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정산(金井山)은 부산과 양산에 걸쳐 있는 백두대간의 끝자락에
해당하는 산이다.
주봉은 고당봉으로 북으로는 장군봉, 남쪽으로는 상계봉을 거쳐
백양산까지 산세가 이어져 있다.
산세는 그리 크지는 않으나 곳곳에 울창한 숲과 골마다 맑은 물이 항상 샘솟고
화강암의 기암절벽이 있어 부산이 자랑하는 명산이 되었다.
범어사와 금강암을 지나 아기자기한 산길을 얼마간 오르니
우리나라 최대의 산성인 금정산성의 북문(사적 제215호)이 나타난다.
북문은 범어사에서 서편으로 1.6km, 고당봉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린 주능선이
원효봉을 향해 다시 치켜 오르는 잘록한 안부에 자리하고 있다.
금정산성의 4문 가운데 북문이 가장 투박하고 거칠다.
이 성문에는 아치형의 장식도 없고 규모도 다른 성문보다 작다.
성문의 폭은 정면 250cm이고 측면은 350cm이다.
'금정산성부설비'의 기록에는 '초봄(1808)에 오한원 부산의 지휘로 기둥과
들보를 100리 밖에서 옮겨오고, 벼랑 끝에서 험준한 바위를 깎아내어 메고
끌어당기는 사람이 구름처럼 많이 모여 들어서 만(萬)사람이 일제히 힘을 쓰니
149일 만에 북문의 초루(譙樓)가 완성되었다'고 한다.
성문 광장 세심정 일대는 원효대사께서 화엄경을 설파한 곳이라 '화엄벌'이라
하였으며, 이곳은 금정산성 방어를 위한 범어사, 국청사, 해월사 등의 스님을
훈련시켜 승병 양성을 한 승병 훈련장이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범어사 3월 만세운동(1919) 거사를 위해 기미독립선언서와
독립운동 관계서류를 가지고 경부선 물금역에 내려 금정산 고당봉을 넘어
청련암으로 온 통로도 북문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북문에서 올려본 고당봉.
금정산성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문에 설치되었으며
1701년~1703년(숙종 29년)에 건설이 완료되었다.
벽 공사는 1707년에 끝났으며, 길이 17.3km, 높이 1.5~3m,
성 내부의 넓이는 8.2㎢의 규모이다.
일제 강점기에 많은 성곽이 유실되었으나 1972년부터 복원작업에 들어가
동문, 남문, 서문이 1974년 완공되었다.
정상을 향하는 도중 잠시 숨을 고르며 뒤를 돌아다 보았다.
옅은 안개가 능선을 잡아삼키고 있는 모습이다.
위쪽을 바라보니 정상은 바로 코앞이고...
고당봉 정상 바로 아래에는 기도처인 고모령 신당이 자리잡고 있다.
우리나라 고유의 샤머니즘 민속신앙으로 하늘에서 고모할머니가 내려와
산신이 되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평생을 불심으로 살다간 밀양박씨 화주보살의 이야기가 서려있다고도 한다.
지금으로부터 400여년 전 밀양사람인 박씨가 불가에 귀의, 임진왜란으로 잿더미가 된
범어사에서 화주보살이 되어 절의 살림을 꾸려나가는데 신명을 바쳤다.
어느덧 나이가 많아 이 보살은 큰스님에게 자신이 죽으면 화장을 하여
고당봉에 고모영신을 모시는 산신각을 지어주면 수호신이 되어 범어사를 돕겠다는
유언을 하고 숨을 거둔다.
큰 스님은 유언대로 행하고 해마다 단오날에 산신제를 지냈더니
범어사가 번창하게 되었다는...
금정산에서 가장 높은 지점인 고당봉(姑堂峰)위에 섰다.
바로 아래 길게 세워진 바위가 정상석이다.
고당봉은 높이가 801. 5m로 부산광역시와 양산시의 경계면에 위치해 있으며,
낙동강 지류와 동래구를 흐르는 수영강의 분수계를 이루는 화강암의 봉우리이다.
이곳에서는 김해국제공항과 광안대교, 그리고 맑은 날에는 김해시와 창원시 일부 및
대마도까지 보인다는데 지금은 시계가 전혀 허용하지 않는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니 거쳐왔던 북문이 저 아래 뿌옇게 흐려 보인다.
고당봉에 흰구름이 걸려 있으면 마치 천상의 세상을 연상케 한다는
뜻에서 금정8경 중 고당귀운(姑堂歸雲)에 해당된다.
발 아래로는 마치 넓은 평원에 선 듯 숲이 무성하다.
이어지는 능선은 자욱한 안개에 몸을 감추고 있어 신비감마저 들게하고...
주위를 조망하며 잠시 상념에 잠겨본다.
희뿌연 안개에 더 이상 먼곳까지 조망해 볼 수 없음이 안타깝기도 하지만,
지금 이대로도 운치가 있어 위로를 삼아본다.
온 길 반대편으로도 길은 이어지지만 시간이 허락하지 않아
결국 왔던 길로 되돌아 선다.
내려가는 길에는 금정산과 범어사라는 이름의 연원이 된 금샘을 찾아보았다.
금정산 고당봉 아래에 위치해 있으며, 솟아있는 바위 위 평탄한 면의
웅덩이에 물이 고여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1432년에 편찬한 '세종실록지리지'와 1481년에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에는
금정산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금정산 서북산정에 바위가 있는데 둘레가 10자(3m) 남짓하며 깊이는 7치(21cm)쯤 된다.
물이 항상 넘쳐 가물어도 마르지 않으며 빛깔은 황금과 유사하다.
옛날 황금색 물고기 한 마리가 오색 구름을 타고 범천(梵天)에서 내려와 그곳에서 헤엄치고
놀았으므로 금샘이라 불렀고, 범어사의 창건설화가 시작된 곳이다'
소박한 석공의 솜씨와 같은 이것은 지형학적으로 풍화혈 중의 하나인 나마(Gnamma)라고 한다.
풍화혈은 암석의 작은 틈이나 오목하게 들어간 곳이 비가 오면 물이 고이거나 그늘이 지면서
그 부분이 주변보다 약해져서 부스러지거나 그 틈으로 풍화작용이 일어나 점차 크기가 커져서
생성되기도 하고, 물을 많이 함유한 토양이 암석과 함께 오랫동안 지하에 있다가 지표로 드러나면서
차별적으로 침식이 이루어지면서 만들어진다.
이 풍화혈 중에서 평탄한 면에 만들어진 것을 나마라고 한다.
나마의 어원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인 아보리진의 언어로서 '구멍'을 뜻하며
지금은 지형학 용어로 공통적으로 사용되고 있다.