대기를 떠받치는 받침대와
위로 핀 연꽃, 바퀴만 남아있다.
1926년 6월에 이 탑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상층 받침의 돌 함 속에서 9개의
작은 불상이 발견되었는데, 석탑을 수리하고 나서 이들 불상을 다시 탑 안에 봉안하였다.
또 이 석탑 앞에는 코끼리의 눈모양을 형상화했다는 안상과 연꽃무늬가 조각된
배례석이 있었으나 수리하는 과정에서 석등 앞으로 옮겨졌다.
[조선불교통사] 에는 태조가 즉위하여 이 탑을 수리할 때, 대장경을 탑 안에 봉안하면서
나라의 번영과 백성의 평안을 빌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그러나 1926년에 탑을 수리할때 대장경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태조가 수리한 탑이
이 탑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더욱이 근래의 사찰 보수 때 경학원 근처에서 신라 석탑의 재료가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또 다른 석탑이 있었을 가능성도 크다고 하겠다.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5호인 해인사 석등
석등은 부처님이 계신 사찰에 어둠을 밝히기 위해 만든 것이다.
부처님에 대한 등 공양과 관계된 것이므로 부처님을 상징하는 탑과 함께 법당 앞에 설치된다.
이 석등 역시 원래 석탑 앞에 있었지만 현재 위치로 옮겨놓았다.
옮겨진 이유와 시기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없다.
석등은 받침돌과 기둥돌, 등불을 놓는 화사석, 지붕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둥돌이 원래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전체의 크기는 알 수 없다.
맨아래 네모난 받침대에는 코끼리 눈 모양의 무늬를 새겨 넣었으며,
8각형의 아래 위 받침대에는 8장의 연꽃잎을 각각 따고 하늘을 향하도록 새겨넣었다.
화사석에는 4개의 창을 두었는데, 창 사이의 모서리 4면에 각각 사천왕상을
돋을새김한 것이 이채롭다.
지붕돌은 역시 8각으로 처리하여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었으며 맨 위에는 둥근 구슬을 올렸다.
새겨진 눈 모양과 연꽃무늬의 우아한 조각수법, 그리고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볼 수 있다.
한편 1398년 조선 태조 7년에 강화 선원사에 있던 팔만대장경을 지천사로 옮겼다가
이듬해 이곳으로 옮겨왔다.
팔만대장경판전은 1995년 12월에 세계문화 유산으로 공식지정되었다.
경내에는 일주문, 대적광전,구광루 등 문화재 및 암자들이 즐비하여
찾는 이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다.
붉게 물든 덩굴은 담장을 휘감고,
하늘은 마냥 높기만 하다.
대적광전의 화려한 단청.
섬세한 인간의 손길이 이루어 놓은,
획 하나마다에 가득 담긴 불심...
고려팔만대장경판이 보존되어 있는
대장경판전의 입구.
장경판전은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경이나 그것을 인쇄하기 위한 목판을 보존하고 있는 전각으로
사찰에 따라 대장전 혹은 판전, 법보전 등으로 불리운다.
합천 해인사의 장경판전에는 세계의 문화유산인 고려 팔만대장경이 모셔져 있다.
해인사는 신라 창건 이래 조선 말기까지 여러차례에 걸쳐 화재를 입고 중건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천만다행히도 고려의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던 대장경판전(국보 제52호)은
조선 초기 개수를 한 그대로 보존이 되어있어 국보 가운데의 국보인
고려팔만대장경판(국보 제32호)이 함께 온전하게 보존,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
▶ 합천 학사대(學士臺) 전나무, 경상남도 기념물 제 215호이다.
이 전나무는 높이 약30m, 둘레 5.1m 쯤 되는 수령이 1,000년 이상 된 고목이다.
나무의 줄기가 지상 10m 높이에서 두 개로 벌어져 있으며, 나뭇가지가 아래로 향해 뻗어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곳은 고운 최치원 선생이 만년에 벼슬을 버리고
가야산에 은거할 때 찾았던 곳이다.
학사대라는 이름은 고운 선생이 헌강왕때 29세의 나이로 한림학사 벼슬을 하였는데
그 벼슬 이름을 따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고운 최치원 선생은 말년에 제자들 앞에서 이 곳에 지팡이를 꽂으며
"내가 살아 있다면 이 지팡이도 또한 살아 있을 것이니 학문에 열중하라" 는 유언을 남기고
지금의 홍제암 뒤 진대밭골로 유유히 홀로 들어가신 전설로 유명하다.
그래서 이 전나무를 일러 고운 선생의 "지팡이 나무"라고 불리운다.
이 길은
무엇을 타고 가든,
아니면 그냥 걸어서 지나가든
그 어떤 방법으로 오가더라도
그냥 좋다.
이유는 없다.
사실, 혹자에게는 이 길이
별것 아닌 것일 수 도 있지만...
이곳에 서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서는
색다른 경험에서 오는 들뜬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뒤늦게 찾은 어제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또 다시 찾아 온 이 길이다.
이 길은
담양군에서 1970년대 초반
전국적인 가로수조성 사업 당시
내무부의 시범가로로 지정되면서
3~4년짜리 묘목을 심은 것이
지금처럼 하늘을 덮고 있는
울창한 가로수로 자라나게 되었다.
메타세쿼이아(Metasequoia)는
원래 중국이 그 산지이나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개량이 되었다고 한다.
이곳을 그냥 지나치는 자동차는
거의 없다.
누구나 꼭 한번쯤은 멈추어 서서
가로수와 짧고도 긴 눈맞춤을 나누고 나서야
지나가곤 한다.
공부를 마친 후 뒤늦은 귀가?
엄마의 심부름?
아니면 또 다른 친구들과 즐겁게 뛰어놀기?
목적은 어찌됐던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늘상 보아오는 길일지라도
이 길을 걷는 순간만큼은
이들도 여행자들의 마음과
별반 다르지 않을것 같다.
어떤가?
손을 꽉 다잡고 걸어가는 이들의 뒷모습에서
금방이라도 들려올 것 같은
정겨운 대화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히고 있지는 않는가?
얼굴 가득 미소를 담고 있을 것만 같은
그들의 표정을 상상해 볼 수는 있지 않겠는가?
워낙 유명세가 있는 곳이다 보니
이곳을 여러가지 목적으로 활용하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는 것 같다.
올림픽 후 방영예정이라는 SBS드라마
'타짜'의 촬영모습이다.
시간에 쫓겨 둑길을 모두 다 돌아보진 못했지만,
이곳은 천연기념물 제366호로 지정된
담양의 관방제림이다.
보호수는 177주로
나무의 수령은 최고 300년이 된다고 한다.
관방제림(官防堤林)은
조선 인조26년(1648) 당시의 부사 성이성(府使 成以性)이
수해를 막기 위해 제방을 축조하고
나무를 심기 시작하였으며,
그 후 철종 5년(1854)에는 부사 황종림(府使 黃鍾林)이
다시 이 제방을 축조하면서
그 위에 숲을 조성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2004년에는 산림청이 생명의숲가꾸기국민운동,
(주)유한킴벌리등과 공동 주최한
'제5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하기도 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